트럼프가 승리했다. 트럼프의 2016년 대선 승리는 미국 대선 역사상 가장 예상치 못한 결과로 기록될 것이다. 11월8일 선거 당일 오후 7시(현지 시각)까지만 해도 〈뉴욕 타임스〉 예측 모델은 클린턴이 승리할 확률을 80% 이상으로 내다봤다. 양당 대선 후보가 정해진 6월부터 11월8일까지 〈뉴욕 타임스〉 예측 모델에서 단 한 번도 트럼프가 우세한 적은 없었다. 〈뉴욕 타임스〉뿐 아니라 정확한 선거 결과 예측으로 명성을 얻은 네이트 실버가 이끄는 파이브서티에이트닷컴(fivethirtyeight. com)도 클린턴의 승리를 확언했다.

2015년 6월 맨해튼 트럼프타워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대선 경선에 뛰어들겠다고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가능했던 것일까?
 

ⓒEPA11월8일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가 플로리다와 오하이오에서 승리하자 뉴욕 힐튼 미드타운 호텔에 모인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먼저 미국 유권자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구 3억2000만명 중에서 투표 가능한 연령대의 인구는 총 2억2600만명이다. 이 중에서 백인 유권자는 1억5600만명으로 7000만명의 유색인종 유권자의 두 배가 넘는다. 2012년 투표 가능한 연령의 인종 구성과 비교해보면 백인 유권자가 고작 2% 증가할 때 히스패닉 유권자는 17%, 아시아계 유권자는 16%나 늘었다. 하지만 여전히 백인 유권자들이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투표를 하려면 정해진 기간 내에 유권자 등록을 마쳐야 한다. 주별로 날짜와 규정이 다른데, 2012년 대선 데이터를 살펴보면 투표 가능 인구 중 70% 정도가 등록한다. 백인 유권자의 등록 비율이 흑인이나 아시아계 그리고 히스패닉 유권자들보다 높았다. 이번에도 실제 투표를 행사한 유권자 중에서 백인 비율은 투표 가능 인구에서의 백인 비율보다 더 높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인종적으로 다양했다 하더라도 백인 유권자들의 지지 없이 대선 승리가 어려운 이유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핵심 유권자 계층이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백인 남성이라는 보도가 많았다. 하지만 이들이 전체 유권자 분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그리 높지 않고, 대학 교육을 받은 백인 유권자는 클린턴을 지지할 것이라는 예측 때문에 클린턴 캠프에서 백인 유권자 문제는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클린턴의 선거 전략 역시 급격히 증가하는 유권자 그룹인 히스패닉, 오바마 대통령의 적극적 지지 세력이었던 젊은 층, 흑인들의 투표율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선거 직후 발표된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클린턴 캠프에서 백인 유권자 문제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2012년 오바마 대통령은 백인 남성 유권자 중 35%로부터 지지를 받았는데 이번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그보다 낮은 31%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백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트럼프 지지율이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CBS 방송국 출구조사를 보면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백인 남성 유권자의 72%가 트럼프를 선택했다. 클린턴의 안전한 지지층이라고 생각했던 대학 교육을 받은 백인 여성들조차 절반이 조금 넘는 51%만이 클린턴을 지지했다. 나머지 45%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등 클린턴의 백인 유권자 문제는 전문가들이나 민주당이 가정한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보수 백인 정서를 정확히 읽어낸 트럼프

트럼프의 대선 승리를 두고 미국 유권자들이 워싱턴 정가에 변화를 요구한 결과라는 해석은, 실제 유권자들이 왜 그를 지지하는지 제대로 읽지 못한 오독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을 하나로 묶는 공통 주제는 바로 ‘변화에 대한 거부감’이다. 1965년 흑인과 소수 인종의 선거권을 보장하는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이 통과된 이후 지난 50년간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지위는 여러 방면에서 향상되었다. 2008년 오바마 후보의 당선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동시에 이민자가 증가해 미국 사회에서 아시아계와 히스패닉계가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보수적 성향의 백인들은 이러한 변화가 자신들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전통적인 ‘미국적 가치’를 위협하며, 사회의 다수이자 기득권인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까지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다. 트럼프는 이러한 보수적 백인들의 정서를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 (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선거 구호로 정확히 짚어냈으며 이들의 정서를 캠페인 기간 내내 대변했다.
 

ⓒAP Photo당선 축하 행사장에 모였던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들이 대선 개표 결과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보수 성향 백인들의 반격만이 트럼프의 예상치 못한 승리를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2012년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인 밋 롬니가 받은 지지율보다 모든 인종에서 트럼프의 지지율이 올라갔다. 〈뉴욕 타임스〉가 분석한 출구조사를 보면 2012년에 흑인 유권자의 95%가 오바마를 지지했다. 하지만 2016년 선거에서는 흑인 유권자들의 88%만이 클린턴을 지지했다. 민주당이 큰 희망을 걸었던 히스패닉 유권자들 역시 2012년 73%가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줬지만 이번 선거에서 그 비율은 65%로 떨어졌다. 멕시코 이민자를 강간범으로 묘사하고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거대한 벽을 세워 이민자를 통제하며 불법 이민자를 소탕하겠다는 공화당 후보에게 여전히 30% 가까운 히스패닉 유권자가 표를 준 것이다.

전통적 공화당 지지자들의 눈으로 볼 때 트럼프라는 후보는 허점투성이였다. 선거 막판에 끊임없이 제기된 성추문 논란, 정책과 타 종교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한계를 모르는 자아도취에 이르기까지, 캠페인 내내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가장 준비가 안 된 후보라는 점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상식적인 공화당 지지자라면 아무리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합법적인 절차로 선출한 후보라도 그를 지지하기는 어려우리라 여겨졌다. 하지만 공화당 지지자들에게는 트럼프에 대한 경멸보다 더 큰 판단 기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화당원들이 민주당과 민주당이 배출한 후보를 얼마나 싫어하느냐였다.

미국 선거 연구 프로젝트(ANES:American National Election Studies)는 유권자들에게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상대 정당에 대한 호감도를 물어왔다. 숫자가 높을수록 호감도가 높고 숫자가 낮을수록 호감도가 낮다는 의미다. 위 〈표〉는 민주당 지지자들과 공화당 지지자들이 자신의 정당과 상대 정당에 대해 매긴 호감도가 1978년부터 2012년까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준다.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 모두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대한 호감도는 70점대로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는 변화는 바로 상대 정당에 대한 호감도의 급격한 하락이다. 1980년만 하더라도 민주당 지지자들의 공화당에 대한 호감도는 50점에 근접했지만 2012년에 이 수치는 30점 이하로 떨어졌다. 공화당 지지자들의 민주당에 대한 호감도도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상대 정당에 대한 호감도 하락과 동시에 미국 유권자 중 상대 정당의 대선 후보에 대해서 “화가 난다(angry)” 혹은 “두렵다(afraid)”라고 말하는 비율도 지난 30년간 많이 증가했다. 이러한 패턴을 보면, 트럼프가 말실수를 하고 여성을 경멸하더라도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민주당 후보인 클린턴 지지는 불가능한 선택지였을 터이다. 더더욱 민주당 후보가 20년이 넘은 기간에 민주당 정권의 퍼스트레이디, 민주당 상원의원 그리고 민주당 정권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민주당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점은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민주당에 대한 비호감을 극대화했다. 이것이 결국 트럼프가 흠이 많더라도 공화당 지지자들은 여느 선거와 같이 공화당 후보에게 표를 던진 이유였을 가능성이 크다.
 


경합 주 유권자들이 대통령을 ‘선택’하는 셈

그렇다면 상대 후보에 대한 반감 혹은 상대 당에 대한 거부는 왜 증가했을까? 정치학자들은 보수와 진보 이념 자체 양극화와 더불어 선거가 과거보다 훨씬 더 치열한 경쟁 양상을 보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1860년대부터 2010년까지 미국 의회 선거에서 양당의 득표율 평균을 계산해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경쟁이 치열해졌음을 알 수 있다. 남북전쟁 이후에는 공화당 후보들이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고 1930년대 뉴딜 시대 이후 1980년대까지는 민주당 의원들이 의회 선거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1990년 이후로 의회 선거는 훨씬 더 치열해졌고 승패를 가르는 표 차이는 과거보다 훨씬 줄었다. 이것이 상대 정당에 대한 호감도를 급격히 낮추었다.

미국은 선거인단 제도를 통해 대통령을 선출한다. 메인 주와 네브래스카 주를 제외한 48개 주가 과반 유권자의 지지를 받은 후보자에게 그 주에 부여된 모든 선거인단을 몰아주는 방식이다. 선거인단 수만 놓고 보면 트럼프와 클린턴의 차이는 커 보인다. 하지만 전체 유권자 투표 결과만 놓고 본다면, 0.2%포인트 차이로 박빙의 승부였고 이 승부의 승자는 트럼프가 아닌 클린턴이었다. 표를 행사한 모든 유권자 중 47.7%가 클린턴을, 47.5%가 트럼프를 지지했다. 클린턴은 2000년 민주당 앨 고어 후보의 패배처럼 전체 유권자 투표에서 더 많은 표를 받고도 선거인단 수에서 밀려 대통령에 선출되지 못했다.

클린턴은 매우 근소한 차이로 대다수 경합 주에서 트럼프에게 졌다. 대표 경합 주인 플로리다에서 1%포인트 차이로 졌지만 승자독식 방식에 따라 모든 선거인단을 트럼프에게 내줘야 했다. 펜실베이니아와 미시간 주에서도 ‘1%포인트 차이’ 패배였지만, 선거인단에서는 ‘100% 패배’로 끝났다. 선거인단 제도는 이번 선거가 보여주듯 다수의 유권자가 선택한 후보자가 경합 주에서 매우 근소한 차이로 패하면 대통령으로 당선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몇몇 경합 주의 유권자들이 대통령을 ‘선택’하는 시스템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여러 단체가 이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 노력해왔지만, 미국 대선에서 선거인단 제도가 사라질 가능성은 낮다. 각 주에 할당되는 선거인단 수는 인구 규모와 관계없이 50개 주에 똑같이 할당된 상원의원 2명에 인구 규모에 따라 정해지는 하원의원 수를 합친 것이다. 현재의 제도 아래서 혜택을 받는 주들이 존재하는 한, 이 제도를 개혁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AFP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TV 개표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트럼프 당선에 기여한 또 다른 미국의 정치제도는 바로 당내 경선이다. 당내 경선은 당원들에게 후보자 선출에 더 많은 권한을 준다. 그동안 민주당과 공화당이 대선 후보를 선출한 과정을 살펴보면 당 지도부의 입김이 크게 작용해왔다. 당 지도부가 대선 후보자로 선출하고자 하는 이가 있는 경우는 공개적으로 지지 선언을 하거나 후보자의 선거 모금을 돕는다. 반대로 당 지도부가 반대하는 후보자의 경우는 언론에 비난하는 성명을 내는 식으로 대선 후보 선출에 깊이 관여해왔다.

하지만 유권자들 간에 이념의 골이 깊어지고 정당 소속감이 강화되는 동안 오히려 미국 정당의 힘은 약해졌다.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의 등장은 당 지도부의 ‘언론 플레이’ 효과를 반감시켰다. 후보자가 SNS로 유권자들과 소통하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후원금 모금 역시 마찬가지다. 후보자가 직접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인터넷을 이용해 쉽게 후보자를 지원할 수 있는 플랫폼이 마련되었다. 과거 돈과 인적 자원을 관리하던 당의 권한은 매우 약해졌다. 공화당 지도부가 경선 기간 내내 트럼프의 대선 후보 선출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권자들에게 후보 선출 과정에서 더 많은 권한을 주기 위해 도입한 당내 경선 제도나 각 주의 정치적 화합을 유지하기 위해 도입했던 선거인단 제도가 트럼프처럼 자격 없는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유권자는 미국 민주주의의 바탕을 이뤄온 이러한 제도들의 정당성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이다.

트럼프가 내년 1월20일 취임하자마자 바로 멕시코와의 국경에 거대한 벽이 세워지고 무슬림의 미국 입국이 중단되며 오바마 케어가 폐기될까? 미국 대통령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자리다. 하지만 미국 민주주의 제도의 특성 때문에 끊임없이 견제를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미국 정치제도의 핵심은 견제와 균형이다. 미국 상원과 하원 모두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장관 후보자나 대법원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 권한을 가진 상원의 경우, 공화당은 필리버스터를 끝낼 수 있는 60석에는 한참 부족한 51개 의석만 확보했다(하원은 공화당 235석·민주당 191석). 트럼프가 취임하면 현재 공석인 대법관을 새로 임명하겠지만 그 후보자가 상원 인준을 거치기 전에는 미국 연방 대법원 역시 보수와 진보 대법관 수가 4대4로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국제무역이나 국가 예산에 관한 법안은 하원에서만 발의할 수 있고,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하원이 발의하는 모든 법안은 상원에서도 통과되어야 한다. 그런 만큼 트럼프의 어젠다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속전속결로 현실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견제와 균형이 그 어느 때보다 잘 작동되기를 기대해본다.

 

 

 

 

ⓒAFP도널드 트럼프 지지자가 힐러리 클린턴의 가면과 죄수복을 입고 트럼프의 유세장에 나타났다.

 

 

 

기자명 유혜영 (밴더빌트 대학 교수·정치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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