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전체를 특별재난구역으로 선포해야 할 지경이다. 환란이나 대지진보다 더 엄혹하다. 위기에 대처할 시스템 자체가 망가졌다. 방어 체제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이 국정을 수행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신뢰를 잃었다. ‘녹화 사과’를 한 데다 국민이 받아들이기 힘든 개각을 하는 바람에 정부청사 전체가 마비되게 생겼다. 당연히 국가의 시급한 현안마저 밀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작은 경제 위기도 국가부도를 부를 수 있다. 메르스나 세월호 참사 같은 큰 사건이 다시 터진다면 수습 불가의 대혼란에 빠질 것이다.

나쁜 일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 경제를 지탱해온 튼튼한 기둥 가운데 하나였던 조선·해운업은 대책 없이 붕괴하는 중이다. 체감하기로는 한국 경제의 절반쯤 되는 무게인 삼성도 이상하다. 이재용 체제의 삼성은 최순실씨의 딸에게 말을 상납해 권력을 좇는 데는 여전히 재계를 선도하는 절대 고수란 점을 과시했다. 하지만 기술력에서는 예전의 삼성이 아니다. 갤럭시 노트7의 결함 원인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손을 들 정도로 무기력하다. 이미 메르스 사태 때 이재용씨의 역점 사업인 바이오 기업의 최전선에 선 삼성병원이 얼마나 허술한지 만천하에 광고하지 않았던가. 공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조선·해운업과 삼성이 대한민국을 쌍끌이로 흔든다면 상상하기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미래학자 존 L. 캐스티가 지적했듯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삼성 내부가 얼마나 심하게 곪았는지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랄 가능성이 있을까. 내기를 한다면 ‘매우 그렇다’는 쪽에 나는 걸겠다. 삼성의 내부가 박근혜 정부처럼 공적인 감시망에서 벗어난 지 너무 오래되었다.

ⓒ한성원 그림
자영업자이건 중소기업인이건 누구든 한번 붙들고 물어보시라. 시장의 체감 경기는 환란 직전 수준으로 얼어붙었다. 정부의 감시가 아예 없는 틈을 타 가계부채는 위험수위를 한참 넘었다. 이런 형편에 갑자기 북한과의 긴장이 고조되거나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점쳤듯이’ 김정은 체제가 갑자기 흔들리는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거기다가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하기라도 한다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지려나.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한반도는 지금 멀쩡한 정부라도 대처하기 힘겨운 일들에 겹겹이 포위돼 있다.

어떤 사회에 감당하기 힘든 일이 닥치면 기득권 세력은 냉정하게 대처하기보다는 ‘멘붕’이 되곤 하는데, 재난 연구자들은 이걸 ‘엘리트 패닉’이라 부른다. 1985년 멕시코시티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일부 의류업체 사장들은 공장에 갇혀 울부짖는 여공과 이미 죽은 이들의 시신을 외면하고 기계와 원단을 건져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불이 꺼진 뒤 경찰은 약탈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가족이 건물 더미를 파헤치는 것조차 막았다. 9·11 테러 때는 미국 부시 대통령이 테러에 책임이 없는 이라크를 침공하는 바람에 중동의 무고한 민간인 수십만명이 죽었으며 전 세계가 난민 회오리에 휘말리고 말았다. 재난이 일어났을 때 정치인이나 관료, 그리고 가진 자들은 사태를 수습하기보다는 더욱 크게 키우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우선순위가 상식과 동떨어진 탓이다. 그들에게는 사유재산이나 국제무역, 경제 수치 혹은 차기 선거가 인명보다 더 소중하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서나 거의 예외 없이 이런 일이 되풀이된다. 지금 대한민국의 여권에서 벌어지는 볼썽사나운 일들도 모두 엘리트 패닉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재난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은 대개 평범한 사람이다. 그들은 겁을 먹지만 할리우드 영화에서처럼 부적절한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재난은 무정부 상태를 연출하지만 약탈·살인·강간·방화와 같은 극단적인 무질서를 불러들이는 일은 드물다. 오히려 사람들은 폐허 속에서 ‘날카로운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놀랍게도 서로가 도와주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에 둘러싸여 ‘낙원의 편린’을 봤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람들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득도한 고승처럼 급작스럽게 뭐가 중요한지 깨닫는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가치 없는 일들을 하느라 인생을 낭비해왔는지 알고는 새삼 놀란다. 사람들은 재난 현장에서 아낌없이 먹을 것과 덮을 것을 나누며 서로 끌어안는다.

재난은 어김없이 무능하거나 부패한 정부의 실체를 드러내는 효과가 있다. 예전에 광주 사람들이 그랬듯이 사람들은 재난 속에서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경험을 한다. 갑질을 하던 사회 지도층이 사악하지만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눈으로 직접 보고 의식화된다. 재난은 보통 사람을 민주 투사로 단련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을 지녔다. 그렇다. 멕시코와 에콰도르는 끔찍한 지진을 겪고 나서 군부독재를 청산할 수 있었다. 재스민 혁명을 일으켰던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처럼 잠깐 낙원을 맛본 뒤에 다시 더욱 가혹한 신질서에 시달리는 경우도 적지는 않다. 잠깐이나마 낙원을 맛봤기 때문에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더욱 큰 고통을 겪는다.

미국은 두 가지 경우를 다 겪었다. 2001년 9·11 테러와 2005년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 때이다. 두 번 모두 시민의 행동은 반듯했다. 9·11 테러 때 시민은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 무역센터를 탈출한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 순식간에 대규모 조직을 꾸렸다. 미국 전역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다. 유니언 광장 곳곳에 배급소와 토론장을 마련했다. 한편에서는 돕고 한편에서는 미국이 어디가 잘못됐는지 열심히 토론했다. 공공기관은 효율성에서 언제나 민간기관에 뒤졌다. 우왕좌왕하던 부시 행정부가 처음 한 일은 미국을 시민의 손에서 되찾는 것이었고 대체로 성공했다. 정부가 유포한 공포에 미국인은 굴복했다. 9·11 이후 미국에서는 인권과 사생활 보호가 유례가 없을 만큼 퇴보했다.

카트리나 사태 때도 영웅은 시민이었다. 수백, 수천명의 이름 없는 이들이 목숨을 걸고 재난 지역으로 달려가 사람들을 구했다. 젊은이들은 고립된 노약자를 구하기 위해 조력자들을 모았다. 재난 이후에도 자원봉사자 수만명이 멕시코만 연안을 복구하려고 몰려들었다. 반면 공권력은 최악으로 작용했다. 현장에서 약탈과 강간이 자행된다는 헛소문에 속아 지역을 봉쇄하는 통에 무고한 고립자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선량한 시민을 폭도로 오인해 총질을 해댔다. 엘리트 패닉은 인종주의 폭풍을 불렀다. 하지만 카트리나 사태는 미국인을 성찰하게 했다. 이번에는 시민이 승자였다. 공화당 부시 행정부의 오만과 무능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카트리나 사태는 미국에서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는 비약을 만들어냈다.

그때 김재규의 신병을 군에서 빼앗았다면…

우리에게도 재난이 더욱 야만스러운 신질서를 불렀던 아픈 기억이 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손에 살해됐을 때이다. 18년 장기 독재가 갑자기 무너지고 권력 공백 상태가 되었다. 서울에 봄이 찾아왔고 양심수들이 풀려나 민주주의가 만개할 것 같았다. 유력 정치인들이 차기 대권을 차지하기 위한 계산을 하느라 골치가 아플 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김재규의 신병 확보에 전력을 쏟았다. 그들은 법을 무시하고 김재규를 군사법정에 몰아넣고 입맛대로 요리했다. 변호인들과 함세웅 신부·오태순 신부 등이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 김재규 구명 운동을 하자고 호소했으나 외면당했다. 정치인의 계산은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박정희 독재의 앞잡이 노릇을 해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 오히려 법의 칼자루를 쥐고 휘두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김재규의 거사는 권력욕에 눈이 먼 자의 하극상 사건으로 축소됐고 박정희 정권의 부패와 무능이 만천하에 드러날 기회가 날아가고 말았다. 신군부는 광주에서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려던 시민을 죽이고 공포를 확산해 더욱 야만스러운 질서를 구축했다.

정치인과 시민이 힘을 합쳐 김재규의 신병을 군으로부터 빼앗았다면 세상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그가 박정희를 살해한 진짜 동기야 어떻든 그의 입을 통해 박정희 독재의 낯 뜨거운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것이다. 변호인들과 접견한 기록을 보면 그는 박정희 뒤에 숨어 온갖 못된 방법으로 치부한 여당의 정치인과 기업인, 낮에만 야당 노릇을 하며 정치 혐오를 퍼뜨리던 ‘사쿠라’들의 실명과 행태를 까발릴 용의가 있었다. 민간 법정에서 이런 진술이 자유롭게 이루어졌다면 박정희 망령은 벌써 30년도 더 전에 사라지지 않았을까. 그 딸이 대통령이 되는 일도 없었을 거고.

김재규와 최순실에게는 둘 다 대통령을 죽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 명은 진짜로, 한 명은 정치적으로. 두 사람 모두 그 체제의 몸통이기도 했다. 우리가 10·26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뼈아픈 교훈은 그 체제에 부역한 책임이 있는 자들이 사법의 칼자루를 쥐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점이다. 지금의 검찰이야말로 박근혜 정부와 한 몸처럼 어울려 돌아갔던 조직이고 그들은 최순실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기에 가장 적절하지 못한 집단이다. 그 조직에는 최순실과의 공범도 적지 않을 것 아닌가.

주권자로서, 재난에 언제나 건강하게 대처하는 시민으로서, 보통 사람들이 정치인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원칙은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책임지고 처벌받아야 마땅한 자들의 손에 더 이상 최순실을 맡겨놓지 말라는 것이다. 특검이 됐든 특별수사본부가 됐든 야당과 국민의 감시 아래 수사팀부터 새로 짜는 게 옳다. 그녀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광장을 다시 가득 메워야 한다. 우리는 낙원의 불꽃을 볼 기회를 맞았다. 계급장 떼고 어디서부터 이 나라가 잘못됐는지 자유롭게 토론하자. 세월호, 메르스, 북한 핵, 사드, 삼성, 빈부 격차에 대해 원점에서부터 다시 논의해보자. 4월 혁명, 광주 민중항쟁, 6월 항쟁, 촛불시위 때 면면히 이어왔던 민주주의 학교를 다시 열자.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폐허가 된 나라를 복구할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 목숨을 걸고 곤경에 빠진 이들을 돕고,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현재의 안락을 기꺼이 반납할 이웃이 넘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이번 싸움에선 시민이 승자가 되어야 한다. 재난을 도약의 기회로 바꿔보자. 창피해서라도 이대로는 못살겠다.

참고한 활자:〈X 이벤트〉(반비), 〈이 폐허를 응시하라〉(펜타그램),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시사IN북)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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