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머니즘.’ 〈뉴욕 타임스〉, 〈NPR〉(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가디언〉 등 일부 외신이 최순실 게이트를 보도하며 사용한 표현이다. 국내에서 최순실씨가 무속인이거나 점쟁이라는 추측이 많다. 뚜렷한 증거가 없는데도 이런 언급이 계속되는 이유는 최순실씨의 아버지 최태민과 사교(邪敎)의 연관성 때문이다. 최태민은 1975년 처음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이후 20여 년간 박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최순실씨가 박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아버지 최씨를 통해서였다.

최태민의 사이비 종교 활동을 처음 세상에 알린 주인공은 고 탁명환 신흥종교문제연구소 소장이다. 〈시사IN〉은 탁 소장의 아들 탁지일 부산장신대학교 교수로부터 자료를 제공받았다. 탁 소장은 1988년 〈현대종교〉에 ‘부끄러운 권력의 시녀 목사들’이라는 글을 3회 연재해 최태민과 그 주변 목사들을 비판했다. 〈현대종교〉에는 최태민의 행적이 더 담겨 있다.

탁명환 소장은 1973년 5월13일 〈대전일보〉 4면 하단에서 이런 광고를 발견했다. ‘영세계에서 알리는 말씀. 영세계 주인이신 조물주께서 보내신 칙사님이 이 고장에 오시어 수천 년간 이루지 못하며 바라고 바라는 불교에서의 깨침과, 기독교에서의 성령강림, 천도교에서의 인내천, 이 모두를 조물주께서 주신 조화로서 즉각 실천시킨다 하오니 모두 참석하시와 칙사님의 조화를 직접 보시라 합니다. (중략) 칙사님의 임시 숙소:대전시 대사동 196, 케이블카에서 200m 지점, 감나무집.’
 

ⓒ연합뉴스1975년 6월21일 배재고등학교에서 열린 한국 구국십자군 창군식에 영애 박근혜(왼쪽 두 번째)와 최태민씨(맨 왼쪽)가 참석해 사열하고 있다.

탁 소장은 충남 대전 보문산 골짜기의 감나무집을 찾아갔다. 자칭 ‘영세계 칙사’는 최태민이었다. 당시에는 ‘원자경’이라는 가명으로 교주 행세를 했다. 탁 소장은 “그는 벽에다 둥근 원을 색색으로 그려놓고 그것을 응시하면서 ‘나무자비 조화불’이란 주문을 계속 외우면 만병통치하고 도통의 경지에 이른다고 주장했다”라고 기록했다.

1973년 7월 탁 소장은 원자경씨(최태민)의 집회를 취재했다. 1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원자경 교주는 자신이 ‘영세계에서 알리는 말씀’을 들었다며 〈영세계 칙사론〉이라는 책자를 나눠준다. 그 내용은 이렇다. “대한민국을 영적 종주국으로 정한 조물주의 뜻을 전하러 칙사님(본인)이 왔다. 그러니 조물주의 역군으로서 인류를 위해 앞장서실 분, 태몽을 받고 출생하신 분, 현몽(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나는 것)을 받고 계시는 분 등은 상담을 하러 오길 바란다.” 탁 소장은 자칭 ‘영세계 칙사’가 “흔히 점을 치고 관상을 보는 무속인들과 유사하다”라고 평가했다.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가 피살되었다. 1975년 초, 원자경 교주는 ‘최태민’이라는 이름으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박근혜 대통령 일기에 따르면 이때 육 여사의 죽음에 위로와 애도를 보내는 편지가 청와대에 많이 도착했고, 이 중 몇 명과는 직접 만나기도 했다. 최태민도 1975년 3월6일 처음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접견한다.

이 만남 이후 최태민은 20년간 박 대통령의 자문 역할을 하게 된다. 박 대통령을 만나고 한 달 뒤인 1975년 4월10일, 최태민 ‘목사’는 대한구국선교단을 만들고 총재로 취임한다(이때부터 최태민은 목사를 자칭한다. 1990년 12월호 월간지 〈우먼센스〉와 인터뷰에서 최태민은 “1975년 1월에 종합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 5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1974년까지 영세계 칙사론을 폈다는 탁 소장의 취재에 따르면 정식 신학 교육을 받았다고 보기 어렵다).
 

대한구국선교단 창군 선언문은 ‘승공’ ‘반공’ ‘멸공’으로 가득하다. 창군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승공의 유일한 길은 신앙으로 통일된 정신무장의 길임을 깊이 깨달아 전국 복음화 운동에 앞장선다. 2. 민족의 염원인 조국통일 성업에 앞장설 것이며 북한이 수복된 후 사회질서 정화에 앞장선다. 3. 사회 부조리의 정화 운동에 행동으로 앞장선다. 가. 선량한 교인을 우롱하는 사이비한 종교 일소에 앞장선다. 나. 퇴폐풍조 일소에 앞장선다.

최태민이 개신교 반공 단체를 만든 데에는 ‘신분 세탁’ 성격이 짙다. 물론 영향력 확대도 노렸다. 탁지일 부산장신대학교 교수는 “유신 치하 이단들은 반공을 국시로 내건 군사정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적극적으로 ‘승공’ ‘멸공’ 운동을 진행했다. 기성 교회에서 이단으로 분류되는 그들이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이른바 ‘반공적 기독교’의 모습은 최태민의 활동이 명분을 갖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라고 설명했다.

최태민은 당시 박근혜 ‘영애’를 대한구국선교단의 명예총재로 추대하고, 본격적으로 세력을 불렸다. 1976년 4월29일 구국여성봉사단을, 6월21일 구국십자군을 창설한다. 여성봉사단은 노약자·어린이·병원과 관련된 봉사활동을 내세웠고 구국십자군은 “멸공 구국 통일의 위업을 위한” 구국선교단의 군사조직으로 만들어졌다. 세 단체 모두 최태민이 총재를, 박근혜 영애는 명예총재를 맡았고, 주요 행사마다 박근혜가 참석했다. 1976년 12월10일, 대한구국선교단은 대한구국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1978년 6월, 대한구국봉사단은 구국여성봉사단과 조직을 합쳐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박근혜는 총재에, 최태민은 명예총재에 올랐다.

탁명환 소장은 “이런 단체들이 권력의 후광을 업고 세도가 제재를 가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되었으며, 그 이유는 최씨의 행사 때마다 근혜양이 나타났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다. 부정 축재 의혹도 제기됐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항소이유서나 선우련 청와대 공보비서관 비망록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9월12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이른바 ‘최태민 보고서’를 직접 작성한 백광현 국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박근혜에게 최태민 문제를 직접 물었다. 이때도 박근혜는 최태민을 변호했다.

아버지 박정희도 최태민을 포기했다

아버지 박정희도 어쩔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 조사와 1980년 제5공화국 합동수사부 수사에 따르면 최태민은 여성 편력을 비롯해 총 14건에서 당시 돈으로 약 2억2000만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았다. 1980년 최태민은 강원도 인제에 구금됐다. 그해 11월, 새마음봉사단은 해체됐다. 그러나 최태민과 박근혜 관계는 지속되었다. 1983년 1월, 박근혜 대통령이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최태민이 육영재단·영남대학교·정수장학회 인사와 이권 사업에 개입한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최순실씨도 당시 운영하던 초이유치원을 통해 육영재단 내 어린이회관 운영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샀다. 결국 1990년 11월3일 박근혜 대통령은 육영재단 이사장과 박정희·육영수 기념사업회 회장직에서 물러난다. 박근혜 대통령은 그때나 지금이나 ‘최태민’ 또는 ‘최순실’ 이름만 나오면 “가장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이라고 해명한다. 40년간 지속된 최태민 일가와 박 대통령의 잘못된 만남이, 2016년 대한민국을 통째로 흔들어놓고 있다.

기자명 신한슬 기자 다른기사 보기 hs51@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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