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이원종 대통령비서실장)”가 실제로 벌어졌다. 10월25일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 게이트의 일부를 인정했다. “최순실씨는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이나 홍보 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개인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일부 자료들에 대해 의견을 들은 적도 있다.” 대통령의 입에서 처음으로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불려졌다. ‘비선 실세 최순실’이 공식화된 순간이었다.

10월19일 JTBC가 최순실씨의 측근 고영태씨의 “회장이 제일 좋아하는 건 연설문 고치는 일이었다”라는 전언을 보도할 때만 해도 설마 하는 수준이었다. 증언만 있고 물증이 없었다. 청와대 참모들도 자신했다. 10월21일 국회 운영위에 참석한 이원종 대통령비서실장은 “정상적인 사람이면 믿을 수 있겠느냐”라며 웃었다. 말뿐 아니라 표정에서도 여유가 보였다. 청와대 시스템상 불가능하다는 답변도 덧붙였다.
 

ⓒ시사IN 조남진박근혜 대통령(왼쪽)은 최순실씨가 연설문을 받아보고 수정한 사실은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그녀가 국정에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최순실씨(오른쪽)는 자신과 관련된 의혹에 대해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저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협박도 하고 5억(원)을 달라고 했다”라고 반박했다.

그의 미소가 사라지기까지 사흘도 걸리지 않았다. 10월24일 JTBC는 “최순실씨 컴퓨터 파일을 입수해서 분석했고, 대통령 연설문 44개를 연설 이전에 파일 형태로 받아 봤다”라고 보도했다. 당선인 신년사, 드레스덴 선언문, 수석비서관회의 등 국정과 관련된 주요 문건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대북 접촉 3차례’와 같은 국가기밀도 담겨 있었다. ‘설마’ 하던 고영태씨의 증언을 뒷받침해주는 결정적 물증이었다. 그 순간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 의혹은 팩트가 되었다.

앞서 2014년 7월7일 국회 운영위에서 당시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이재만 대통령비서실 총무비서관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이재만 비서관이 서류를 잔뜩 보자기에 싸들고 밤에 외출을 하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당시 이 비서관은 “청와대에서 집에 갈 때 하다 만 서류나 집에 가서 보기 위한 자료를 가져가는 수가 있다”라고 대답했다. 박 의원은 청와대 문건을 외부로 가져가는 것이 가능한지 따져 물었지만, 이 비서관은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대통령 연설문뿐만 아니라 JTBC가 최순실씨 태블릿 PC 속 자료라고 소개한 문건에는 최씨가 국정 곳곳에 관여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동안 뜬금없거나 설명이 되지 않는 국정 운영 장면에 ‘최순실’이라는 키워드를 넣으면 독해가 되었다. 최순실 게이트가 모습을 드러낼수록 박근혜 정부에서 펼쳐졌던 공직 사회의 미스터리가 풀리고 있는 것이다.

‘최순실’ 키워드를 넣으면 독해가 된다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인사가 대표적이다. 문체부에는 유독 ‘전격 인사’가 많았다. 갑작스러운 경질과 인사 공백이 박근혜 정부 들어서 자주 펼쳐졌다. 박 대통령이 유진룡 장관을 청와대로 불러서 노태강 국장과 진재수 과장을 콕 찍어 “참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한 이야기는 이제 유명하다. 두 사람은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개명 전 정유연)와 관련된 승마 판정 시비에 대해 감사를 벌였다. 최순실씨가 원하는 쪽으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감사를 맡았던 두 공직자는 좌천됐다.

유진룡 전 장관은 〈시사IN〉 기자와 만나 “당시 마사회는 최순실씨 딸에게 특혜를 준 게 아니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하는 서비스를 받으면 특혜다. 공평하지 못했고 이런 일이 없는 방향으로 조치하겠다고 보고했다. 누가 역성을 들든 옳은 건 옳은 거고 그른 건 그른 거다. 원칙대로 한다. 그런데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그런 사안이었다”라고 말했다. 정유라씨는 “거침없는 최순실씨에게 유독 약한 고리이자 가장 소중한 존재(최순실씨 지인)”였다.

장관조차 쉽게 만날 수 없다는 최고 권력자와 가까운 비선 실세를 건드리자, 공직 사회가 가장 예민하게 여기는 ‘인사 보복’을 했다. 현재 대한체육회 협력단체인 스포츠안전재단 사무총장으로 근무 중인 노 전 국장은 언론과의 만남을 피했다. 〈시사IN〉 취재진이 사무실을 여러 차례 찾아가고 전화를 걸었지만 그를 접촉하기 쉽지 않았다.

문체부의 수난은 두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김희범 1차관이 취임 6개월 만에 돌연 경질되고, 1급 공무원 6명 중 3명이 교체되는 등 계속해서 고초를 겪었다. 문체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문체부에 정유라 사건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다. 정부 핵심에서는 문체부를 기본적으로 ‘반동 조직’으로 여기고 있고 그런 의식이 인사에서 드러나고 있다”라고 말했다.

10월25일 TV조선이 보도한 CCTV 영상을 보면, 최순실씨는 박 대통령 의상을 준비하며 청와대 참모진을 부렸다. 윤전추 행정관과 이영선 행정관이 최씨를 보좌하며 그녀의 일을 거들었다. 청와대 내 최씨의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이다. 대통령의 패션부터 연설과 인사까지 다양한 국정 분야에 관여하는 모습을 보인 최씨는 이번 일이 불거지기 전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최태민 목사의 다섯 번째 딸 정도로 알려졌다(〈시사IN〉 제472호 ‘‘권력 서열 1위 최순실은 누구?” 기사 참조).

대신 그녀의 전남편 정윤회씨가 더 주목받았다. 2002년 당시 박근혜 의원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자 정씨는 비서실장 직함을 달며 공개 활동에 나섰다. 최씨에 대해서는 ‘삼성동 아줌마’ ‘박근혜 말벗’ 정도로만 전해졌다. 그녀의 역할이 ‘정치인 박근혜’의 사생활 영역에만 머문다고 보았다.
 

ⓒ시사IN 이명익10월26일 검찰 수사관들이 미르재단 사무실에서 압수품을 들고 나오고 있다.

그게 아니었다. 최순실 게이트를 보면 정치인 박근혜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았다. 국가를 아버지로부터 받은 가산으로 보았다(22~24쪽 기사 참조). 박 대통령이 공사를 구분하지 않으면서 최씨도 공적 영역까지 넘나들었다.

민간인 최순실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공적 영역에 광범위하게 관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공직 사회 동요가 더 컸다. 통일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가까운 주변 사람이 별로 없는 외로운 대통령에게 친구가 옷과 브로치를 사는 걸 도와줬다는 것까진 그렇다 쳐도, 개성공단 폐쇄까지 최씨가 관여했다는 보도를 보고는 아연실색했다. 사실 이 정부 들어 실무자도 전날까지 모르던 결정이 몇 있었는데, 개성공단도 그중 하나였다. 이제 와서 보니 정말 최순실씨가 관여했을 수도 있겠다는 정황 때문에 자괴감이 든다.” 국무조정실·국무총리비서실의 한 관계자 또한 “요즘 공무원들끼리 만나면 지금까지 우리가 누굴 위해 일한 거냐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다. 정말 허탈하다”라고 말했다. ‘혼이 비정상’ ‘우주의 기운’과 같은 박 대통령의 공식 석상 발언도 다시 주목받았다.

비선 실세가 이권에 개입하면서 게이트의 싹이 자랐다. 최씨는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에 관여하고, 그와 가까운 사람으로 채웠다(최씨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 모든 의혹을 부인했다).

최순실 게이트는 현재진행형

최씨가 이권과 관련한 활동 반경을 넓혀가면서 자연스럽게 내분이 일었다. 최씨와 가까운 사이라고 알려진 고영태씨와 틀어졌다. 최씨와 함께 문체부 각종 사업에 관여한 의혹을 받는 차은택 감독은 자신과 가까운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과 갈라졌다. 갈등은 폭로를 낳았다. 이들의 입과 증거가 언론에 알려지면서 최순실씨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특히 이성한씨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사실 최씨가 대통령한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시키는 구조다. 대통령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씨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항상 30㎝가량 두께의 ‘대통령 보고자료’가 놓여 있었다. 주로 청와대 수석들이 대통령한테 보고한 것들로, 거의 매일 밤 정호성 부속비서관이 사무실로 들고 왔다”라고도 폭로했다. 이에 대해 최순실씨는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저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협박도 하고 5억(원)을 달라고 했다”라고 주장했다. 이성한씨는 〈시사IN〉과의 전화통화에서 최씨의 주장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라고 반박했다.

최순실 게이트는 현재진행형이다. 10월28일 최씨는 정윤회 문건 파동 당시 정씨를 변호한 이경재 변호사를 선임했다. 최씨는 이 변호사를 통해 검찰 수사에 협조할 뜻을 내비쳤다. 한때 최씨와 동업자 관계였던 이들은 검찰 소환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언론 보도로 시작된 최순실 게이트는 검찰 수사를 거쳐 특검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기자명 김은지·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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