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하던 최순실씨의 국정 농단과 엽기적 비리에 기가 막힌다. 이 글이 인쇄돼 배포될 쯤에는 또 무슨 뉴스가 터져 나올지 무섭다. 연일 황당한 사건이 터지니 뒷전으로 밀리고 파묻히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것이 힘없는 이들의 문제일 때는 심각함이 더하다.  

희망원 사건이 그중 하나다. 혹 기억하는가. 어느 일간지와 방송의 심층 보도가 올 8월과 10월, 두 차례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진상은 이렇다. 희망원은 대구에 있는 사회복지시설이다. 노숙인과 정신장애인 1204명이 ‘수용’돼 있다. 이곳에서 지난 2년8개월간 무려 129명이 죽어나갔다. 수용인 열 명 중 한 명이 죽은 셈이다. 일주일에 한 명꼴로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악명 높던 형제복지원에서 12년간 512명이 숨진 것과 비교해도 훨씬 심각하다. 희망원 측은 단순 사고나 원인불명이라 하지만 응급조치 미흡과 사인 조작 등 관련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살아 있다고 해서 인권유린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폭행과 욕설은 일상이 되었고, 시간당 단돈 1000원에 하루 9시간30분씩 노역을 하거나, 시설 간부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노예처럼 일했다. 직원에 의한 금품 갈취 및 급식비 횡령 의혹에다 일상 속의 크고 작은 인권유린의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그런데 정작 더 놀라운 것은 사람이 그렇게 떼로 죽어가도 세상이 참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일부 장애인 인권운동 단체가 진상 규명과 대책 마련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나 이 또한 곧 파묻히고 만다.

그동안 슬프게도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또 다른 희망원 사태가 있었다. 1990년대 말 평택의 에바다 복지원, 소설과 영화 〈도가니〉의 실체였던 광주 인화원을 비롯해 최근에는 서울판 도가니라 불리는 인강원과 송전원 등 줄줄이 사탕이다. 드러난 문제는 판박이처럼 유사하고 한결같이 참혹하다. 피수용인에 대한 폭행과 성폭력, 강제 노동, 금전 착취 등 인권침해가 횡행하고 보조금 유용이나 횡령 같은 비리가 다반사다. 이런 것들은 모두 범죄다. 사건의 귀결은 많은 경우 흐지부지된다. ‘잘 되면’ 비리 책임자와 인권침해자 처벌로 마무리된다. 어떤 경우 시설이 폐쇄되기도 한다. 자, 그러면 문제는 해결된 것일까? 

 

ⓒ연합뉴스대구시립희망원 인권유린 및 비리 척결 대책위원회가 7일 대구시청 앞에서 '희망원 불법감금 및 추가납품비리 의혹 규명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16.11.7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할 때 이른바 ‘부랑인’ 시설과 장애인 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멍한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의 초점 없는 시선과 무기력함은 대규모 시설 수용과 폭력적 통제, 약물 투여 등과 상관이 있다. 웬만한 사람도 비인격적 대접과 획일적 일상생활이 강요되는 집단 수용시설에 들어가면 무기력해지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장애인 인권운동에는 ‘침묵의 4자 카르텔’이란 말이 있다. 사회복지시설, 수용인의 가족과 친지, 지방자치단체를 포함한 정부, 그리고 시민이 침묵한 결과로 시설이 유지되고 온존된다는 것이다.

탈시설 정책으로 과감히 장애인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많은 경우 설립자 일가족이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은 사유화되고 폐쇄적으로 운영되기 쉽다. 투명하지 않으면 인권침해와 비리가 생기며, 이윤이 생기면 시설을 유지하고 확장하려 한다. 엄청난 세금이 민간 복지시설에 보조금으로 투입되지만 정부의 관리 감독은 허술하다. 일례로 희망원은 최우수 시설로 평가받아 대통령 표창도 받았다. 사회복지시설과 관련 공무원의 담합·유착도 있다. 복지 관련 또는 권력기관의 퇴임 공무원이 복지법인의 임원 또는 시설장으로 가는 예는 종종 있다.

시민은 거리에서 장애인이나 노숙인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 안전하다고 여긴다. 또한 이들을 시설에 두면 따뜻한 보살핌을 받는다고 착각하며 수용시설의 정당화를 거든다. 전적으로 돌봄의 부담을 지기 어려운 가족은 참혹한 실상을 알아도 눈물을 삼키며 집단 수용시설의 온존에 입을 다물고 만다.

장애는 장애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스스로 자립해서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시설의 인권침해와 비리, 수용인들의 멍한 눈동자와 무기력함을 해결하는 해답은 탈시설에 있다. 1960년대부터 탈시설·자립생활 정책을 이행해온 서구 복지국가들이 이를 입증한다.

정부는 인권단체들이 오래전부터 요구해온 탈시설 정책으로 과감히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인프라 마련 등 체계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이행해야 한다. 의사로서 정신장애인들의 탈시설과 자립생활 운동에 앞장섰던 이탈리아의 바자리아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같이 말했다. “자유가 곧 치료다!”라고.

 

기자명 문경란 (서울연구원 초빙연구위원·전 서울시 인권위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