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자꾸만 흘렀다. 성공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저 일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일터로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바랐다. 친정과 시댁의 도움을 구할 수도 있었겠지만,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라는 ‘또 다른 여성’을 착취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이제는 이 집 말고는 내가 있을 곳이 없구나.
두 시간 간격으로 젖을 찾는 갓난아기와 24시간 씨름하면서 조남주씨(39)는 ‘무언가 하고 싶다’는 욕망을 놓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할 게 없으면 키보드라도 두드리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보면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내가 왜 잠도 안 자고 이러고 있지… 싶을 때가 많았죠. 근데 나도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나 스스로에게라도 계속 증명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소설을 써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었지만 ‘읽은’ 경험만은 충분했다.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계속 썼다. 이게 소설일까, 혹은 소설 같은 걸까, 의심하면서.
좋은 직업이었지만, 외로운 직업이기도 했다. 신인 작가에게 지면을 약속해주는 곳은 없었다. 종종 생각했다. ‘이번 생은 망한 것 같다.’ 망하긴 망했는데, 그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때 실패 이후에도 삶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한때 체조 선수를 꿈꿨던 서른여섯 살 백수 ‘고마니’의 이야기는 그 마음 안에 고여 있었다. 〈고마네치를 위하여〉는 은행나무출판사와 논산시가 주최하는 황산벌청년문학상의 제2회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4년 만에 두 번째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번에 출간된 세 번째 책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은 조씨가 가장 짧은 기간에 완성한 소설이다. 지난해 9월부터 쓰기 시작해 3개월 만에 탈고했다. 공모전에 내겠다는 목표도 없었고, 누구에게도 청탁받지 않은 소설이 어쩐지 술술 써졌다. 탈고 후 출판사에 바로 투고하는 방법을 택했다. “내 것 말고도 얼마나 많은 소설이 저 메일함에 있을까. 읽어보긴 할까, 반신반의했죠.” 예상을 깨고 한 달 만에 연락이 왔다. ‘문학성·다양성·참신성을 기치로 한국 문학의 미래를 이끌어갈 신예들이 펼쳐가는 경장편 시리즈.’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 13번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눈 밝은 편집자는 이 책에 문학평론가가 아닌 여성학자의 작품 해설을 붙이자고 했다.
〈82년생 김지영〉에는 가정주부로서 작가가 담아두었던 속 깊은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다. ‘여아 살해(낙태)’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던 1982년, 운 좋게 태어난 김지영씨가 결국은 ‘맘충’이 된다는 이야기. 김씨는 결국 이상 증세를 보인다. 시댁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친정엄마로 빙의해 속으로만 삼켰던 말들을 쏟아내는 식이다. “‘데스 노트’ 쓰는 기분이었어요(웃음). 평소 제 속에 있었던 말이 다 나왔다고 해야 할까요. 얼마 전 다른 엄마들하고 그런 얘기를 했는데, ‘왜 광년이는 있는데 광놈이는 없을까’라는. 남자는 미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세상인데, 여자는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 아닐까.”
평범하고 흔해서 ‘우리’를 대표할 수 있는 이름
소설은 김지영씨의 삶을 연대기로 보여준다. 1982년 4월1일, 키 50㎝, 몸무게 2.9㎏으로 서울에서 태어난 둘째아이. 갓 지은 따뜻한 밥을 아버지-남동생-할머니 순서로 퍼 담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지영씨는 남동생이 부럽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다. 원래 그랬으니까. 반장 선거를 하면, 동아리 회장을 뽑으면 꼭 남학생이 뽑히는 일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위협을 당하고도 혼나는 사람은 ‘몸가짐을 단정치 못하게 한’ 김지영씨였다. 소설은 여성들이 숨 쉬듯 경험하는 먼지 같은 차별에 대한 김지영씨의 고백을 각종 통계로 뒷받침하며 ‘팩트’를 완성한다. 지금 이 땅에 사는 30대 여성의 삶에 대한 훌륭한 보고서이자 르포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다.
주인공 캐릭터를 정하기 위해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가장 많이 등록된 여아의 이름을 찾아봤다. ‘지영’이라는 이름, 거기에 가장 흔한 성 중 하나인 ‘김씨’를 붙였다. 김지영씨. 평범하고 흔해서 ‘우리’를 대표할 수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평범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되었다. 작품 해설을 쓴 김고연주씨의 말마따나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이 소설의 특수성”이다. 하나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인데, 그래서 주변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러다 보니 눈물 나는 이야기. 모두 다 다른 개인이지만 ‘여성’이라는 정체성 안에서만큼은 한국인의 절반이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김지영씨가 대학생이 되고 회사원이 되고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되는 동안 세상은 많이도 바뀌었다. 그런데 왜 지영씨의 삶이 나아지는 속도는 그보다 훨씬 더딘 걸까. 조씨는 그 대답을 마지막 장에 숨겨뒀다. “여성혐오 이슈에 대해 말하다가 이야기가 통하지 않으면 저도 종종 ‘당신 딸이라고 생각해봐’라는 말이 튀어나오곤 하는데, 그 말의 한계에 대해 꼭 쓰고 싶었어요. 마지막 장은 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2015년은 작가에게 ‘여성혐오’라는 네 글자를 가르쳐준 해였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많은 일들이, 당하고도 당한 줄 모르고 그냥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다 성차별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대중매체를 통해 여성 문제와 관련해서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저도 각성이 됐던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여성은 이렇게 취급받아 마땅한 사람들인가 하는 질문이 생겼고요.” 모르니까 생각할 수 없었고, 생각하지 못하니까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었던 수없이 많은 경험들이 그제야 선명하게 떠올랐다. 관련 기사와 자료를 스크랩하는 동안 ‘맘충’이라는 말을 처음 접했던 날의 상처 역시 새삼 또렷해졌다.
이 땅에서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건 사회가 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이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조씨가 자신의 딸 도윤에게 바치는 소설이기도 하다. 딸이 살아갈 세상은 자신이 살아온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되어야 하고, 될 거라 믿고,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 같은 것들. 그래서 세상의 많은 딸들이 더 크고 많은 꿈을 꿀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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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영 기자
이름은 시대의 가치를 반영한다. 1990년대 교실엔 ‘지영’이라는 이름이 많았다. 한 반에 둘이라 ‘큰 지영’ ‘작은 지영’으로 불렸고, 성까지 같을 땐 ‘김지영 A’ ‘김지영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