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10월26일, 대구시 중구 서문로에 있는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에서 문옥주 20주기 추모제와 추모 전시회를 연다. 그리고 11월12일 문옥주의 일대기를 쓴 모리카와 마치코 씨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한다.

문옥주는 192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문옥주의 집은 가난했다.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의 장례 당일 쌀독에 쌀이 한 줌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난은 문옥주를 일찍 철들게 했다. 1936년 열두 살 나이에 돈을 벌러 일본 규슈 오무타에 있는 요릿집 부산관으로 건너갔다. 학교도 시집도 보내준다는 조건이었는데 막상 오무타에 가보니 아기보기, 청소, 빨래를 하느라 온종일 정신이 없었다. 어린 몸이 버텨낼 수 있는 수준의 노동이 아닌 데다 매춘업을 하는 곳이었다. 6개월 후 도망쳐 나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문옥주는 이일 저일 전전하며 권번(일제강점기에 기생들의 조합을 이르던 말)에 이야기해서 가끔은 기생의 신분으로 술자리에 나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권번 교실 밖에서 귀동냥으로 배운 판소리 대사나 가사를 잊지 않고 있었다. 오무타에 가기 전 기생이 되어 돈을 벌겠다고 했을 때는 ‘양반집 딸이 창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심하게 반대하던 여덟 살 위의 오빠도 그때는 이미 전적으로 문옥주에게 기대고 있는 처지였다. 문옥주는 자기가 식구들을 먹여 살린다는 보람이 컸다고 말했다.

ⓒ모리카와 마치코 제공모리카와 마치코 씨(오른쪽)는 고 문옥주씨를 만나기 위해 대구를 18차례 방문했다.
열여섯 살 되던 1940년 가을, 친구 집에서 돌아오는 문옥주를 일본인 헌병, 조선인 헌병과 형사가 불러 세웠다. 문옥주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기차를 탔고 중국 동북부 만주의 동안성에 있는 위안소에 도착했다. 대구에서 끌려온 다른 여자들과 함께 매일 울면서 하루에 20명에서 30명 정도의 일본인 헌병이나 사병들을 상대해야 했다. 대구 출신인 위안소 주인은 군표를 받아뒀다가 조선으로 돌아가면 기록해둔 양만큼 돈을 지불할 것이라고 했지만, 가끔 필요한 것을 사러 나가기 위해 현지에서 받은 돈 외에는 결국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고된 생활이었지만 문옥주는 살아남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 군인들을 위해 일본 노래를 외워 비위를 맞추고 ‘위안부’들에게 친절히 대해주거나 편의를 봐주는 군인에게는 유행가를 많이 불러주는 특별 서비스를 했다. 그렇게 군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심신이 더 황폐해지기 전에 그리운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문옥주는 평소에 자신을 특별히 예뻐하던 헌병에게 어머니 간병이 끝나면 다시 돌아올 테니 고향에 갈 기차표를 사는 데 필요한 증명서를 써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1941년 가을, 우여곡절 끝에 문옥주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문옥주의 집은 여전히 가난했다. 슬리퍼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문옥주에게 남쪽 나라에 있는 일본군 식당에 일하러 가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좀 더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고 있던 문옥주는 1942년 7월 망설이지 않고 일본군의 배를 탔다. 그러나 2개월의 긴 여정 끝에 도착한 곳은 식당이 아니라 미얀마(당시 버마) 만달레이의 일본군 위안소였다. 문옥주의 나이 열여덟, 두 번째 위안소였다.

만주와 달리 두 번째인 미얀마 위안소 생활에 대해서 문옥주는 상세한 증언을 남겼다. ‘다테(楯) 8400사단’ 소속으로 이동 경로, 날짜, 지명, 당시 오고 간 대화, 위안소 이용요금, 위안소 주변 환경, 거기서 불렀던 노래까지, 문옥주의 기억력은 뛰어났다. 문옥주는 동안성에서 체득한 요령대로 미얀마에서도 군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썼다. 그들의 가족이나 고향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었고, 함께 일본 노래를 불러 병사의 기분이 좋아지도록 해주었다. 이런 행동은 조선인이라고 멸시하거나 격전을 앞두고 신경이 곤두서 폭력을 휘두르는 군인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책이었고, 장교들로부터 팁을 받는 길이기도 했다. 문옥주는 도망 갈 곳도 없는 먼 타국에서 장교들의 환영회나 송별회 파티에도 오라고 하면 나가서 그저 열심히 ‘돈을 벌었다’. 그렇게 받은 팁은 고향의 가족들을 위해 꼬박꼬박 모아 군인들처럼 야전우체국에 저금을 했다.

ⓒ왐 제공도쿄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에서 〈지옥의 전장 버마(미얀마)의 일본군 위안소-문옥주의 발자취를 따라〉가 전시 중이다.
‘다테 8400사단’ 소속 만달레이 위안소의 문옥주는 전쟁이 격화되자 약속한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군의 명령에 따라 다테 사단과 거의 같은 동선으로 이동했다. 1943년 봄 만달레이에서 아캬브-프롬-앙곤으로 적의 공습과 교전을 피해 전선을 이동하는 동안에도 군인들은 ‘위안’을 요구했고, 사령부가 허가를 내리면 명령에 따라야 했다. 군인들은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무사히 재회한 것을 기뻐하다가도 바로 돌아서 ‘위안’을 요구했고, 천둥 같은 공습이 좀 잦아지기만 해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봄 미얀마에서 패배하자 태국(타이)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런 문옥주의 삶을 글과 영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인 모리카와 마치코 덕분이다. 모리카와 마치코가 1992년 3월28일 후쿠오카 현 시모노세키에서 열린 증언 집회에 문옥주를 초대하며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모리카와에게 다른 피해자보다 문옥주가 더 특별했던 이유는 군사우편 저금 때문이었다. 문옥주에게 그 저금은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악착같이 ‘위안’을 한 대가였다. 문옥주는 “그 저금이 가진 역사를 생각하면 그 돈을 일본에 두는 게 괴롭다”라고 호소했다.

한·일 협정 때문에 군사우편 저금 못 받아

군사우편 저금이란 일본군이 외국에서 군사 활동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군인·군무원을 위해 만든 야전우편국 또는 해군 군용우편소에 맡긴 예금이다. 스물세 살이 되던 1970년부터 16년간 시모노세키 우체국에서 일한 모리카와는 퇴역 일본인 군인의 군사우편 저금을 되돌려준 적이 있었던 터라 문옥주의 저금을 되찾는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그해 5월 구마모토 저금사무센터(당시)로부터 놀랍게도 원장부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원장부에는 문옥주가 1943년 3월 통장을 개설해 1945년 9월까지 12차례 입금한 기록, 잔고 2만6145엔과 이자, 그리고 문옥주의 증언대로 아캬브에서 공습을 피해 도망가다 통장을 분실해 재발급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65년에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의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되었다며 지급을 거부했다. 문옥주와 ‘문옥주씨의 군사우편저금 지불을 요구하는 모임’이 펼친 우편저금 되찾기 운동은 열매를 맺지 못했지만, 한국과 같은 협정을 맺지 않은 타이완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 피해자들은 이 운동을 계기로 군사우편 저금 등을 돌려받았다.

문옥주를 끌고 다닌 다테 사단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일본 방위성이 펴낸 미얀마 관련 책자를 뒤지던 모리카와는 다테 사단의 미얀마 전선 기술은 존재하지만 ‘위안부’에 대한 기술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모리카와는 문옥주의 이야기, 일본군 ‘위안부’의 이야기를 자기가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1993년 9월 대구를 방문해 문옥주에게 일대기를 쓰고 싶다며 허락을 구했다. 문옥주는 바로 “모리카와 씨가 좋을 대로 써”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모리카와는 2박3일, 길면 3박4일씩 3년여간 18차례 대구를 찾아가서 증언을 채록했다. “또 왔어? 할 이야기 더 없어”라며 딴청을 피우던 문옥주는 모리카와가 후쿠오카로 돌아갈 채비를 하면 그제야 옛 기억을 풀어놓아 애를 태웠다. 어느 정도 인터뷰를 끝낸 1995년 2월 모리카와는 미얀마를 방문해 문옥주의 기억을 자신의 발로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다음 해 일본에서 〈문옥주, 버마 전선 다테 사단의 ‘위안부’였던 나〉(한국에서는 2005년 〈버마 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로 번역 출판)를 발간했다. 1997년 5월에서 1998년 9월까지 14개월 동안 미얀마에 다시 체류하며 계속 문옥주의 자취를 쫓았다.

ⓒ연합뉴스고 문옥주씨를 비롯해 일본군 ‘위안부’들은 ‘위안’의 대가로 군표를 받거나 군사우편 저금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돌려받지 못했다.
미얀마에는 위안소가 27개나 있었다. 그곳에는 조선인·중국인·일본인 외에 현지 미얀마 여성도 있었다. 여성 인권 의식이 아직 낮은 미얀마에서는 아무도 피해를 증언하지 못하고 있다. 모리카와가 미얀마 현지 조사에서 만난 중국인 ‘위안부’ 2명만이 현지 피해자로 증언했을 뿐이다. 문옥주의 생애를 역사 자료와 함께 기록하는 일은 아무런 말도 남기지 못하고 숨진 피해자나 여전히 피해 사실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이들이 입은 상처와, 미얀마에서 여성들이 겪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역사를 세상에 전하는 일이기도 하다.

2012년 문옥주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1차 사료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가 한국에서 발견되었다. 일기의 필자(1905~1979)는 경상남도 김해 출신으로 1942년 7월 부산항을 출발한 일본군 ‘제4차 위안단’에 합류해 미얀마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초바)으로 일하는 동안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썼다. 문옥주가 군 식당에서 일할 수 있다고 속아서 따라간 것이 바로 이 ‘제4차 위안단’이었다. 이 일기는 문옥주의 증언대로 일본군 대리인이 선정한 민간업자가 위안부를 모집했고, 위안부는 군속(군무원)에 준하는 신분으로 군용 교통수단을 이용했으며, 위안소는 일본군 부대의 하부 조직으로 관리되고 명령에 따라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문옥주의 상세한 증언과 그 기록 중 일부를 가지고 일본과 한국에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실상을 왜곡하고 문옥주 개인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다. ‘위안부’들은 보석이나 가죽가방을 살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고, 위안소에서 연애도 하면서 자유롭고 즐겁게 지냈다는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모리카와는 ‘그 시절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라던 문옥주의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고향의 어머니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위안부’ 일을 했다”라고 증언을 남긴 문옥주였지만, 역시나 ‘위안부’ 일은 ‘인간이 아니었다’라는 철저한 자기부정이 아니면 견뎌내지 못하는 수치였던 것이다.

모리카와는 피해자의 증언을 검증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증언은 증언으로서 역사적 자료라는 의미일 것이다. 모리카와가 10여 년에 걸쳐 미얀마 현지를 방문해 인터뷰를 하고 일본 다테 사단 전역 군인의 모임을 찾아다닌 것은 문옥주가 남긴 증언, 그녀의 체험을 더 사실적으로 느끼고 그려서 문옥주의 일대기를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문옥주의 증언과 모리카와가 발굴하고 수집한 사진·자료를 토대로 도쿄 시내에 있는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peace.org)에서 내년 6월까지 〈지옥의 전장 버마의 일본군 위안소-문옥주의 발자취를 따라〉라는 특별 전시를 한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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