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4일, 구글은 ‘메이드 바이 구글(Made by Google)’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행사를 열었다. 구글의 하드웨어 총책임자 릭 오스텔로가 단상에 나왔다. 오스텔로는 “구글이 왜 하드웨어를 만들어야 하느냐”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들었다면서, “하드웨어를 만드는 것은 음… 어렵기(Hard) 때문이라고 하죠”라고 말했다. 오스텔로의 썰렁한 농담에 청중은 웃지 않았다.

구글은 행사장에서 5종의 새로운 하드웨어를 소개했다. 가상현실(VR) 헤드셋, 크롬캐스트, 구글 홈, 무선 라우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장 관심을 모은 것은 역시 스마트폰 ‘픽셀’ 시리즈였다.

구글은 예전에도 스마트폰을 만들었다. ‘넥서스’ 시리즈다. 하지만 넥서스는 완전한 ‘메이드 바이 구글’은 아니었다. 구글은 넥서스를 참고용(레퍼런스) 스마트폰이라고 불렀다. 구글의 소프트웨어를 탑재한 하드웨어를 HTC·삼성전자·LG전자·모토롤라·화웨이가 번갈아 만들었다. 하드웨어를 만들 때도 구글이 개입하긴 했지만 구글은 “넥서스 스마트폰이 90% 완성된 뒤에 참여해왔다”라고 말해왔다. 기기에는 각 제조사의 로고가 붙었다. 주로 개발자들을 위한 저가형 스마트폰으로 판매량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REUTERS10월4일 ‘메이드 바이 구글’ 행사에서 구글이 제작한 스마트폰 ‘픽셀’이 공개되었다.

‘픽셀’은 다르다. 구글은 ‘픽셀’을 완전히 처음부터 설계했다고 밝혔다. 구글을 뜻하는 커다란 ‘G’ 마크가 새겨져 있고 다른 제조사의 로고는 없다. 가격은 아이폰과 동일하게 책정되었다. 미국 유명 IT 전문기자인 월트 모스버그에 따르면, “애플은 드디어 ‘어울리는 라이벌(fitting rival)’을 만났다”.

픽셀은 인공지능 기능을 전면에 내세웠다. 픽셀에 처음으로 탑재된 ‘구글 어시스턴트’는 애플 ‘시리’와 유사한 인공지능 비서다. 하지만 이런 첨단 기능보다도, 청중은 픽셀이 애플·삼성전자와 실제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최신 ‘플래그십(주력 제품)’ 스마트폰인지 더 궁금해했다. 일단 평가는 나쁘지 않다. 알루미늄 일체형 디자인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뒷면의 일부 강화유리 재질로 개성을 드러냈다. 디스플레이·프로세서(AP)와 같은 부품들도 최신이어서 높은 성능을 기대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부분 중 하나인 카메라 성능도, 외부 화질 평가기관인 DxO에서 역대 최고점인 89점을 받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구글은 자랑한다.

스마트폰 하드웨어 제조사는 제품을 만드는 것 이외에도 할 일이 많다. 애플·삼성전자 등은 세계 곳곳에 소비자들을 대면하는 매장과 AS센터를 갖추고, 각국 통신사와도 협력을 이어나간다. 이런 것들을 구글도 준비하고 있다. 곧 뉴욕에 팝업 스토어를 열 계획이다. 미국 1위 통신사인 버라이존에서도 픽셀을 판매하기로 했다. AS를 위해 24시간 전화·채팅뿐 아니라 스마트폰 원격 접속을 통해 기술 지원도 제공한단다.

구글의 스마트폰 하드웨어 시장 본격 진출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구글은 원래 힘이 셌다.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를 마음대로 고쳐서 모든 제조사들에게 쓰게 할 수 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설치하기 위해 실행하는 ‘플레이스토어’는 구글 것이다. 구글 계정이 필요하고 모든 앱 수익의 30%는 구글이 가져간다. 또 구글은 ‘유튜브’ ‘지메일’ ‘구글 맵’ ‘구글 포토’와 같이 사실상 세계 범용으로 쓰이는 서비스를 가지고 있다.

구글이 이런 범용 서비스를 자사 스마트폰에만 차별되게 구현한다면? 실제 이번에 구글은 픽셀 구매자들에게 ‘구글 포토’의 원본 사진 저장 용량을 무제한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스마트폰 저장 공간이 부족하면 자동으로 ‘구글 포토’에 업로드한다. 다른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기능이다. 이런 구글의 자사 폰 ‘특화’ 서비스에 전 세계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제 구글이 누룽지까지 다 긁어먹으려고 한다’라는 한탄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구글이 힘이 세다고 해서 이번 구글 폰이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자랑하는 카메라 성능도 아직 평가하기에는 이르다. 픽셀의 제조사인 타이완 HTC가 지난 4월에 내놓은 ‘HTC 10’은 픽셀처럼 DxO 평가에서 당시 최고점을 받았지만, 해외 리뷰 사이트인 〈더버지〉 〈엔가젯〉에서는 카메라 성능을 약점으로 꼽았다. 또 픽셀은 방수 기능이 없어서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구글 플레이스토어에는 앱이 240만 개나 올라와 있어서 후발 주자들이 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하드웨어 제조사가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뉴욕 타임스〉는 구글이 재고 관리, 고객 서비스, 부품 구매 같은 새로운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평가했다. 통신사들도 다른 제조사들보다 견제하기 어려운 구글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당장 높은 판매고를 올릴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타이완 IT 매체 〈디지타임스〉의 애널리스트 루크 린은 픽셀이 연말까지 300만~400만 대 팔릴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전자가 작년에 판매한 스마트폰 3억2000만 대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구글 총책임자 오스텔로도 이번 모델이 엄청 많이 팔릴 거라고는 보지 않았다. 그저 ‘첫 번째 이닝’일 뿐이라고 했다.

구글 자사 폰 ‘특화’ 서비스에 경쟁사 촉각

그렇다면 당장 돈이 되는 것도 아닌 스마트폰을, 구글은 왜 이제 와서 굳이 만들기 시작한 걸까? 오스텔로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앞으로 커다란 혁신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일어날 것이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만들면 새로운 기술을 빨리 적용할 수 있고, 성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최적화’에도 유리하다. 오스텔로는 구글의 하드웨어 진출이 ‘자연스러운 다음 단계’라고도 말했다.

국내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예전부터 이런 상황을 우려해왔다. 그래서 삼성전자는 모바일 운영체제인 ‘타이젠’을 꾸준히 개발하고, LG전자도 2013년 당시 유망해 보이던 ‘웹OS’를 인수하는 등 다른 대안을 꾸준히 꾀해왔다. 하지만 이제 누군가 새로운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만들어 안드로이드를 몰아내는 것은 사실상 비현실적인 목표가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모질라 재단도 하지 못한 일이다. 무엇보다 구글의 플레이스토어에 있는 240만 개 앱을 데려올 방법이 없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사는 것이 아니라 ‘모바일 생태계’를 산다. 제조사가 만든 하드웨어를 사서 통신사를 거쳐 소프트웨어 개발사들의 서비스를 사용한다. 이 회사들은 각각 자신만의 이익을 위하는 한편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발전한다. 하지만 사실 이 생태계에는 주인이 있다. 지구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단 한 종(種)의 동물만이 모든 다른 종을 잡아먹거나 재미로 죽일 수 있고, 원한다면 보호할 수도 있다. 이미 가장 뛰어난 스마트폰 제조사 가운데 하나인 HTC는 자신의 브랜드로 제품을 팔기보다 구글의 협력업체가 되어 살아남을 확률을 높이는 길을 택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 스마트폰 산업이 ‘어떻게 번성할 것인가’ 이전에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때가 왔다.

기자명 김응창 (SK텔레콤 디바이스 테크랩 매니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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