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4월, 남부연합군의 발포로 시작한 미국의 남북전쟁은 4년 뒤인 1865년 4월 북부연방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을 남부와 북부 간의 경제 전쟁으로 풀이하는 수정주의적 해석도 귀 기울일 만하지만, 노예해방이 북부와 남부의 중요한 불화 원인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역사가는 없다. 전쟁이 끝난 직후 북부연방과 공화당 지도자들은 사망자 62만명과 100만명에 달하는 부상자를 낳았던 남부연합에 대한 응징을 놓고 온건파와 과격파로 나뉘었다. 전쟁을 일으킨 11개 주의 핵심 인물들에 대한 처벌과 남부 재건에 대한 설계는, 남군이 항복한 후 불과 닷새 만에 남부연합 지지자가 쏜 총탄에 링컨이 숨을 거두면서 갈피를 잃었다.

노예제도는 어느 모로 보나, 자유와 평등을 모토로 내건 미국의 건국 이상에 걸맞지 않았다. 특히 이 제도는 미국의 바탕을 이루는 기독교와 크게 모순되었다. 하지만 노예해방을 놓고 남북 사이의 갈등이 높아지면서, 노예제 찬성론자는 물론이고 남부의 교회 목사들은 성서로부터 흑인 차별의 근거를 찾았다. 남부 재력가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흑인을 노예로 부려도 된다는 신학적 정립 작업에 나섰던 당시의 남부 침례교단은 훗날 한국의 복음주의 기독교 세력의 모태가 되고, 현재도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우익 보수주의 세력으로 남아 있다.

ⓒ이지영 그림
남북전쟁이 터지자 많은 흑인이 북군에 가담했다. 남부 지역의 군인 가운데는 남부의 지주들에 의해 동원된 흑인 병사도 있었으나, 타네하시 코츠의 〈세상과 나 사이〉(열린책들, 2016)에 나오는 어느 대목은 남군에 소속된 흑인 부대원은 인간이 아니라 군수품에 불과했다고 알려준다. 남부연합의 장군들은 그 치열한 전쟁 중에도 자기 부대에 있는 흑인을 남부의 지주들에게 팔아넘겼다. 군수 비리에 도가 트인 대한민국의 장군들도 혀를 내두를 일이다.

수전 캠벨 바톨레티의 〈하얀 폭력 검은 저항〉(돌베개, 2016)은 남북전쟁 직후 남부에서 생겨나 미국의 대표적인 백인 우월주의 집단으로 성장한 큐 클럭스 클랜(KKK:Ku Klux Klan)에 대한 보고서다. 1866년 5월, 남군 패잔병으로 이루어진 테네시의 퇴역 남군 장교 여섯 명이 그리스어로 ‘모임’을 뜻하는 큐클로스(Kuklos)에 스코틀랜드 고어(古語)에서 파생한 ‘모임’이라는 뜻의 클랜(Klan)을 합쳐 큐 클럭스 클랜이라는 친목단체를 만들었다. ‘모임 모임’이라는 단순하고 우스꽝스러운 이 이름에는 최초의 회원들이 자평한 것처럼 뼈다귀들이 맞부딪쳐 덜거덕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은 주술적인 힘이 있었고, 실제로 그들이 행했던 일도 그와 같았다.

큐 클럭스 클랜의 창립자들은 자유민이 된 흑인들의 거들먹거림과 범죄로부터 백인을 지키기 위한 자기방어적인 필요에서 이 단체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KKK의 뿌리는 노예제로 지탱한 남부에 오랫동안 존재했던 노예 순찰꾼이다. 1700년대 초, 영국 산업혁명의 여파로 미국 남부의 면화 사업이 번창하면서 흑인 노예가 백인보다 많아지기 시작하자, 흑인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백인들은 노예법을 강화하고 이들을 감시할 조직을 만들었다. 백인이 폭력과 공포로 흑인을 다스리는 것은 전통적으로 용인된 남부 문화였다.

〈하얀 폭력 검은 저항〉
수전 캠벨 바톨레티 지음
김충선 옮김
돌베개 펴냄
창립자 여섯 명은 결코 무식한이나 빈곤층이 아니었다. 이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법률가 지망생과 언론인이었다. 이 단체가 순식간에 55만명이라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한 데는 남부 백인 지도층이 퍼트린 ‘흑인의 지배’라는 얼토당토않은 선전이 한몫을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KKK에 가담한 백인 노동자와 소작농은 자신들의 일터를 흑인에게 빼앗기고 흑인보다 더 낮은 계층으로 추락할까 봐 흑인 탄압에 앞장섰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 백인 정권은 흑인의 지위나 생존에 대해 아무런 효과적인 정책을 세우지 못했다. 흑인 자유민은 자신이 개간한 농장을 백인에게 빼앗겼고, 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노예해방이 이처럼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은, 북부와 남부 백인들 사이에 대타협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후 10년이 넘도록 지속된 남부의 연방화(‘남부 재건’)와 흑인들의 권익 보호라는 과업에 피로감을 느낀 북부의 백인들은 어서 전쟁 이전의 정상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1877년 북부군 대위로 참전하여 소장으로 은퇴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러더퍼드 B. 헤이스는 당선과 함께 남부 문제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동안 남부에 실시 중이던 북부의 군정(軍政)을 완전히 종식시켰다. 그 결과 처벌받지 않은 남부의 핵심 인사들이 남부 통제권을 되찾았고, 남부 각 주에서 ‘짐 크로 법(Jim Crow laws)’이라고 알려지게 되는 흑인 단속법(Black Code)이 제정되었다.

1920년대에 KKK 단원 수는 500만명으로 치솟았으며, 신에게 선택된 인종이라는 자긍심을 누리고, 두려움을 심어줄 욕심에서 흑인을 나무에 목매다는 것은 남부의 오락이 되었다. 그 가운데 1930년, 인디애나 주에서 집단폭행을 당하고 처형된 토머스 십과 아브람 스미스는 현장에 있던 로렌스 베이틀러의 사진기에 찍혔고, 그 사진을 본 루이스 앨런이 “남부에는 이상한 과일이 열리는 나무가 있네”로 시작하는 ‘이상한 과일(Strange Fruit)’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남부에는 이상한 과일이 열리는 나무가 있네”

짐 크로 법은 1965년 백인이 아닌 흑인 민권운동에 의해 철폐되었다.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에서 벌어진 버스 탑승 거부 운동이 신호탄이었다. 그 운동의 주역이었던 로자 파크스가 짐 해스킨스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자서전 〈로자 파크스-나의 이야기〉(문예춘추사, 2012)는 흑인들의 버스 탑승 거부 운동이 벌어지자 KKK 몽고메리 지부의 회원이 급증했다고 적었다. 오늘날 우리는 수니파와 시아파가 서로의 모스크(이슬람 사원)를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혀를 차지만,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제2의 남북전쟁’이라고 부르는 흑인 민권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집중적으로 폭탄을 투척한 곳도 흑인 교회였다. 지난 9월2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을 인권 문제로 비난하자, 두테르테는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엎드려도 총에 맞는다”라고 맞받아쳤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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