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2001년 9월6일 당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은 공식적으로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주목받지는 못했다. 당시 당내에는 이인제·한화갑·김중권·고건 등 쟁쟁한 후보가 많았다. 한나라당에서는 이회창 총재가 대세론을 펴며 독주했다. 새천년민주당에서는 이인제 최고위원이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이던 때였다. 이때만 해도 이듬해 대선은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 사이의 격돌로 보았다. 하지만 6개월 뒤, 2002년 3월16일 광주 경선에서 ‘노풍’이 불었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대권을 꿈꾸는, 주목받지 못한 잠룡들에게 일종의 ‘매뉴얼’이 되었다.

15년이 지난 9월, 매뉴얼대로라면 스타트를 끊어야 할 시점이다. 매뉴얼대로 잠룡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발은 야권이 빠르다. 후보군도 비교적 풍성하다. 가장 먼저 치고 나간 이는 김부겸 의원이다. 김 의원은 8월3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나는 당권 불출마 선언 이후 사실상 대선 경선 출마를 준비해왔다”라며 출마를 본격화했다. 9월3일에는 충남 보령 무창포에서 김 의원의 지지 조직인 ‘새희망포럼’ 총회에 참석해 “대세론이란 야당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죽이는 것으로, 야당이 무난히 패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개적으로 ‘문재인 대세론’에 이견을 표시했다. 이 자리에는 설훈·조정식 의원을 비롯해 당 대표 선거에서 낙선한 김상곤 전 혁신위원장이 참석했다.

151124남경필-연합.jpg
ⓒ연합뉴스대권 잠룡들. 원희룡 제주지사, 안희정 충남지사, 남경필 경기지사, 박원순 서울시장(왼쪽부터).
안희정 충남도지사도 8월31일 밤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나는) 동교동도 친노도 뛰어넘을 것이다. 친문도 비문도 뛰어넘을 것이다”라며 대권 도전 의사를 밝혔다. 안 지사는 ‘노무현 사람’으로 분류되지만, 문재인 전 대표와는 지지층의 결이 다르다. 안 지사는 재선 도지사를 거치며 충청권 지역 기반이 탄탄하다. 이념적으로 중도층으로부터 비교적 거부감이 덜하다는 평가도 받는다. 확실한 지역 기반에다 확장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는 야권의 유력 후보로 점쳐지기도 한다.

이재명 성남시장 역시 9월6일 페이스북을 통해 “대한민국의 혁명적 변화를 위해 역할을 다하겠다”라며 출마 의사를 밝혔다. 이 시장은 그동안 대통령과 여권을 향한 ‘센 발언’으로 당내 핵심 지지층으로부터 지지를 얻었지만, 그만큼 중도층 포섭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와의 동행이 눈길을 끌며 이 시장에 대한 중앙 정치권의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8월15일 기자들 앞에서 김 전 대표는 이 시장에 대해 “위기관리를 잘 한다”라며 치켜세웠는데, 이를 두고 퇴임을 앞둔 김 전 대표가 당내 다양한 후보군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해석을 낳았다.

160821손학규 안철수-연합.jpg
ⓒ연합뉴스8월21일 박형규 목사 빈소에서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오른쪽)와 손학규 전 의원이 만났다.
대선 후보로 주목받아온 박원순 서울시장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 뉴욕을 방문 중이던 9월5일, 박 시장은 뉴욕 특파원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시대 문제에 대해) 정권 교체가 답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선 출마에 대해서는 “왜 고민이 없겠는가?”라며 답을 미뤘다. 박 시장 측 관계자는 “서울시장 3선 도전을 포함해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고심 중이다”라고 말했다.

내년에 있을 대선의 최대 화두 중 하나는 제3지대 후보다. 안철수 의원은 김수민·박선숙 의원 리베이트 의혹 수사 건으로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대선 행보에 나섰다.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를 정책 네트워크 ‘내일’ 이사장으로 임명했고, 오랫동안 안 대표와 함께한 박인복·박왕규·김태일 부소장이 실무진으로 합류했다. 대여 발언 강도도 세졌다. 안 의원은 국제가전전시회(IFA)를 참관 중이던 9월3일,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혁신센터에 대해 “(정부가) 국가 공인 동물원을 만들어준 셈이다”라고 비판했다. 안 의원의 ‘단독 플레이’보다 3지대 후보들과 판을 흔드는 ‘팀플레이’도 관심사다. 8월28일 안 의원은 강진에서 손학규 전 의원을 만났다. 손 전 의원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부터 모두 러브콜을 받고 있다. 안 의원과의 ‘강진 회동’ 이후 국민의당으로 정계 복귀하는 시나리오가 돌기는 했다. 당분간 손 전 의원 역시 제3지대에 머물며 대선 행보를 가속화할 것이라는 관측이 높다.

야권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과 달리, 새누리당에서는 김무성 전 대표를 제외한 나머지 잠룡들은 정중동이다. 김 전 대표 정도만 민생 투어를 시작하며 대권 행보에 나섰다. 김 전 대표를 비롯해 여권에서 거론되는 대권 주자들은 주로 비박계다. 비박계는 이정현 대표 선출 직후 당내 입지가 좁아졌다. 그렇다고 전혀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여권의 잠룡들은 주로 정책 어젠다를 제기하고 있다. 유승민 의원, 오세훈 전 시장, 남경필 경기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 등 잠룡들은 책을 준비하거나 정책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분주하다. 예를 들면 오 전 시장은 싱크탱크 ‘공생연구소’를 열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지난 5월 경기온라인대중공개강좌 단장으로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영입하기도 했다. 그는 무엇보다 그동안 안보 문제에서 성역처럼 여겨졌던 징병제 문제에 대해 ‘모병제’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이슈 선점 효과를 냈다. 김종인 전 대표도 남 지사가 제시한 ‘모병제’ 모델에 대해 “장기적 관점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여야의 잠룡이 또 하나의 ‘노무현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벽이 적지 않다. 먼저 여야 모두 잠룡이 비상하기 위해서는 ‘구도’를 흔들어야 한다. 새누리당 비박계 잠룡은 대부분 당내 현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한계가 있다. 이들 대부분은 지난 당 대표 선거에서 비박계 후보를 지원했지만, 결국 친박 이정현 대표 체제가 구축되면서 당내 주도권을 잃었다.

‘노무현 스토리’를 위해 ‘문재인 대세론’ 넘어야

야권 잠룡 역시 ‘문재인 대세론’을 넘어서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당 대표 선거 결과를 보고 이대로라면 어차피 경선에 참여하더라도 질 게 뻔하다면서 경선을 포기하면 야권 특유의 역동적인 당내 경선이 어려워진다”라고 말했다.

자치단체장의 임기 문제도 잠룡들에게는 변수다. 현직 자치단체장의 경우 임기 만료 1년 전(2017년 6월30일)에 사퇴하면 보궐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게 된다. 남경필 경기도지사, 원희룡 제주도지사,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등 여야 잠룡들이 모두 해당한다. 지난 2012년 18대 대선 경선에서 경남도지사를 사퇴한 김두관 의원의 전례가 있다. 당시 경남지사였던 김 의원은 지사직을 던지고 당내 경선에 나섰다. 그 이후 치러진 경남도지사 보궐선거에서 홍준표 현 지사가 당선했다. 그 바람에 야권의 기반을 잃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7년 12월20일 제19대 대통령이 뽑힌다. 아직 대선까지 15개월 남았다. 주목받지 못한 잠룡들에게는 짧을 수도 있지만 긴 시간일 수도 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