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이 이 난의 마지막 글이네. 그래서 오늘은 그야말로 독서에 대한 극히 사적인 한담을 늘어놓을까 해. 언젠가 얘기했듯이, 나는 〈시사IN〉에 독서일기를 연재해온 장정일 작가나 몇몇 알려진 서평가들처럼 탐욕적인 독서가가 아니야. 그저 내 또래의 평균적 독서가라고 할 수 있지. 어쩌면 평균은 좀 더 될 수도 있어. 그건 내 지적 갈증 덕분이라기보다는 내가 신문기자로서, 더 나아가 글쟁이로서 살아온 덕분일 거야.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덜 읽는 사람보다 꼭 더 지적이거나 현명한 건 아니야. 그러나 책은 우리가 직접 겪을 수 있는 세상보다 훨씬 더 넓은 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해주지. 그리고 삶에 재미를 주지. 재미! 사실 이것만큼 중요한 독서 목표는 없을 거야. 아무리 평판이 좋아도, 재미없는 책이라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어. 입시생들이 읽는 교과서나 참고서는 빼고 하는 말이야.

어떤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 그건 아마 사실이겠지만, 궁리를 하면 아주 짬을 낼 수 없는 건 아니야. 예컨대 나는 화장실에다가 책 몇 권을 비치해놓고 변기에 앉을 때마다 책을 읽곤 해. 또 지하철에서는 꼭 책을 읽지. 지하철에서의 독서는 승용차를 운전한다거나 게임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호사야. 나는 운 좋게 또는 운 나쁘게, 승용차를 몰지도 않고 게임에도 취미가 없어서 지하철을 독서실로 사용하고 있어. 버스에서 책을 읽는 건 피하는 게 좋아. 버스는 지하철과 달리 흔들림이 심해서 독서가 시력을 해치니까. 또 나는 잠자리에서 책을 읽는 버릇이 있어. 이건 반드시 추천할 일인지는 모르겠어. 책을 읽다가 스르르 잠이 들면 좋은데, 책이 너무 재미있으면 밤을 꼬박 새울 수도 있거든. 나처럼 출근을 안 하는 사람이라면 상관없지만, 아침에 출근해야 할 사람들에겐 잠자리 독서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 물론 어떤 책들은 화장실이나 지하철이나 잠자리에서 찔끔찔끔 읽기엔 좀 무거울 수도 있어. 책상 앞에 앉아 정색을 하고 읽어야 할 책도 있다는 뜻이야. 하긴 진짜 독서가라면 책의 종류에 따라 책 읽는 장소를 달리하지도 않겠지만, 나는 책에 따라 장소를 좀 가리는 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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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 그림
그러면 나는 화장실에서, 지하철에서, 잠자리에서, 책상 앞에서 어떤 책들을 읽었을까? 그리고 어떤 책이 가장 재미있었고, 어떤 책에서 가장 큰 감명을 받았을까? 요새 유행하는 말로 내 인생의 책은 뭘까? 장르에 따라 내게 가장 큰 재미나 감동을 준 책 또는 저자를 나열하는 것으로 이 연재를 마치려고 해. 지금부터 나열하는 책은 반드시 고전도 아니고, 필독서도 아니야. 그냥 나와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는 책들이야. 그러나 한 사람에게 깊은 재미나 감동을 준 책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어느 정도 재미와 감동을 줄 수 있을 거야.

언젠가부터 나는 과학소설을 제외하곤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아. 그렇지만 이즈음에도 읽는 소설이 있는데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가 쓴 소설들이야.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 〈신비한 결속〉에 이르기까지 키냐르의 책들은 내게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줘. 그와는 좀 다른 방향에서 내게 재미와 감동을 준 소설들은 조지 오웰과 최인훈의 작품이야. 그렇지만 넋이 빠지도록 재미있었던 건 이런 본격소설이 아니라, 에릭 시걸과 존 그리셤의 대중소설이었어. 그 소설들은 밥 먹으면서도 읽을 정도로 나를 홀렸어. 본격소설가 세 사람, 대중소설가 두 사람, 이 다섯 사람이 내 인생의 소설가들이야.

독서라고 할 때는 보통 시를 제외하는 것 같은데, 시집을 읽는 것도 독서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은 한국인으로는 서정주, 이용악, 백석 같은 이들이고 외국인으로는 아르튀르 랭보, 베르톨트 브레히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같은 이들이야. 소설과 달리, 아니 소설도 마찬가지겠지만, 시는 되풀이해서 읽을수록 거기서 새로운 맛이 느껴져. 그래서 좋아하는 시집은 여러 차례 거듭 읽게 되지. 사실 지하철을 타고 먼 길을 갈 때 시집만 한 친구도 없어. 지하철에서 읽고, 또 읽고, 또 읽으면서 그 시 텍스트에서 새로운 맛과 의미를 발견해내는 것은 서민에게만 허락된 행복이지.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시는 원어로 읽으면 느낌이 사뭇 다른데, 그렇다고 랭보를 읽기 위해 프랑스어를, 브레히트를 읽기 위해 독일어를, 가르시아 로르카를 읽기 위해 스페인어를 배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 다행인 것은, 위대한 시 작품은, 좋은 번역가를 만난다면, 언어의 장벽을 통쾌하게 무너뜨리고 제 광휘를 뽐내.

희곡을 읽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 사실 본디부터 레제드라마(읽는 희곡)로 쓰인 희곡이 아닌 이상, 무대 위에 오른 연극을 볼 뿐 그 희곡을 찾아 읽게 되지는 않지. 연극배우나 연출가가 아니라면 말이야. 그렇지만 꼭 레제드라마가 아니더라도, 독서의 기쁨을 주는 희곡이 많이 있어. 나에겐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알베르 카뮈의 희곡이 그랬어.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카뮈를 감히 셰익스피어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정의로운 사람들〉이나 〈오해〉 같은 카뮈의 희곡은 젊은 날의 내 영혼을 떨게 했어.

이제 문학 바깥 세계로 나아가 볼까? 자연과학 책 얘기는 한 달 전 이 자리에서 했으니,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에세이들만 얘기할게. 20대 초반에 내 정신을 주조한 책은 카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과 존 롤스의 〈정의론〉이었어. 나는 이 백신 덕분에 내 세대 사람 대부분이 한 번씩 앓았던 마르크스주의 열병을 앓지 않을 수 있었어. 마르크스주의는 한 세기 이상 인류의 거의 3분의 1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상이지만, 이제 경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논파된 사상이야. 물론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많을 줄은 알아. 그러나 이건 내 사적 한담이니, 나는 마르크스주의를 틀린 사상이라고 주장할 거야. 내 소견엔 마르크스주의가 그 화사함과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틀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마르크스를 비롯한 그 선지자들이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옅어서였던 것 같아. 그들은 역사를 거시적으로 관찰하는 데 너무 바빠서 사람의 본성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어. 그렇지만 마르크스와 그 동료들이 틀린 말만 한 건 아니야. 〈공산당 선언〉이나 〈프랑스 내전〉 같은 책에서 마르크스가 한 예언은 모조리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 팸플릿들은 역사적 문서로서 가치가 있어. 그리고 그 팸플릿에 반쪽의 진실이 담긴 것도 사실이야. 그것들은 나를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읽어볼 가치는 있어.

구어체 글쓰기가 성공했을까 실패했을까

서양에서 에세이라는 건 각주가 덕지덕지 붙은 짧은 논문들을 제외한 비문학 작품 일반을 가리켜. 그래서 우리가 철학서라고 부르는 책들도 거의 에세이에 포함되지. 전공자들이라면 언어철학자 또는 분석철학자라고 부르는 앵글로색슨과 오스트리아 저자들의 책이나, 흔히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부르는 프랑스 저자들의 책을 마땅히 읽어야겠지만, 그 ‘에세이들’은 술술 읽히지 않아. 나는 직업적 필요로 그 책들을 읽었는데, 그 유파에 속한 저자들 가운데 내게 재미와 지적 자극을 동시에 준 사람은 미국의 존 설과 프랑스의 미셸 푸코밖에 없었어. 이 사람들의 텍스트마저 아주 쉽지는 않아서 읽기를 권하는 게 조금 망설여지네.

마지막으로, 다시 문학으로 돌아가자면, 우리가 흔히 문학비평이라고 부르는 책도 에세이에 속하지. 문학비평은 그 비평의 대상이 된 작품을 먼저 읽고 나서 읽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어떤 문학비평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아름다운 세계를 구축하지. 내게 영향을 준 한국 문학비평가는 김우창, 김현, 황현산 같은 분이야.

이제 작별의 시간이 됐네. 이 난에서 나는,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구어체의 글쓰기를 시도해봤어. 내 말투, 곧 글투가 불편했던 독자들도 있었을 거야. 이 구어체 글쓰기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판단하는 건 독자들의 몫이지. 지난여름이 유독 뜨거웠으니, 이 가을은 풍성한 결실의 철이 됐으면 좋겠어. 모두들 강건하시길!

※ 이번 호로 ‘독서한담’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해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기자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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