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뤼순 감옥에서 사형 집행 직전 안중근 의사가 동생 정근·공근에게 유언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 일가 중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40명을 넘는다. 서훈을 받은 사람만도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안 의사를 비롯해 안 의사의 동생 정근·공근, 사촌 명근·경근, 조카 춘생·봉생·원생·낙생 등 11명에 이른다.

독립운동가가 많은 집안인 만큼 일제의 탄압은 혹독했다. 1909년 10월29일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뒤 그의 가족은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갔다. 그러나 일제의 추격은 러시아에까지 미쳤다. 1911년 여름 안 의사의 맏아들 우생(분도)은 여섯 살에 일제의 밀정에게 독살당했다.

광복 뒤에도 친일파에게 탄압받아

독립운동의 최고 명가 안중근 가문은 광복 후 빛을 보지 못했다. 부인 김아려 여사는 광복된 고국을 밟지 못하고 중국 상하이에서 숨을 거뒀다. 광복 뒤 귀국한 안 의사 일가는 대부분 김구 선생과 같은 계열에서 활동하다가 탄압받았다. 안 의사의 사촌 동생 경근씨는 4·19혁명 후 ‘민주구국동지회’를 만들어 정치에 나섰다가 5·16 군사정권에 의해 7년간 투옥됐다. 안 의사의 조카 민생씨는 평화통일 운동에 매진하다 역시 5·16 군사정권에 의해 10년 동안 징역살이를 했다. 일제 때 명근씨가 감옥살이를 한 서대문형무소 내의 같은 감방이었다고 한다. 외교안보연구원 본부 대사로 일하던 안 의사의 조카 진생씨는 1980년 전두환 정권 때 강제 해직당한 뒤 충격을 받고 쓰려져 8년간 투병하다 숨졌다.
안 의사의 조카 민생씨는 중국 옌지에 있는 사촌 동생 경옥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 우리는 안중근 집안이라는 이유로 왜놈에게 죽어야 했는데, 광복 뒤에는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의 피해는 여전하다”라고 한탄했다.

이같은 푸대접과 설움 속에 안 의사 유족은 해외로 뿔뿔이 흩어졌다. 안 의사의 차남 준생씨가 1951년 부산에서 죽자 자식들은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들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병 전문의로 일했다. 장녀 선호씨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차녀 연호씨는 시애틀에서 살았다.
한국외대 신운용 박사는 “상하이에서 바이올린을 켜며 생계를 이어가던 준생씨는 일본의 공작으로 장충단공원에 있던 박문사에 이토 히로부미 아들과 참배하기도 했다. 안 의사 가족들은 광복 공간에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안 의사의 딸인 현생씨의 딸 황은주씨는 미국에서 살다가 귀국했고, 은실씨는 미국에 있다. 안 의사의 외손녀 황은주씨는 “광복 후 국내에는 우리 집안이 자리 잡을 곳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안공근 선생의 자손은 고향인 북한으로 갔고, 연생씨 가족은 파나마에 산다. 안 의사의 사촌 형제인 봉근씨 가족은 독일에 산다.
독립운동가들은 광복 뒤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그래서 독립유공자 후손 가운데 외국에 거주하는 이가 많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이자 흥사단을 창립한 민족계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족은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다. 장남 필립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했고, 차남 필선씨는 하워드 휴즈 항공 부사장을 지냈다. 장녀 수산은 미국 해군 역사상 최초로 여성 포격 장교를 역임한 뒤 미국 안전보장국에서 비밀정보 분석가로 활동했다. 차녀 수라와 3남 필영도 미국에 있다. 안창호 선생의 자녀는 대부분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지만 한국과의 왕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차리석 선생의 회갑을 맞아 임시정부 요인이 기념 촬영했다. 앞줄 가운데가 김구 선생, 뒷줄 가운데가 차리석 선생.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던 박희도 목사는 이 일로 2년 동안 복역했다. 하지만 일제 말 잡지 〈동양지광〉 주간으로 있으면서 훼절해 친일의 길로 들어선다. 박 목사 아들은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의료행정직으로 일하다가 ‘변절자 후손’이라는 오명을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갔
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자부심은 사치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 미생씨는 김구 선생의 장남 인씨와 결혼하면서, 절친했던 두 집안은 혼맥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슬하에 세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세 딸은 어릴 때 모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맏아들 인씨도 광복을 앞둔 1945년 3월 28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둘째 아들 김신씨는 공군참모총장·교통부장관을 지냈다. 신씨는 진·양·휘 3남과 1녀 미를 두었다. 진씨는 참여정부에서 주택공사 사장을 지냈지만 협력업체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양씨는 상하이 총영사를 거쳐 보훈처장으로 일한다. 휘씨는 광고대행사 에에블리 대표로 있다. 미씨는 김호연 빙그레 회장의 부인이다.

김구 선생 집안은 사회적으로 대접받은 유일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볼 수 있다. 후손은 비교적 잘 교육받았고 정부의 배려와 기념사업회의 지원이 뒤따랐다.

그러나 일신과 가문의 안녕을 뒤로하고 항일투쟁의 길로 들어선 대다수 독립운동가는 후손이 뿔뿔이 흩어지고 집안은 몰락했다. 가산은 모두 빼앗겼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가슴속에 품은 자부심만으로 가난의 벽을 넘기는 어려웠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은 교육에까지 여력이 미치지 않았고 가난의 대물림은 3, 4대를 이어갔다. 하지만 어디에도 정부의 손길은 없었다. 어렵게 사는 후손에 대한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는 아예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숨을 거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들 수범씨는 일제 때 은행에서 일했다. 하지만 광복 후에는 직업을 잃었다. 신채호 선생이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수범씨는 자유당 정권에서 신변을 위협받았다.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고 한다. 수범씨는 넝마주이·부두 노동자 등 떠돌이로 살아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로 하야한 이후에야 은행에 다시 취업할 수 있었다.
 

ⓒ시사IN 강은나래 인턴기자효창공원에 있는 차리석 선생 묘비를 어루만지는 차영조씨.

신채호 선생은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신고를 거부하고 1912년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신채호 선생의 대한민국 국적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아 아직까지 무국적자 신분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단재 선생 명의의 땅과 집은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씨는 “나라를 되찾은 지 63년이 지났어도 아직까지 아버님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나라와 싸워야 한다.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쳤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이 땅에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치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비서장을 지낸 차리석 선생의 아들 영조씨는 친일파 후손이 떵떵거리는 사이 숨어 지냈다고 한다. 영조씨는 “백범이 암살당하자 임시정부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가족은 숨어야만 했다. 영조씨의 어머니는 아들의 성 ‘차(車)’에서 획을 없애 ‘신(申)’씨로 바꾸어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라고 말했다. 영조씨는 열아홉 살 때까지 신씨로 살았다.

스리랑카 사람이 독립운동가 대 이어

차리석 선생은 1945년 9월9일 환국을 준비하다 과로로 쓰러져 해방된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숨졌다. 광복 뒤 영조씨의 인생은 고달픔과 배고픔으로 점철됐다. 어머니 김씨는 좌판을 벌이고, 생활용품 행상에 나섰다. 하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영조씨는 동냥을 해야만 했다. 영조씨는 “아침마다 한 숟가락씩 문전걸식으로 살았다. 월사금은 한 번도 못 냈고, 도시락도 싸본 적이 없다. 우물물만 실컷 먹고 살았다”라고 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어머니 김씨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영조씨는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영조씨는 ‘아이스케키’ 장사, 여관 심부름, 국밥 배달 등 돈 되는 일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시사IN 백승기장병준 선생의 장손 하정씨(오른쪽)는 스리랑카 양아들 오산다 씨(왼쪽)의 도움으로 말년을 보낸다.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장관을 역임한 장병준 선생의 4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 구한말 신안군 장산도 일대에 염전과 전답을 가지고 있던 천석꾼의 재산은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갔다. 독립운동을 한다고 자식 교육은 뒷전이었다. 장병준 선생의 장남 경식씨는 제대로 배우지 못해 그럴싸한 직업도 가져본 적이 없다. 이 악순환의 고리는 손자 하정씨(65)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하정씨는 경기도 용인시 한 시골 마을에서 정부의 도움 없이 쓸쓸한 말년을 보낸다.

홀로 지내는 하정씨를 돌보는 사람은 한국에 일하러 온 스리랑카인 오산다 씨(30). 오산다 씨는 “스리랑카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인지 한국에 와서 독립운동 자손이 어렵게 사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리랑카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하정씨는 2006년 오산다 씨를 호적에 올리고 정식 양자로 입양했다. 오산다 씨의 여권 국적은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서는 오산다 씨에게 주민등록을 내주지 않아 그는 강제 출국될 위기에 처했다. 하정씨는 “할아버지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양아들 오산다가 주민등록을 받아 대를 이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내 생의 마지막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사는 김덕천씨(68)는 조선의열단 선전부장,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내무차장, 국무위원 등을 지낸 운암 김성숙 선생의 손자다. 김성숙 선생은 자유당 시절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는 정치활동을 펼쳐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유품으로 남긴 일기장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오늘 200원을 꾸어 쌀을 사왔다. … 내가 독립운동을 하고 정치를 한다고 돌아다니면서도 가족을 굶기고 살고 있구나.” (1955년 2월23일)

“가끔 할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한다”

덕천씨의 아버지 정봉씨는 일제 때 징용을 나갔다가 덕천씨가 세 살 되던 해에 돌아왔는데, 한동안 정신이 이상해져서 경제생활을 거의 하지 못했다. 덕천씨는 턱뼈에서 구강암이 발견돼 보훈병원을 찾았으나 독립유공자가 광복 후에 사망했을 경우에는 2대까지만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조항 때문에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지난 5월 아내를 위암으로 잃었지만 형편이 어려워 변변한 치료 한번 받지 못한 채 보내야 했다. 덕천씨는 “할아버지가 이승만을 추종했더라면 잘 먹고 잘살았을 텐데 하는 원망도 든다”라고 말했다.
 

ⓒ시사IN 강은나래 인턴기자김덕천씨가 조부 김성숙 선생과 조모 정씨 부인의 사진을 보이고 있다.

2008년 8월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는 223명, 유족은 6283명이다. 이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무려 60%를 넘고, 고정 수입이 있는 봉급생활자는 10%를 조금 웃돈다. 유족 가운데는 직업이 일정치 않아 수시로 바뀌고, 그나마 봉급생활자 중에도 특히 경비로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 1919년 서울 4대문 사건의 주동자로 옥고를 치렀던 이원근 열사의 손자 이승봉씨는 경비 일을 한다. 조선 총독 암살 계획을 세워 옥고를 치른 방한민 열사의 손자 방병건씨도 최근까지 경비원으로 일했다.
유족 가운데 중병을 앓는 사람이 두 집에 한 집꼴이었고, 중졸 이하 학력이 55%를 넘었다. 가난은 의료와 교육의 공백을 낳고, 다시 가난으로 대물림됐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공식은 철저히 들어맞았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대한민국에서 친일파 후손은 선대의 부와 명예를 고스란히 이어받았고, 독립유공자 자손은 선대의 가난과 피해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는 게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주진우 기자·강은나래 인턴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