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야오이 말고 신토불이 BL 어때?
  • 중림동 새우젓 (팀명)
  • 호수 467
  • 승인 2016.09.0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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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만화책을 한 달에 열 권 정도 사다 보면 장르 구분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순정만화 하위분류에는 ‘그 남자들의 사랑’이라는 장르가 있다. 이 하위 장르는 흔히 말하는 브로맨스(브러더+로맨스)보다 ‘좀 더 진한’ 남성 로맨스물을 의미한다.

이전에도 남성 동성애 서사를 그린 아마추어 소설, 만화 등 여러 형태의 콘텐츠가 있었다. 국내에선 야오이물, 동인물, BL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최근 이 모든 것이 BL(Boys Love) 장르로 분류되어 불리고 있다. ‘동인물’은 동인 집단(아마추어 집단)이 생산한 작품들을 모두 지칭하는 것이라 지극히 넓은 범주의 용어였고, ‘야오이물’의 경우 이전까지의 남성 동성애 서사 장르를 일본에서 자조적으로 호명하던 것이라 이러한 장르의 작품들을 통칭해 BL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종합적으로 ‘BL물’이란 남성 동성애 서사를 포함하는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 장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BL 코믹스 대중화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이영희 작가의 <절정> (2005)을 꼽는다. 혹자는 이정애 작가(<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 1999, 절판)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정애의 작품은 BL로 유형화되기에는 다소 모호한 지점들이 존재한다. 이정애는 ‘남성들’ 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로맨스’와 ‘인간’의 사랑을 다양하게 다루기 위하여 ‘남성’을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확실히 이정애는 그 당시 척박한 한국 BL 코믹스 시장에 큰 획을 그었다. 현재는 전자책으로 그 당시 미완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영희의 <절정>은 19금 버전과 일반판이 함께 정식 발매된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또한 메이저 출판사(서울문화사)에서 냈던 최초의 전형적 BL물이기도 했다. 아는 사람만 구해 볼 수 있는 동인지 형식이 아니라 서점에 가면 언제든 구매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영희 작가가 <절정>을 미완으로 남겨두고 건강상의 문제로 연재를 중단한 이후, 결과적으로 국내 BL물의 대중화는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는 BL이라는 장르에 대한 편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청소년보호법을 필두로 한 검열 및 제재의 영향이 컸다.

결과적으로 이후 국내 BL물들은 동인 시장으로 다시 회귀한 듯했다. 특히 <네 멋대로 해라>로 유명한 나예리 작가는 한동안 동인 시장에서만 활동했는데, 동인지 형식으로 발매되었던 <드레스 코드>는 리맨물(남자 회사원들 간 사랑을 다룬, BL물의 하위 장르)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드레스 코드>는 지난달 제8권이 나왔는데 장장 4년 만의 발매였다.

한국판 <상은>을 기대하다

다양한 웹툰 유통 플랫폼은 동인지 시장도 바꿔놓았다. 이전처럼 동인지(특히 BL계)에서 메이저급 순정만화 장르로 넘어가는 식이 아니라, 메이저 BL계로 직접 데뷔하는 작가들이 생겼다. 리디북스나 네이버, 알라딘, 예스24 등에서 유통되는 e북에서 아마추어 동인 작가들이 BL 계통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하나의 장르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BL 시장은 막상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수면 위로 떠오르지도 않았을뿐더러,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동인지에서 활동하던 국내 작가의 공식 데뷔나 공식 출간은 소수였다. 그러나 이제는 다양한 웹 플랫폼에서 이전에 아마추어로 활동하던 BL 작가들이 종종 공식 데뷔 절차를 밟는 경우를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대원씨아이 소속의 피비 작가는 동인 시장에서도 꽤 유명했던 작가이다. 그의 <신입사원입니다>라는 데뷔작을 대형 포털 사이트에서 발견했을 때는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현재 피비 작가가 연재 중인 <남친 있어요>는 종이책으로도 발간되었다.

국내에서 작화 스타일이나 닉네임을 바꾸지 않은 채 BL 계열로 꾸준히 그림을 그리기란 쉽지 않다. 일본에서는 작가들이 동인지에서 상업 BL 시장으로 데뷔하는 절차를 밟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한국 BL계는 여전히 장르 특성상 대중화되기 힘든 장벽들이 존재한다. 특히 BL물에 대한 다양한 편견과 대중적 혐오의 감정은, 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계층이 스스로를 억압하게 만든다. ‘수면 위로 떠오르면 안 되는 장르’로 취향을 숨기는 식이다. 그러나 웹 콘텐츠 시장에서 실질적으로 돈을 가장 많이 지불하는 소비자가 20~30대 여성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소비되는 장르가 BL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일본처럼 BL물의 대중적인 상업화나 장르화가 조만간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올해 5월에는 일본의 유명한 BL 작가 나카무라 쇼코의 <동급생>이 애니메이션화되어 국내 극장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즐겨 읽는 남성 동성애 로맨스를 ‘단메이(耽美)’라고 부르며 상업적 가치가 큰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았다. 이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단메이를 다양한 형태의 웹 콘텐츠(웹 코믹스·웹 소설·웹 드라마)로 제작해 유통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꽤 이름을 알린 차이지단이나 올드시안의 경우가 이러한 단메이 장르의 대표 작가들이다.

국내 BL계는 확실히 변화의 흐름에 있다. 이전의 BL 장르가 ‘일본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면, 지금은 다양한 국내 BL 작가뿐만 아니라 중국 작가들도 국내 시장에서 유통된다. 예를 들면 <인 디즈 워즈>로 유명한 토가이 준은 중국 작가이지만 아시아와 북미 쪽 시장에서 두꺼운 팬덤층을 확보하고 있다. 조만간 일본처럼 국내 BL계가 성장한다면 성우들이 출연하는 드라마 CD가 나오게 되고, BL계 웹 소설과 웹툰 작가들의 컬래버레이션 작품이 다수로 출간될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판 <상은>이 만들어지고 한국판 차이지단이 활동할 수 있는 그날도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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