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IRS) 감사가 끝나면 공개하겠다.” 스스로 100억 달러 이상의 재산가라고 거들먹거려온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납세 자료를 공개하라는 요구에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말이다. 트럼프는 그동안 끈질기게 납세 자료 공개 요구를 받았으나 이를 외면하거나 무시해왔다. 그러자 경쟁 상대인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8월12일 자신의 납세 자료를 전격 공개했다. 클린턴 후보는 트럼프를 겨냥해 “도대체 무엇을 숨기려 하는가?”라며 압박했다. 또한 공화당 중진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출신인 마크 샌퍼드 하원의원은 8월14일자 〈뉴욕 타임스〉 기고문에서 “당신을 지지하니 부디 납세 자료를 공개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꿈쩍도 안 할 태세다. 이처럼 감사를 핑계로 납세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 트럼프가 실은 지난 몇 년간 세금을 한 푼도 안 냈거나 거의 안 냈을 가능성이 크다는 보도와 관측이 최근 잇따르고 있다.

미국에서 납세 자료의 공개 여부는 전적으로 해당 개인에게 달렸다. 대선 주자와 같은 공인이어도 원치 않으면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1976년 이후 공화·민주 양당의 대선 후보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자신들의 납세 내역을 공개해왔다. 왜 그럴까? 그 대답은 샌퍼드 의원의 기고문에 잘 나와 있다. “미국 대통령직은 지구상 가장 강력한 자리이고, 따라서 대선 후보가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관리해왔는지를 유권자가 들여다볼 수 있게 함으로써 오직 적임자만이 대통령직을 맡도록 하자는 것이다.” 2012년 대선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밋 롬니도 납세 내역 공개를 꺼리다 거센 압력에 직면했다. 그도 결국 그해 9월 하순 지난 2년간의 납세 자료를 공개했다.

ⓒAP Photo8월12일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유세를 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트럼프는 정말 국세청 감사 때문에 납세 자료를 공개할 수 없는 것일까? 국세청 얘기는 다르다. 지난 2월 존 코스키넌 국세청장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설령 감사를 받는 중이라도 납세 자료를 공개하고 싶으면 그래도 상관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도 공화당 대선 후보 시절 자신의 납세 자료를 감사 중인데도 공개한 선례가 있다. 트럼프는 2009년 이전 세금신고액에 대한 감사가 끝났지만 이마저 공개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가 공개를 거부하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추정된다. 트럼프가 실은 자신이 주장하는 것만큼 대단한 재산가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세금을 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우선 첫 번째 가능성과 관련해 경제 전문지 〈포천〉은 지난 5월 트럼프의 재산을 약 40억 달러(약 4조4000억원)로 추산한 바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트럼프가 주장하는 100억 달러 이상 재산과 큰 차이를 보인다. 두 번째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의 보도를 주목해볼 만하다. 〈폴리티코〉는 복수의 재정 전문가와 트럼프 지인들의 말을 인용해 “트럼프가 실제 벌어들이는 소득이 훨씬 낮을 수도 있고, 그에 따라 아주 낮은 세율을 적용받을 수도 있다. 바로 그 때문에 납세 자료를 공개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보도했다(5월31자). 〈폴리티코〉는 트럼프의 오랜 지인이라는 익명의 헤지펀드 매니저 말을 인용해 “트럼프는 자신의 주장처럼 돈이 많지 않고, 따라서 내는 세금도 별로 없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AP Photo3월16일 시민들이 트럼프 후보가 소유한 뉴욕 트럼프타워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트럼프가 아예 세금을 한 푼도 안 냈을 수도 있다는 세 번째 주장이 제기됐다. 7월 하순 오바마 행정부 1기 때 대통령 경제자문회의 의장을 지낸 어스탄 굴스비 교수(시카고 대학)가 이런 주장을 했다. 그는 트럼프가 공개 거부를 고집하는 데 대해 “자신이 실제론 얼마나 적은 세금을 내는지 일반 국민이 아는 걸 원치 않거나 수상쩍게 세금 탕감을 받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트럼프가 사업 손실을 이유로 1978년, 1979년, 1984년, 1991년, 1993년에도 세금을 안 냈다고 주장했다.

세금을 한 푼도 안 냈을 가능성도 제기

이 같은 주장은 〈뉴욕 타임스〉 8월11일자 보도를 통해 재조명됐다. 〈뉴욕 타임스〉는 ‘트럼프가 얼마나 세금을 낼까? 한 푼도 안 낼 수도’라는 기사에서 부동산 및 세법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부동산 재벌인 트럼프가 관련 세법의 허술한 틈새를 최대한 활용해 자신의 소득액을 0에 가깝거나 적자로 보고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세금 자문회사 그린그룹의 렌 그린 사장은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자신의 소득세를 거의 안 내거나 아예 안 내는 것은 가능하기도 하고 합법적이기도 하다”라고 밝혔다. 이 신문에 따르면, 수백만 달러를 현금으로 굴리는 부동산 개발업자 중에는 세법의 허술한 구멍을 악용해 소득세를 거의 안 물거나 아예 한 푼도 내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지난 5월 연방 선거위원회에 신고한 재산 내역을 보면 그가 회장이나 이사 혹은 회원이란 이름으로 보유한 각종 부동산은 564개에 이른다. 하지만 대부분 유한책임회사(LLC) 형태다. 부동산 LLC는 설령 수입이 수백만 달러 생겨도 감가상각비, 이자, 부동산 세금 및 운영경비 등을 계상해 장부상으로 엄청난 손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다. 트럼프는 실제 이런 장부상 손실을 활용해 과세 대상 소득을 상쇄할 수도 있다는 게 〈뉴욕 타임스〉의 지적이다. 트럼프는 부동산 구입 시 선금은 가급적 적게 내고 융자액은 최대한 늘려 장부상의 손실이 투자액을 상회하는 식으로 절세한 선례도 있다.

트럼프 같은 부동산 업자들은 사들인 부동산의 가격이 오른 뒤 되팔아 큰 차익이 생겨도 그 차익으로 또 다른 부동산을 산다. 이럴 경우 ‘동종 거래’로 인정돼 세금을 한 푼도 안 낸다. 이처럼 부유한 부동산 업자에게 특혜를 주는 동종 거래 조항으로 인해 매년 무려 330억 달러에 달하는 세수 결함이 발생하자 오바마 행정부와 의회는 관련 조항의 폐지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세제 개혁을 둘러싼 이견 때문에 아직까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비영리기관 세금정책센터의 세법 전문가인 스티븐 로젠탈은 언론 인터뷰에서 “바로 이런 허술한 세법 덕분에 부유층은 평생 세금을 피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트럼프가 세금을 한 푼도 안 냈든 적게 냈든 그의 납세 기록을 보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그렇다면 감사를 핑계로 공개를 거부하는 트럼프가 11월 대선 전에는 공개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성이 낮다. 그는 7월31일 ABC 방송의 유명 시사 프로그램 〈디스위크(This Week)〉에 출연해 자신의 ‘본심’일 수도 있는 말을 털어놓았다. 사회자 조지 스테파노풀로스의 세금 공개 관련 질문에 그는 “4년 전 롬니는 자신의 납세 내역을 공개하지 않다가 대선 직전인 9월에 했다. 그게 롬니를 아주 안 좋게 만들었다. 아주 불공평했다. 그가 대선에서 패한 까닭은 47% 득표 때문이 아니라 납세 내역 중 아주 사소한 한두 가지 때문이고, 이는 아주 불공평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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