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보수의 본진’으로 여겨지지만, 오래전 대구는 항쟁의 도시였다. 1907년 일본의 경제 침략에 맞선 국채보상운동을 시작으로 1946년 미군정에 맞선 10월 항쟁, 1960년 4·19의 도화선이 된 2·28 학생운동 등 굵직한 사건이 모두 대구에서 발생했다.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활동이 왕성해 대구를 일컬어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상화·이육사·현진건 같은 문인들이 대구의 진보적 흐름을 이끌었다.

1961년 TK 출신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야도’ 대구는 급속도로 보수화되어갔다. 한 다리 건너면 국회의원·장관이었다. ‘권력의 단맛’을 본 시민들 사이에서 패권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기나긴 보수 시대의 서막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대구 시내에는 항쟁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지하철 중앙로역 인근에 있는 경상감영공원은 10월 항쟁의 무대였다. 10월 항쟁은 미군정의 수탈을 규탄하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무차별 난사해 수십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단이었다. 이를 계기로 미군정 반대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다. 경상감영공원 인근에 있는 2·28기념중앙공원은 자유당 독재에 맞선 대구 지역 고교생의 시위를 기념하는 장소다. 2007년 문을 연 2·28기념중앙공원의 이름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공원이 옛 중앙초등학교 터에 들어섰기에 학교 이름을 딴 공원을 짓자는 이들이 있었다. 갑론을박 끝에 항쟁의 취지를 살리는 이름의 공원이 들어섰다.

중구 계산동에는 이상화 시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첫 문장이 인도 바닥에 적혀 있다. 이 글귀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화 고택이 나온다. 이상화 시인이 작고할 때까지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다. 저항시인 이육사 역시 일제강점기에 대구에서 18년 동안 살았다. 지하철 명덕역 부근 중구 남산동에 그가 거주하던 고택이 남아 있다. 한때 재개발로 철거 위기에 처했으나 대구시가 이전·복원하기로 했다.

대구 2·28기념중앙공원은 자유당 독재에 맞선 대구 지역 고교생의 시위를 기념하는 장소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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