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 대구에 놀러 갔다. 말로만 듣던 대구의 폭염을 실감해보고 싶었다. 주위에서 미쳤느냐고 말렸다. “이 더위에 먹을 것도 없는 대구에 왜 가느냐” “동대구역에 내리는 순간 후회가 밀려올 것이다”라고도 했다. 짐을 꾸리면서 온도계도 함께 챙겼다. 서울 지역 기온이 올여름 최고치(36°C)를 기록한 8월5일 오후 대구로 떠났다.

대구는 최악의 폭염 도시일까

KTX를 타고 1시간43분 만에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잔뜩 긴장하고 역사를 나섰다. 오후 5시 동대구역 바깥에서 수은주를 확인해보니 33°C였다. ‘기대’가 커서였을까, 체감온도는 그보다 낮은 것 같았다. 후끈한 열기의 강도가 서울시내보다 못했다.

버스를 타고 두류공원에 갔다. 두류공원은 대구 중심가에서 약 3.5㎞ 거리에 있는 대규모 공원이다. 165만3965㎡(약 51만 평) 면적으로 서울 송파구에 있는 올림픽공원(약 43만 평)보다 더 넓다. 야구장, 테니스장, 야외음악당 등 체육·문화시설을 잘 갖춰놓고 있다. 여느 대도시 공원과 비교해보면 숲이 울창한 것이 특징이다. 공원 둘레에 인공 실개천도 함께 흐르게 만들었다.

ⓒ시사IN 이오성대구 앞산(해발 658m)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구 시가지. 앞산은 대구를 병풍처럼 감싼다. 이곳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은 대구의 열기를 식힌다.

이날 저녁 두류공원 야외음악당에서 대구 포크페스티벌이 열렸다. 7월 말에 막을 내린 치맥페스티벌과 함께 대구 여름축제의 하이라이트다. 로이 킴, 변진섭, 윤형주, 김세환 등 유명 가수와 인디 뮤지션이 무대에 올랐다. 수만명의 인파에 조명까지 더해져 찜통일 줄 알았건만 뜻밖에 쾌적했다. 두류공원의 울창한 숲과 실개천이 더위를 식혀주는 느낌이었다.

압권은 앞산이었다. 대구에는 팔공산만 있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앞산’이라는 이름 탓에 동네 야산쯤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해발 658m에 등산 코스도 여러 개다. 두류공원에서 빠른 걸음으로 30분이면 등산로 입구에 닿는다. 대도시 중심부 가까이에 이렇게 큰 산이 또 있나 싶다. 비유하자면 서울 관악산이 잠실 어디쯤에 우뚝 솟은 느낌이랄까.

앞산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은 대구 열기를 식히고도 남았다. 앞산이 한눈에 보이는 현충로역 부근에 숙소를 잡았는데, 숙소 주인이 말했다. “여는 밤에 씨언해서 에어컨 밸로 안 틀어도 될끼라예.” 에이, 설마. 그런데 사실이었다. 앞산 근처에는 드센 바람길이 있었다. 주변이 탁 트인 터라 시원한 바람이 무시로 불었다. “대구의 밤이 이렇게 시원해도 되나.” 몇 번이나 감탄했다. 그날 서울 지인들의 카톡방에는 에어컨 전기요금을 걱정하는 메시지가 수시로 올라왔다.

‘대프리카’라는 말이 있다. 대구와 아프리카의 합성어로, 한여름의 대구를 상징하는 말이다. 대프리카라는 상호의 막창구이집이 있을 정도다. ‘불지옥 대구’라고도 불린다. 오죽하면 대구 사람들에게 ‘덥부심’(더위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1942년 8월1일 대구에서 기록된 40°C 기온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역대 최고기온이다. 70년 넘게 지났건만 ‘대구=최악의 폭염 도시’라는 고정관념은 여전하다.

ⓒ시사IN 대구시청 제공대구시내에서는 인도 양쪽에 가로수를 심은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기자가 대구를 찾은 이날만 유독 덜 더웠던 걸까. 실제로 올여름 더위는 대구 등 남부보다 중부지방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중국 북부지역에서 형성된 더운 공기가 서울 등 수도권 지역을 데우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를 조금 길게 보자. 위 그래프는 대구기상청 자료다. 지난 10년간 전국 최고기온과 대구 지역 최고기온을 비교했다. 지난 10년간 대구가 최고기온을 찍은 적은 한 차례도 없다. 경남 합천과 밀양이 두 차례씩 최고기온을 기록했고, 영덕·강릉·고창·영월·김해·의성이 1위를 차지했다. 대구 최고기온이 아예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때가 절반이나 된다.

올해의 경우 8월10일 기준으로 경주가 38.2°C(8월10일)로 전국 최고를 찍었고, 대구는 36.1°C(7월27일)로 44위에 머물렀다. 대구의 여름철 낮 최고기온이 전국 1, 2위를 다투던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폭염과의 전쟁 20년을 거친 뒤…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튿날 대구시내 중심가인 동성로를 찾았다. 이곳에 다른 지역에서는 보지 못했던 독특한 시설이 있었다. 인도 가장자리에 실개천을 흐르게 하고, 실개천을 따라 잔디를 심어놓았다. 일명 ‘그린로드’ 시설이다. 동성로 곳곳에 이런 그린로드가 조성돼 도심의 열기를 식혀주고 있었다.

이뿐만 아니다. 인도 양쪽에 ‘이열식’으로 가로수를 심어놓았다(65쪽 사진 참조). 걷는 길 한가운데에 ‘가로수 터널’이 생긴 셈이다. 동대구로에는 ‘중앙분리대 숲’도 있다. 왕복 10차선 대로의 중앙분리대 공간을 나무로 빽빽이 채워 ‘녹색도로’로 탈바꿈시켰다. 이 도로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기도 했다.

요즘 가장 ‘핫’하다는 김광석 골목에도 특별한 것이 있다(가수 김광석은 대구가 고향이다). 김광석 골목 담벼락 곳곳에 설치한 ‘쿨링포그’다. 쿨링포그는 정수된 물을 안개처럼 분사해 주변 온도를 낮추는 습식 냉방장치다. 김광석 골목의 벽화와 어울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멋도 있다.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다가도 쿨링포그 아래 서면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대구의 지난 20여 년은 무더위와의 전쟁이었다. 1995년 문희갑 대구시장(현 푸른대구가꾸기시민모임 이사장)이 취임하면서 전쟁이 시작됐다. 1996년부터 2014년까지 3차에 걸쳐 ‘푸른 대구 가꾸기’ 프로젝트가 시행됐다. 국비·시비·민간투자 등을 모두 합쳐 8000여억 원을 투입해 무려 30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시장이 바뀌어도 이 사업만은 계속됐다.

옥상을 녹지로 바꾸고, 담장을 허문 자리에 나무를 심는 사업도 대구에서 가장 먼저 추진됐다. 이제 대구는 녹지사업의 모범 사례로 손꼽히며 다른 지자체에서 견학을 오는 도시가 되었다. 2014년 환경부 발표에 따르면 전국 광역시 중 녹지 비율이 가장 높은 도시가 울산(69.8%)이고, 그다음이 대구(61.1%)다. 대전의 녹지 비율은 58.8%, 부산은 52.4%였다. 서울(30.2%)은 꼴찌다.

대구가 무덥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전히 대구의 여름철 폭염 일수(33°C 이상 기록한 날)는 전국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1942년 8월 40°C를 찍은 이래 70년 넘게 계속되어온 ‘최악의 불지옥’이라는 낙인은 이제 지워버릴 때가 온 게 아닌가 싶다. 대구는 몸부림치고 있었고, 확실히 그만큼 녹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대구 음식은 정말 맛이 없을까

한때 ‘대구 음식’을 입에 올리는 것은 식도락가들 사이에서 금기였다. ‘맵고 짠 게 전부’인 맛의 불모지라는 평가가 주였다. 심지어 대구는 컵라면마저도 맛이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였으니까. 대구 출신인 한 지인은 얼마 전 서울역에 ‘맛의 고장, 대구’라는 대구시 홍보관이 설치된 것을 보고 진심으로 비웃었다고 했다. 대구 음식은, 그렇게 대구 사람들에게도 외면당하는 신세였다.

당신이 아는 대구 음식을 떠올려보자. 막창, 닭똥집튀김, 찜갈비, 그리고 떡볶이와 납작만두 정도? 대구 음식 가운데 나름 프랜차이즈화에 성공한 것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 음식이 대구의 대표 음식처럼 취급되는 건 유감이다. 굽고, 튀기고, 자극적인 양념으로 조리한 게 대다수다. ‘요리’라고 하기에는 아쉽다.

ⓒ시사IN 이오성‘뭉티기’는 뭉텅뭉텅 큼직하게 고기를 잘라낸 게 특징이다. 참기름·마늘·고춧가루를 섞은 장에 찍어 먹는다.

그럼 대구에서 뭘 맛봐야 할까. 고기류를 즐기는 이라면 ‘뭉티기’를 권한다. 뭉티기는 대구식 생고기를 부르는 이름이다. 다른 지역의 육사시미와 다른 점은 뭉텅뭉텅 큼직하게 고기를 잘라낸다는 점이다. 힘줄을 얼마나 잘 제거하느냐가 핵심이다. 찹쌀떡처럼 쫄깃한 식감을 가지면서도 스스르 부드럽게 넘어간다. 참기름, 마늘, 고춧가루를 섞은 장에 찍어 먹으면 대구 사람들 말마따나 지상 최고의 소주 안주다. 송학, 녹양, 백합, 장원 등 이름만 들어도 내공이 느껴지는 뭉티기집이 수십 군데 성업 중이다. 각 집에서 내놓는 곁반찬의 질도 훌륭하다. ‘뭉티기 투어’에 나서는 식도락가들이 있을 정도다.

‘복불고기’도 빠뜨려선 안 된다. 저민 복어 살을 100% 국산 고춧가루 양념에 콩나물·당면 따위와 함께 볶아내는 요리인데, 그 ‘기름진 칼칼한 맛’에 묘한 중독성이 있다. 매운맛이 나중에야 은근하게 올라온다. 수성구 들안길 맛집 거리에 있는 ‘미성 복불고기’에서는 배와 사과를 잘게 썰어 넣고 담근 물김치를 내놓는데, 복불고기와 찰떡궁합이다. 손님 눈앞에서 즉석으로 무치는 콩나물무침은 밥도둑이다. 이 또한 대구 복불고기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다.

대구는 쇠고깃국의 본고장이다. 쇠고기무국, 우거짓국, 선짓국 등 다양한 스타일의 쇠고깃국밥집이 성업 중이다. 대구 음식을 폄훼하는 이들도 국밥만은 쳐준다. 웬만한 뭉티기집에서 내어주는 쇠고깃국도 수준급이지만, 역시 오래된 노포에서 맛보는 게 진리다. 국일따로, 벙글벙글집, 옛집식당 등 저마다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질 좋은 쇠고기에 대파와 무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고 정성스레 끓여냈다. 얼큰하고 담백하면서도, 슬며시 단맛이 돈다. 한여름 무더위에 몇 숟가락 훌훌 떠넘기면 생기가 돌 것 같은 맛이다.

대구 음식을 맛보면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왜 대구 음식이 이토록 저평가되었던 걸까. 역사가 있다. 물산이 풍부하지 못했던 내륙분지 도시에는 원체 먹을 것이 없었다. 소금으로 염장한 간고등어나, 쇠고기 장조림 따위가 주로 먹는 음식이었다. 날이 더우니 얼큰한 음식으로 기력을 차려야 했을 것이다. 맵고 짠 음식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대구 음식이 맛이 없다는 건 과거 어느 시점까지는 사실이다.

ⓒ시사IN 이오성김광석 골목 담벼락 곳곳에 설치한 ‘쿨링포그’는 물을 분사해 주변 온도를 낮추는 장치다.

냉장 유통 기술이 발달하면서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전국 각지의 다양한 재료들이 대구로 몰려왔다. 요식업계 당사자들도 오명을 씻기 위해 몸부림쳤다. 맛집이 모인 수성구 들안길에 가보라. 낙지볶음, 게장, 홍어삼합 등 과거 대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음식이 즐비하다. 대구 음식 문화를 오랫동안 취재해온 〈영남일보〉 이춘호 기자는 “대구 음식이 형편없는 줄 알았다가 감탄하고 가는 외지인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그동안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전국 대도시 가운데 숨어 있는 음식 내공으로는 최고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은가. ‘대구의 맛’이 어디까지 진화했는지.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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