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생들을 상담할 때 종종 미술을 활용한다. 반으로 접은 A4 용지에 행복·기쁨·슬픔·우울함과 관련해 떠오르는 색을 칠하게 하고, 상담을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주제인 성적·학업·연애·진로 등에 대해 색을 다시 칠하게 한 후 왜 이 색이 떠올랐는지, 조금 전의 기분과 관련한 색과 비슷한 경우 왜 그런지 질문한다. 단지 어떤 색을 왜 칠했는지를 묻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이야기가 오갈 수 있기 때문에 자주 활용하는 편이다.

한 번은 학교의 행정적인 문제로 인해 30분 넘게 학부모와 통화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자녀가 속 깊은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말을 들었다. 때마침 그 아이와 상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아이가 “선생님, 저 왔어요”라며 교무실에 들어왔고, 나는 준비해두었던 자료와 색연필을 챙겼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아이는 행복·기쁨·슬픔과 관련해 자신만의 색을 골랐다. 그리고 왜 그 색을 선택했는지 표현했다. ‘우울함’과 관련해 그 아이는 초록색을 칠했다. 이어진 ‘진로’라는 단어에도 그 아이는 초록색을 칠했다. 우울함과 진로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 아이에게 물었다.

“진로에도 초록색을 칠했고, 우울함에도 초록색이네? 혹시 어떤 이유가 있을까?”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데…”라고 학생은 말끝을 흐렸다. “비현실적이에요. 가능성이 없어 보여서 우울해요”라고 답했다.

ⓒ박해성 그림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변변찮은 학원도 주변에 없고, 학생들 집은 대체로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 진로는 명확한데 가는 길이 험난하다. 학교에 미술 교사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아이를 지도해달라고 하는 것은 현실상 쉽지 않다. 그래서 학생들은 일찍 바라는 진로와 진학을 접고 현실과 타협한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같이하자고 손 내밀어야

어떤 식으로든 아이를 응원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림 그리기를 꾸준히 하고 있다는 아이에게 방학 동안 일주일에 두 장씩 그려서 보내면, 그 그림에 대해서 대화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이후에 만난 아이는 웃으면서 옆에 있던 남자친구에게도 과제를 내달라고 했다.

이 아이를 통해서 꿈은 있지만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혀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꿈을 지지하고 싶어도 재정적인 문제 때문에 선뜻 지원해주지 못하는 부모가 많다. 불황으로 갑작스럽게 직장을 잃은 학부모들의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게다가 내가 근무하는 이 지역은 문화적·교육적 인프라가 매우 부족한 편이다. 아이들이 접할 수 있는 놀이 공간은 PC방, 노래방, 당구장뿐이다. 볼링장이라도 가려면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40분 정도 나가야 한다. 극장까지는 최소 1시간30분이 걸린다. 근처에 군부대가 많아서 군 용품점, 치킨집같이 특화되어 있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서울에서 이곳에 오는 막차 시간은 저녁 8시50분으로 꽤 빨리 끊기는 편이다. 도심에 사는 아이들이 으레 할 수 있는 것들이 이곳에서는 크게 마음을 먹어야 가능하다.

사진기자가 꿈인 아이가 있었다. 가까운 곳에 학원이 없어서 괜찮은 학원을 가려면 꽤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고, 학원비 또한 만만치 않아서 가족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어느 날 그 학생이 자리에 보이지 않았다. 담임교사에게 물어보니, 부모의 허락을 받아 체험학습을 신청하고 사진을 배우러 갔다고 했다. 이 아이에게는 스스로 그 어려운 현실을 이겨낼 힘이 있었다. 순간,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했던 아이, 그리고 비슷한 현실에 갇힌 아이들이 떠올랐다.

과연 나는 교사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심하다 결국 방학식 날 아이들에게 희망 진로와 관련된 자그마한 과제를 개별적으로 내주었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같이하자’라고.

기자명 차성준 (포천 일동고등학교 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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