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 한 마리가 죽었다. 이틀에 한 번씩 물을 갈아주고 꼬박꼬박 사료를 줬다. 그게 내 할 일의 전부였다. 애초에 신경 쓸 게 없다는 말을 듣고 데려왔다. 개나 고양이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석 달 전쯤 ‘물생활(관상어 등을 키우는 취미)’을 즐기는 지인이 구피(관상용 열대어) 8마리를 분양해줬다. 이들은 작은 어항에서 자기들끼리 놀았다. 만지거나 대화할 수 없으니 인간인 나와 교감하기란 불가능했다. 딱히 정이 붙지는 않았다. 죽은 놈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싱숭생숭했다. 같이 살던 놈이 죽었다는 사실은 외려 문제가 아니었다. 사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의 죄책감, 그로부터 비롯된 존재의 불평등함 따위 생각이 머릿속에 얽혔다. 다른 구피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까 봐, 또 쳐다보기 싫어서 죽은 놈을 재빠르게 건져냈다. ‘인간은 물고기라는 생명체보다 갑의 위치에 있구나’ 하는 인식에서 ‘모든 존재는 불평등하다’는 명제가 다시금 각인됐다.

ⓒ시사IN 양한모

그즈음 ‘강남역’ ‘구의역’ 사고를 취재하고 있었다. 아무런 잘못 없이 숨을 거둔 이들은 나보다 어렸다(이상한 감정이지만, 나보다 어린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는 일은 다른 죽음을 볼 때보다 더 괴롭다). 사회적으로는 약자에 가까웠다. 사건을 되짚으면서도 궁극적인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별안간 찾아든 불행마저 왜 하필 약자에게 닥치는 건가…. 어떤 설명도 충분히 와 닿지 않았다. 자괴감에 빠진 내게 누군가가 외우라는 듯 말했다. “삶도 죽음도 불평등해. 원래 이 세상은 불평등하다고.”

얼마 후, 몇몇 ‘어른 구피’가 갓 태어난 새끼를 잡아먹는 광경을 목격했다. 생태의 질서로 이해했지만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수초 속에 숨어 있던 새끼들은 몸집이 불어나자 밖으로 나와 자유롭게 헤엄쳤다. 신기했다. 관찰 끝에 또 다른 질서도 발견했다. 구피는 자신의 입보다 큰 사료를 먹지 않았다. 사료를 물었다가도 적당한 크기를 넘어서면 바로 뱉어냈다. 탐욕이랄 게 없었다. 어항 속 생태계는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낯 뜨거운 얘기지만, 어린 구피를 보며 나는 “모든 존재는 원래 불평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생각을 했다. 실패를 거듭하겠지만, 평등한 세상을 위해 그냥 한번 노력해보는 거라고. 그래야 어떻게든 같이 살아보자고 말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나 자신에게도.

 

 

기자명 송지혜 기자 다른기사 보기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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