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들어봤을지 모르고 못 들어봤을지도 모를 한시(漢詩) 네 수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할게. 좀 지루할지 모르겠는데, 망국의 설움을 추체험하게 하는 시들이야. 원문은 나도 이해할 수 없으니, 국문으로 번역된 걸 인용할게.

“어지러운 세상에 떠밀려 백두의 나이에 이르도록/ 목숨 버리려다 그만둔 것이 몇 번이던고,/ 오늘에야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바람 앞의 촛불 번쩍번쩍 창천에 비추누나.”

“요기가 하늘을 가려 제성(帝星)이 옮기니/ 대궐은 침침한데 시각이 더디구나./ 조칙은 이제부터 다시 내리지 않으리니/ 임랑의 종이 한 장 눈물 하염없네.”

“조수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오./ 무궁화 이 세계는 망하고 말았구려./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 어렵기도 합니다.”

“내 일찍이 큰집을 지탱함에 서까래 반조각의 공도 없었으니,/ 충은 아니요 다만 인을 이루려 함이로다./ 겨우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쳤을 뿐이니,/ 그 당시 진동(陳東)의 행동을 밟지 못함이 부끄러워라.”

이 시들의 작자가 혹시 떠오르나? 셋째 시의 마지막 연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 어렵기도 합니다(難作人間識字人)’가 너무 유명해서 얼른 떠올릴 수도 있을 거야. 그래, 흔히 절명시(絶命詩)라고 알려져 있는 이 시의 작자는 호가 매천(梅泉)인 황현(黃玹:1855~1910)이야. 황현은 융희 4년(1910) 음력 8월3일, 한일합방령이 군아(軍衙)에서 민간으로 유포되자, 바로 그날 밤 이 네 편의 시를 쓴 뒤 아편을 먹고 자살했지.

ⓒ이지영 그림

사실 국역시를 읽어도 동아시아 고전 문화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겐(물론 나를 포함해서) 뜻이 또렷하게 들어오지 않을 거야. 넷째 시에 나오는 윤곡이란 사람과 진동이란 사람에 대해서만 짧게 얘기할게. 윤곡은 남송(南宋) 때 사람으로 진사에 급제해서 조정에 진출했는데, 몽고 군대에게 나라가 망하자, 자기가 거처하던 집에 스스로 불을 지르고 죽었대. 또 진동은 북송(北宋) 말기 사람으로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나라를 바로잡을 것을 간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대. 그러니까 황현이 이 시에서 윤곡을 따르는 데 그쳤을 뿐 진동의 행동을 밟지 못했다고 말한 건, 나라가 망하게 되자 자결로 슬픔과 분함을 드러내는 데 그칠 뿐, 국난의 시기를 당해서 나라에 글을 올리는 등 적극적 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걸 자책하고 있는 거지. 사실 매천은 20대에 상경해서 10여 년을 서울에서 보낸 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서울 걸음을 뚝 끊고 농촌에 칩거해버렸거든. 어떤 서울 친구가 그의 칩거를 원망하자 “그대는 나를 보고 도깨비 나라의 미치광이들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도깨비 미치광이 짓을 하란 말이냐?”라고 공박했다고 해.

보기에 따라 매천의 칩거와 자살의 ‘소극성’을 비판할 수도 있겠지. 나라가 어지러우면 ‘글 아는 사람’, 다시 말해 지식인으로서 망국을 막기 위해 적극적 행동을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지. 그렇지만 매천은 그런 유형의 인간은 못 됐던 것 같아. 그는 칩거해 농사를 생업으로 삼아 근검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독서와 저작에 몰두했고, 나라가 망하자 ‘글 아는 사람’의 도리로 자결을 택하고 말았지. 매천은 시(詩)로 일가를 이룬 이지만, 산문도 거기 버금가는 ‘글쟁이’였어. 그 산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매천야록〉이야.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에 이르기까지의 조선 ‘역사’야. 그런데 그것이 국가권력이 관찬(官撰)한 정사가 아니라 한 개인이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것이어서 ‘야사’ 곧 ‘야록’이 된 거지. 따지고 보면 30대 이후 서울 출입을 끊고 농촌에 칩거한 개인의 역사 기록이 엄밀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 그렇지만 시골에 사는 황현을 찾아 나라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주는 지인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그때는 조선 땅에 근대적 의미의 신문이라는 게 나타난 시기야. 그 당시 쏟아져 나온 중국·한국의 계몽서들도 그에게 도움이 되었겠지만, 신문이야말로 시골구석의 황현과 세계를 연결해주는 인터넷이었어. 쌍방향은 아니었지만. 황현은 주로 신문들에 의거해서 망국 이전의 역사적 사건·사실, 공적 문건에서부터 단편적 일화와 해외 소식까지를 기록하고 있어. 실제로 신문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대목도 적지 않아. 〈매천야록〉이 바로 그 시기의 역사이자 신문이었던 거야. 그런데 황현은 요즘 식으로 말

〈역주 매천야록〉(상·하)황현 지음 임형택 외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하자면 스트레이트 기사, 곧 보도 기사만 쓰진 않았어. 그는 드물지 않게 ‘논설위원’이나 ‘칼럼니스트’가 되어 어떤 사건의 의미를 분석하고 해석하곤 했지. ‘논설위원’으로서의 황현이 신분적으로 사대부였으므로, 〈매천야록〉이 전근대적 왕조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은 사실이야.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관점으로 〈매천야록〉을 읽으면 신분적·계급적 그리고 당파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지. 예컨대 1894년에 ‘난’을 일으킨 전봉준이나 최시형 같은 동학교도들은 매천에게 당연히 ‘동비(東匪)’이자 ‘적당’이었어. 그러나 매천은 한편으로 비판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어서 글이 그의 편견 때문에 크게 휘어지지는 않았어.

망국이 닥쳐오며 심해진 슬픔과 분노

〈매천야록〉에서 가장 큰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은 고종과 민비, 나중에 명성황후라고 추서되는 그 민비야. 매천은 자신의 사대부 신분에도 불구하고 군왕과 그 비(妃)를 비판하고 꾸짖는 데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어. 〈매천야록〉이 그린 고종과 민비의 이미지는 외세에 늘 허리를 굽히면서도 백성들에겐 모질기 짝이 없는 폭군이자 매관매직의 두목이었어. 매천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하게 되는 가장 큰 책임을 고종과 민비에게 돌리고 있는 거지. 그것은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나 역시 공감해왔던 관점이야. 국사학계 일각에서는 고종과 민비의 ‘복권’ 움직임이 오래전부터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비록 정사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매천야록〉은 망국 이전 반세기의 역사를 시시콜콜 기록하고 있어. 심지어 동시대 지구 반대편 나라들의 정세나 날씨나 사건·사고 같은 것까지 기록하고 있지. 이런 쇄말적 기록은 뒤로 갈수록 더해지는데, 그것은 황현의 글이 점점 신문에 더 깊이 기대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해. 그리고 망국이 닥쳐오면서 매천의 슬픔과 분노와 절망은 점점 심해지고, 그의 정서가 독자에게 감염돼 〈매천야록〉을 읽는 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지기도 해. 어쩌면 이 느낌은 〈매천야록〉 이후 역사를 알고 있는 한국인 독자로서 드는 느낌이기도 할 거야.

글이 쓰인 지 한 세기가 훨씬 더 지난 오늘날의 독자에게 〈매천야록〉의 어떤 부분은 치우쳐 보이고, 심지어 허황해 보이기도 할 거야. 그러나 매천은 당대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접할 수 있는 모든 뉴스를 이 책에 담아놓았고, 그 뉴스에 대한 논평을 게을리하지 않았어. 그는 다른 유생들처럼 벼슬길로 들어서지도 않았고, 상소문을 올리지도 않았고, 의병활동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 시대를 관찰하고 사색하고 기록해 놓았어. 그 덕분에 우리는 한 지식인의 눈에 비친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조선 상황을 알 수 있게 되었지. 세상이 어지러울 때 누군가는 싸워야 하지만, 누군가는 기록해야 해. 황현은 기(록)자 구실을 자청해서 맡았고, 나라가 망하자 ‘글 아는 자’의 의무로 삶을 마감했어. 그가 선택한 죽음의 방식을 찬양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 죽음 앞에서 숙연해지는 것도 사실이야. 내가 읽은 국문본 〈매천야록〉은 문학과지성사에서 2005년에 두 권으로 나온 〈역주 매천야록〉이야. 임형택 교수를 비롯한 여러 한문학자가 함께 번역했지. 번역자들이 믿을 만한 분들인 만큼, 번역도 술술 읽혀.

기자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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