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작가들이 사반세기만에 보내는 위로
  • 이오성 기자
  • 호수 461
  • 승인 2016.07.21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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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의 기억을 간직한 두 작가가 만났다. 이들이 속한 고운 세대는 싸움을 시작했지만 끝장을 보지 못하고 흐지부지 흩어지는 과정에서 절망과 허전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시절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특집

고운 작가들이 사반세기만에 보내는 위로

열병같던 ‘고등학생 운동’의 추억

 

 

27년 만의 만남이라고 해야 할까. 1990년 서울 계성여고 2학년이던 하명희 작가는 문예반에서 독서토론을 하고 있었다. 서울 명덕고에서 ‘고교생 운동(고운)’을 펼쳤던 박명균씨가 당시 펴낸 <친구야 세상이 희망차 보인다>라는 책이었다. 하명희 작가는 내내 이 책의 저자가 궁금했다. 교내 소모임을 만들고, 전교조 소속 해직교사를 돌려달라고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민주 학생회를 만들기 위해 유인물을 뿌리다 학교에서 쫓겨났던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1990년대 고교생 운동을 다룬 소설 <나무에게서 온 편지>로 2014년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한 뒤로도 궁금증은 가시지 않았다.

27년 만에 만난 저자 박명균씨는 과자 장수가 되어 있었다. 2.5t 트럭에 과자를 싣고 경기 북부 지역 문구점이나 슈퍼에 납품하는 일을 한다. 최근 <나는 언제나 술래>라는 책을 펴내면서 꽤 이름을 알리고 있다.

하명희와 박명균. ‘고운’의 기억을 간직한 두 사람이 하명희 작가가 기거하는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만났다. 마침 하 작가는 이곳에서 새로운 작품 한 편을 끝마친 참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초여름 저녁이었다.  

 

둘 다 어떻게 책을 펴내게 되었나?

하명희(하):1991년 5월 고등학교 3학년 신분으로 매주 시위에 나갔다. 그때 13명이 분신하거나 의문사했다. 뭐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5월 투쟁이 끝나면서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한 채 운동을 마무리해야 했다. 고운을 시작할 때 많은 친구들과 함께였지만, 끝날 때는 아니었다. 어떤 쓸쓸함 같은 것이 내내 남아 있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소멸된 기억에 대한 아픔이랄까. 그러다 2006년에 양돌규씨가 쓴 고교생 운동 논문을 보았다. 그제야 그때 이야기를 써도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박명균(박):재작년에 중국 친구 집에 갔다가 우연히 하명희 작가의 <나무에게서 온 편지>를 보았다. 고교 시절의 향수들이 확 밀려오더라. 먹고살기 바빠서 까맣게 잊고 지내던 이야기였다. 솔직히 좀 많이 속상하고 아팠다. 이런 후배들이 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 작가 같은 이들에게 답장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고교 시절은 어땠나?

:독서모임을 통해 책을 읽었다. <철학 에세이>도 읽고 <전태일 평전>도 읽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반장선거에 나가 당선됐는데, 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반장직을 박탈당했다. 그 뒤로 학생회 직선제 등을 요구하다 무기정학을 당했다. 정학 통보를 받고 교과서를 모두 찢어버렸다. 그래도 졸업은 했다(웃음).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1990년대 고등학생 운동을 한 박명균·하명희(왼쪽부터) 작가는 최근 그 시절을 다룬 글을 썼다.

:<친구야 세상이 희망차 보인다>에도 반장직 박탈당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땐 그걸 보고 참 많이 웃었다. 내가 다닌 계성여고는 서울 명동성당 바로 옆에 있다. 민주화의 성지에 학교가 있다 보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명동성당 농성을 펼쳤던 서고련(서울지역 고등학생 연합) 선배들과도 인연이 닿아 지금까지 연락하며 지낸다. 문예부 활동을 하면서 건국대에서 열린 민주학교(전교조 해직교사와 건국대 사범대생들이 주최)에 참가했다.

고교 시절을 후회하지는 않나?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그때 내가 ‘고운’을 택한 건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듯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내가 대학에 갔다고 해서 내 삶의 가치가 바뀌었을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는 그래도 잘 버텨온 쪽에 속하지만, 주변에 보면 고운에 자신을 던졌다가 가정이 해체되거나, 책임질 수 없는 여러 문제에 맞닥뜨린 친구들이 많았다. 그걸 혼자 감당하면서 무너진 이들이 꽤 있었다. 정신분열증에 걸린 친구도 있었다. 아마 그들에게는 여전히 고교 시절이 지워버리고 싶은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왜 이 이야기를 아무도 하려 하지 않았을까?

:<나무에게서 온 편지> 말미에도 썼지만 전교조 선생님들의 경우 결국 복직과 합법화를 거치면서 스스로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억이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것이 없다. 지금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는 있겠지만, 만난다 해도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 그때의 이야기를 소리 내어 하는 것이 그 친구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통은 당사자만이 느끼는 것이다. 고운을 했든 안 했든 20대는 모두가 힘들었을 것이다. 30대에는 자리 잡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제 40대가 되면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당사자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기가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때 그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나는 언제나 술래>에 썼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잘했다고. 나도 잘 안다. 고운을 펼쳤던 사람 처지에서 보면 얼마나 힘든 삶이었던가. 싸움을 시작했는데 끝장을 보지 못하고 흐지부지 흩어지는 과정에서 희생한 것이 너무 많았다. 그 절망과 허전함을 이해한다. 그런데 고운을 비교적 먼저 시작한 처지에서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쓰고 싶지 않더라. 우리는 그때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어른들이 하지 못하니까 우리가 했던 것이다. 고교 시절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한다는 것은 우리 삶을 부정하는 것이다. 고교 시절 우리의 행위는 의미 있게 기억하되 학교나 정부 때문에 상처를 받은 부분에 대해 이제라도 사회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본다.

:<나무에게서 온 편지>를 쓰면서 기본적으로 쓸쓸하고 먹먹했다. 그럼에도 소설을 쓰면서, 내 삶에서 가장 좋은 자양분을 얻었던 때가 그 시절임을 깨달았다. 그때 친구들과 이어지지 못한 단절감이 슬프지만, 언젠가는 해소되리라 생각한다. 그때 친구들, 전교조 선생님과도 다시 만나보고 싶다.

녹취 도움·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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