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넘게 학원을 다니면서 숙제를 한 번도 안 해 오는 학생이 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공부를 안 한다. “너 그러다 대학 못 간다”라고 엄포를 놓았더니 “못 가면 어때요? 전 지금도 행복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도 만사태평이다. 내 표정을 살피더니 “학원에 안 오면 불안하니까요. 근데 대학 안 가도 상관없어요. 엄마도 괜찮다고 했어요”라고 덧붙인다.

속 편한 소리 한다고 혀를 찰 수도 있다. 옆에서 친구들도 “쟤는 아빠 사업 물려받으면 되니까 저래요”라고 말했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좋은 직장을 얻는 길이라고 믿는 아이들은 공부를 안 해도 되는 친구가 부럽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가정에서 자란다고 ‘학벌’에 대한 욕구가 덜한 것은 아니다. 일찍부터 자식에게 청년 사업가의 길을 열어주는 부모가 아니고서야 대체로 좋은 대학에 자식을 진학시키려 애쓴다. 학벌의 위력이 덜해졌다고 하지만 ‘인(in)서울’로 대표되는 유수의 대학 간판은 여전히 명예나 경제력으로 치환되어 인식된다. ‘좋은 대학 나와 봤자 회사원’ ‘고졸과 대졸 신입사원의 임금 차이가 없다’고 회의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도 늘고 있지만, 지방 사립대의 붕괴는 서울과 몇몇 지방 국립대로 대표되는 학벌 사회를 한층 더 공고하게 만들고 있다. 이 아이의 상태를 단지 비빌 구석이 있어서 태평한 것이라고 깎아내리기는 어렵다.

ⓒ김보경 그림

학원비가 아깝기도 해서 몇 차례 아이 어머니에게 학원을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고 권해봤다. 하지만 “학교에 가고, 학원에도 다니면서 학생답게 일상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나 어머니의 말을 들어보니, 입시 체제 안에서 평범하게 지내기 위해 학원을 소비하고 있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생활을 위해 학원에 다녔다. 남들이 다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 때문이었다.

교실에 특이한 아이가 하나 있구나 여기고 의미를 두지 않을 수도 있다. 성적을 올릴 욕구가 없는 아이가 학원에 오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원을 의지 없이 다니는 친구들 중 일부는 이 아이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학원에 오지 않는 학생들 중에는 이런 이들이 훨씬 많을 수도 있다. 굳이 대학에 가지 않아도 만족하며 살 수 있지만, 입시 외의 선택지를 제시받지 못하니 남들 하는 대로 영혼 없이 따라가고 있는 아이들은 어딜 가든 있을 것이다. 설령 그런 아이가 단 한 명밖에 없을지라도 그 목소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교육이 할 일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고 키워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원래 그렇다’며 강요하지 말아야

고등학교 졸업 이후 꿈꿀 수 있는 진로가 다양하지 않은 사회에서, 대학 입시가 아닌 다른 삶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은 부모나 교사 처지에서 솔직히 부담이 크다. 우리는 아이들이 자신의 개성으로 삶을 꾸려나가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힘든 일을 하고, 많은 돈을 벌며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대학 간판으로 상징되는 학벌의 욕망을 외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딴생각하지 말고 일단 공부만 하라’고 다그친다. 특별히 위대해지겠다거나 사회적 성공을 바라지 않는 아이에게도 어떻게든 노력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힘들게 살지도 모른다고 겁박한다.

하지만 ‘현실’을 핑계로 살아남는 법만 가르친다면 사회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학벌을 쟁취하지 않아도 삶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믿어야 하고, 아무것도 되려 하지 않아도 지금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사회에서 자력으로 살아남으라는 충고를 듣는 빈도는 열일곱 살이라는 시간을 충분히 누리라는 말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사회가 원래 그렇다’는 말은 아이가 살아갈 미래에 어떤 해결책도 되지 못한다. “대학에 못 가도 상관없다”라던 한 소녀의 말이 집안이 잘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말이면 좋겠다. 학벌에 관계없이 모든 삶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회를 꿈꾸지 않으면, 학벌은 더 견고하고 더 좁은 문이 되어갈 테니 말이다.

기자명 해달 (필명·대입 학원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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