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우리가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든다고 해도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만큼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들 수는 없을 거다.” 노희경 작가는 2008년 방영작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드라마 PD 주준영(송혜교)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인생관을 피력한 바 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동료들과 포기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내가 사는 세상처럼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드는 축제 같은 그날까지”라며 드라마관까지 이어 밝힌다. 이 대사를 빌려 말하자면, tvN 〈디어 마이 프렌즈〉야말로 바로 그 “세상처럼 아름다운 드라마”다.

노희경이 보는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단지 예쁘고 즐거운 일로 가득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행복과 불행, 화해와 갈등, 원망과 그리움, 이상과 현실, 시작과 끝, 그런 모든 반어적인 것들이 결코 정리되지 않고 결국엔 한 몸으로 뒤엉켜 어지러이 돌아가기에” 아름답다. 뒤집어보면, 이처럼 모순적이고도 다면적인 삶의 속성을 통찰하는 시선이 그녀의 드라마를 더없이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다. 노희경의 가장 아름다운 드라마인 〈디어 마이 프렌즈〉는 그러한 시선이 원숙한 경지에 도달한 걸작이다.

ⓒtvN 제공 <디어 마이 프렌즈>는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은 인물들 사이에서 밀도 높은 유대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는 주요 인물들이 노인인 점과 무관하지 않다.

생의 다층적 속성을 꿰뚫어보는 시선은 노희경 특유의 관계의 서사에서 두드러진다. 그의 인물들은 대개 초반에는 저마다의 아픔과 결핍으로 인해 관계에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엔 마음의 벽을 허물고 서로 깊은 유대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는 근본적으로 상처에 대한 공감과 타인에 대한 이해 위에서 형성되기에 드라마 속에서 흔히 그려지는 혈연, 법적 제도, 이성애적 인연을 뛰어넘어 한층 다채로운 이야기와 삶의 표정을 보여주게 된다. MBC 〈내가 사는 이유〉에서 손 마담(윤여정), 애숙(이영애), 춘심(김현주), 명화(강성연)와 같은 술집 작부들이 만들어가는 밑바닥 여성 공동체나, KBS 〈거짓말〉에서 동진(김상중), 세미(추상미), 장어(김태우)가 진부한 애정 구도를 탈피해 선보인 새로운 삼각관계 등 초기작에서부터 일찌감치 확립된 ‘노희경 월드’의 강점이었다. 노희경 드라마를 보는 행위가 곧 삶과 인간에 대한 풍부한 이해의 과정과도 같은 이유다.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는 이러한 강점이 절정에 달한다. 극 중 인물들은 외적 조건만 보면 어릴 적 한동네에서 부대낀 동문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접점이 없다. 계급도, 나이도, 성격도, 자라난 환경도 천차만별이다. 가령 여배우로 대성하고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보이프렌드’와 교제를 즐기는 영원(박원숙)의 자유분방한 삶과, 일흔이 넘도록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매여 산 정아(나문희)의 억압적이고 금욕적인 삶은 너무도 다르다. 젊은이들이 혐오하는 ‘꼰대’ 정신의 화신인 석균(신구)과 꼰대들의 잔소리 1순위 대상인 프리랜서 비혼 여성 완(고현정)의 거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디어 마이 프렌즈〉는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은 인물들 사이에서조차도 밀도 높은 유대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주요 인물들이 노인인 점과 무관하지 않다. 더 정확하게는 그들이 단지 나이 많고 경험 많은 노인이 아니라 노희경 인간관의 최종 성장형으로서 노년이기 때문이다.

애증하다 끝내 이해하는 노희경의 ‘엄마’들

노희경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여러 상처와 비밀을 감춘 심층적 내면을 지닌 존재로 바라보고, 이들의 관계를 통해 삶의 입체적 아름다움을 극화한다. 〈디어 마이 프렌즈〉의 노년들은 그러한 내면의 깊이가 한층 심화된 인물로 묘사된다. 유치하고 천진한 아이, 혈기 방장한 청춘, 지혜로운 현자의 모습이 모두 들어 있는 그들은 마치 ‘러시안 인형’처럼 중첩된 생의 원숙한 풍경을 켜켜이 펼쳐 보인다.

〈디어 마이 프렌즈〉 속 관계의 서사가 밀도 높은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이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돌이켜보면 노희경의 드라마는 여성 유대의 서사이기도 했다. 특히 데뷔작인 MBC 〈엄마의 치자꽃〉에서부터 시작된 모녀간 서사는 대부분의 작품을 관통해왔다. 그 안에서 노희경의 ‘엄마’들은 전형적인 한국적 어머니상이면서도 이를 배반하는 인물형이기도 했다. 예컨대 MBC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인희(나문희)와 KBS 〈꽃보다 아름다워〉의 영자(고두심)는 가부장적 가족제도 내에서 희생의 아이콘이었고, KBS 〈그들이 사는 세상〉의 준영 모(나영희)와 SBS 〈괜찮아, 사랑이야〉의 해수 모(김미경)는 불륜·가출 등 가부장제의 금기를 어긴 이단적 존재였다. 노희경의 페르소나 같은 ‘개딸’들은 이런 엄마들을 애증하다가 끝내 이해하고 극복하며 가부장제의 무게를 한 걸음 벗어난다.

ⓒtvN 제공 노희경 작가는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풍부하고 다채로운 여성들의 관계를 그려낸다.

〈디어 마이 프렌즈〉는 이러한 모녀 중심 여성 유대 서사를 크게 확대한다. 90대 쌍분(김영옥)에서부터 30대인 완까지, 세대차는 더욱 커졌지만 여성들의 관계는 지극히 수평적이다. 그 바탕에는 시대를 초월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사회적 소수자로 억압받아온 여성 경험의 공유가 자리하고 있다. 난희(고두심)가 젊은 시절 남편의 외도에 충격받고 찾아간 친정에서 아버지에게 맞고 있는 엄마 쌍분을 발견하는 모습이나, 한평생 가부장적 남편 때문에 고통받아온 정아(나문희)가 딸 순영(염혜란) 역시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온 것을 알게 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위에 늙은 남편의 폭력에서 도주한 필리핀 출신 여성의 이야기까지 겹쳐진다. 노희경 작가는 반복되는 여성 혐오의 역사를 구체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비판하고 있다.

동시에 강력한 여성 연대의 서사로 상처 치유를 시도한다. 친구들이 똘똘 뭉쳐 정아를 학대하는 남편 석균을 반성하게 하는 모습이나 젊은 남성 지식인들에게 무시당한 충남이 친구들 응원에 힘입어 반격하는 모습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통쾌한 순간 중 하나다. 더 인상적인 것은 한국 드라마에서 좀처럼 발견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자매애의 전시다. 〈델마와 루이스〉의 노년 버전인 정아와 희자(김혜자)의 우정, 사랑보다 ‘의리’를 우선시한 희자와 충남(윤여정)의 관계, 영원을 친딸처럼 아끼는 쌍분의 애정 등 여성들의 관계를 이렇게 풍부하고 다채롭게 그려낸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측면에서 극 중 완의 글쓰기 역시 한층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할머니 이야기로 데뷔한 완이 다음 세대 여성들의 목소리를 이어가며 여성 상처의 역사를 증언하고 극복하는 것은 그대로 노희경 작가가 〈디어 마이 프렌즈〉를 통해 하고 있는 작업이다. 이는 꽤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하다. 늘 상처 입은 이들의 목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해온 노희경 작가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시급하게 치유해야 할 상처로 여성 이야기를 선택했다. 그것이 지나치게 이상적인 판타지라 해도 우리에겐 더 많은 여성 치유의 드라마가 필요하다.

기자명 김선영 (TV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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