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내내 클라리넷을 불던 손으로 주사기를 들었다. IMF 외환위기 여파로 휘청거리는 집안의 3녀1남 중 셋째 딸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취업 잘 되는 전공을 고르다 보니 간호학과였다.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식사 시간을 놓치기 일쑤였으며 오버타임이 일상인 중환자실에서 홍지숙씨(31)는 언제나 날이 서 있었다. 홍씨는 2011년 쓰지 못한 휴가를 붙여 1년간 휴직을 신청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주어진 긴 시간 내 충분히 여행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곳이 라틴아메리카였다. 쿠바는 그 여행 일정 중 하나였다. 8개월의 여행 기간 중 단 3주일 머무른 쿠바에 그렇게 마음을 빼앗기게 될 줄은 홍씨도 예상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체격이 커서 항상 주눅이 들어 있었다. 주변 시선도 신경 많이 썼고. 그런데 쿠바 사람들이 자기 삶을 대하는 자신감을 보면서 나를 다시 만나게 됐다.” 쿠바 사람들은 ‘뚱뚱하다’는 홍씨의 말을 ‘풍성한 아름다움’으로 정정해줬다. 남은 여행 일정을 보내는 동안 이상하게 쿠바만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숙소 변기 수압까지 꼼꼼히 챙긴 쿠바 가이드북

그게 시작이었다. 매년 쿠바를 찾았다. 홍씨가 6년간 쿠바에 머무른 날은 모두 262일, 시간으로 따지면 6288시간이다. 다섯 번째 쿠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가이드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홍씨가 블로그에 올린 여행기를 보고 문의하는 사람이 하나둘 생길 때였다. “초보 여행자의 시선에서 기본 정보부터 세세하게 다룬 가이드북이 없다. 제대로 된 가이드북만 있어도 쿠바의 문턱이 낮아진다.” 쿠바의 인터넷 환경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가이드북은 매우 중요하지만, 시중에 나온 가이드북은 홍씨의 성에 차지 않았다.

지난해 8월 병원을 그만뒀다. 출판사를 통할 수도 있었겠지만 직접 책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1인 출판을 시도했다. 숙박업소의 변기 수압까지 꼼꼼히 챙겼다. 직접 경험한 쿠바를 꽉꽉 눌러 담았다. 지도 디자이너를 따로 채용해 골목 하나하나 찾아보기 쉽게 다시 그렸다. <올라! 쿠바> 1쇄는 1000부를 찍을 예정이다. 인쇄에 필요한 돈은 텀블벅을 통해 충당했다.

쿠바 친구들은 홍씨를 ‘나오미’라고 부른다. 쿠바인들이 한글 이름을 어려워해서 홍씨가 선택한 이름이다. 이름에 담긴 ‘나의 기쁨’이라는 뜻이 좋았다. 오는 9월 홍씨는 일곱 번째로 쿠바에 간다. 언젠가는 쿠바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한국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게 홍씨의 꿈이다.

 

ⓒ시사IN 조남진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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