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평화운동의 역사는 길지 않다. 연구자들은 대부분 1990년대 중·후반을 시작으로 보는데, 이렇게 20년이 안 되는 한국 평화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체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이하 ‘평박’)라고 할 것이다.

평박은 1999년 한국군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가 공론화되면서 출발했다. 2000년 위안부 피해자 문명금·김옥주 할머니가 베트남에서 일어난 만행을 ‘사과’하며 ‘한·베 평화역사관 건립기금’에 써달라며 7000만원을 기탁했고, 이를 종잣돈으로 삼아 2003년 설립되었다. 이후 평박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탈핵·원폭 피해자 지원, 평화 관련 전시·교육 등 대중 단체로서 활동을 개척해나갔다.

특히 평박이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에서 시작해 이 문제를 이어갔다는 것의 의미는 상당하다. ‘평화’라는 상태는 폭력에 대한 사유와 성찰이 가능한 때다. 자신을 폭력의 가해자 자리에 세울 수 있을 때, 기꺼이 그 자리에서 온전한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평화는 가능하다. 그래서 최근 여성혐오 범죄 논의에 ‘남성을 가해자 취급해서 불편하다’는 반응은 폭력에 대한 무사유 그 자체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의 공론화는 가해자로서 자리를 만들어냈던 평화운동의 결정적 사건이고, 그 한가운데 평박이 있었다.

평화활동가 개인을 꼽자면 단연 한홍구 교수이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양심적 병역거부, 과거 국가폭력 청산 등 2000년대 평화운동 쟁점에 늘 그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낯설던 ‘군사주의’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왕성한 강연과 저술을 하여 지식인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했다. 그랬던 평박과 한홍구 교수였다. 10년간 회원으로 있으면서 늘 평박의 존재와 활동을 자랑스러워했다. 한홍구 교수를 보며 실천하는 지식인의 전형을 그려보기도 했다. 평화운동에 이런 ‘어른’이 있다는 사실이 고맙고 또 든든했다.

2014년 1월 당시 평박 사무처 활동가 6명은 한홍구 교수와의 갈등으로 평박을 떠났다. 짧게는 1년, 길게는 7년 가까이 평박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평화박물관을 포함해 시민사회단체 어디에서도 저희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사퇴한 것이다. 활동가들은 한홍구 교수의 평박 사유화를 지적하며, 평박 내 민주주의가 훼손되었다고 외쳤지만, 한홍구 교수는 이 외침에 공식적으로 답변하지 않았다. 비판하기엔 너무 큰 힘을 가진 한홍구 교수였기에, 활동가들의 문제 제기는 언론에 보도되지도, 시민사회 안에서 제대로 논의되지도 않았다. 평박은 새로운 활동가들을 뽑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활동을 이어갔다.

일부 이사 사퇴하고 남은 이사들은 사무처를 폐쇄한 상태

2016년 지금 또다시 평박에서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이사들까지 사퇴를 이어간다. “오늘 민주주의 실체여야 할 평화단체에 한 줌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고 청년 노동자들에게 갑질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야말로 바로 반헌법 행위임을 정녕 모른단 말입니까?” 평박 이사에서 사퇴한 장혜옥 전교조 전 위원장의 글이다. 한홍구 교수는 사실관계를 내세우며 반박하고 있으나, 뜻을 같이했던 많은 이들이 이미 한홍구 교수의 독선이 단체를 망가뜨렸다고 지적한다.

평화는 자신을 가해자의 자리에 세울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 다칠 수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런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 그게 평화박물관의 시작이었다고 믿는다. 이번 평박 사태와 관련해 한홍구 교수가 쓴 글마다 확인되는 것은 무오류의 확신이다. 권력관계 속에서 자신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그게 폭력이다. 한국 평화운동의 역사가 이렇게 땅바닥에 내팽개쳐지고 있다. 남은 평박 이사들은 사무처를 폐쇄하고 평박 고유의 사업들도 사실상 종료시켰다.

기자명 임재성 (평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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