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았던 손님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카페 한편에 자리 잡은 서가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기형도 시집 있습니까?” 서가의 주인이 긴 팔을 뻗어 시집을 건넸다. “매번 사야지, 하다 까먹고 지내면서 나이를 먹었는데… 드디어 이렇게 사네요.” 자리로 돌아가 시집을 들춰보던 그가 얼마 후 돌아와 다시 물었다. “한 권 더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주인이 답했다.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 그날, 회의를 하기 위해 카페에 들렀던 그 손님은 기형도와 심보선의 독자가 되었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역로 22-8, 3층. 파스텔뮤직이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 카페 파스텔이 들어선 곳이다. 카페만 있는 게 아니다. 카페 안에서는 문턱 없는 서점 두 곳이 이웃으로 지낸다. 한 곳은 독립 출판물을 주로 취급하는 프렌테이고, 또 한 곳은 6월7일 문을 연 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wit n cynical)’이다. 3평(9.9㎡) 남짓한 공간에 시집 1200여 권이 살갑게 몸을 맞대고 기다리는 곳이다. 많고 많은 책 중에 왜 하필 시집만 팔까. 간단하다. 서점 주인이 시인인 까닭이다.

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은 2008년 등단한 유희경 시인(36)이 ‘저지른’ 새로운 일이다. 그가 건넨 명함 뒷면에는 ‘창작집단 독, 작란 그리고 눈치우기. 시와 희곡을 씁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명함 앞면에는 위트앤시니컬을 영문으로 새긴 도장을 꾹 눌러 찍었다. 새로운 경력이 그렇게 한 줄 또 쌓였다. 위트앤시니컬이라는 서점 이름은 함께 시 잡지를 펴내는 ‘눈치우기’ 멤버들과의 대화 속에서 나왔다. 유 시인의 “위트 있는 시”라는 말을 하재연 시인이 ‘위트 앤 시니컬’로 잘못 들었던 덕분이다. 재치와 냉소가 동시에 있는 것이 시로구나, 서점 이름으로 적절할 듯했다.

대표나 사장이라는 말 대신 다른 말은 없을까 생각하다가 개업 전 SNS로 직함 공모를 했다. ‘시(詩)장’ ‘시(詩)형’ 등 여러 직함이 제안됐지만 결국에는 ‘유희왕’이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유희왕은 그의 이름과 비슷한 애니메이션 제목이다. “유희왕님, 이 시집을 사겠습니다”라고 말한 손님은 아직 없었지만, 유희왕 카드를 건네고 간 손님은 있었다.

“서점 주인 한가하다고 누가 그랬는지…(웃음). 덕분에 종일 시 생각만 해요. 여기에 시집밖에 없으니까. 물론 읽지는 못하고 책등만 보지만. 덕분에 시집 제목을 정말 많이 알게 됐어요. 제가 모르는 시집이 정말 많았더라고요. 얼마 전 권혁웅 시인이 왔는데, 제가 ‘형, 저 시 진짜 몰랐어요’라고 했어요.”

ⓒ시사IN 윤무영 140자 원고지 노트에 쓰인 마종기 시인의 ‘해변의 바람’.

시집 한 권을 팔면 약 2400원이 그의 몫으로 남는다. 한 달에 1000권을 팔아야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받았던 월급의 반 정도를 벌 수 있다. 말이 1000권이지, 몇 년에 걸쳐 쓴 시집 1쇄를 500부 찍는 시절이다. 그래도 예상보다 개업 첫 주 성적이 좋았다. ‘너무 많이 팔려서 늦게 온 분들은 헐렁한 서가를 보게 되면 어쩌나…’ 걱정 겸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개업 후 일주일 동안 매일 50권 정도를 꾸준히 팔았다. 우려와 달리 스테디셀러 시집만 나간 것도 아니었다. 공간 제약 때문에 재고를 쌓아둘 수 없어서 시집당 한두 권씩만 갖췄던 탓에 한가할 틈이 없었다.

그가 쓴 시집 <오늘 아침 단어>(2011, 문학과지성사)가 10쇄를 찍고, 그가 쓴 희곡이 무대에 오르는 동안에도 편집자로 살았다. 9년 동안 다른 사람의 책을 만들고 만지고 세상에 내놓는 시간을 보내며 한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심하게 떨어졌다 붙은 왼쪽 눈의 망막은 지금도 제 기능을 못한다. “평상시에는 잘 느끼지 못하다가 두 눈을 다 써야 하는 때가 와요. 이를테면 제 왼쪽에서 뭔가 불쑥 튀어나왔는데 제가 못 봐서 놀랐을 때 눈이 안 보인다는 걸 인지하죠. 다른 사람들은 두 눈을 모두 쓰니까 모르겠지만… 그럴 때 울적해지죠.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시처럼 착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시집 전문 서점

사표를 내고 쉬는 동안 ‘시집 전문 서점을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소문을 내고 다녔더니 도움이 따라왔다. 건너 알게 된 파스텔뮤직 이응민 대표가 공간을 내줄 테니 진짜로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손을 내밀었다. 이왕 한다면 “무조건 예쁘게” 만들고 싶었다. 시집을 훨씬 가치 있게 보이도록 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스튜디오 360플랜’이 공간을, 디자인수다 출판 브랜드 ‘아침달’이 BI(Brand Identity·브랜드 이미지 통합화 작업)를 도왔다.

ⓒ시사IN 윤무영 위트앤시니컬의 주인장 유희경 시인. 유 시인은 ‘예쁜’ 시집 서점을 만들고자 했다.

책등이 보이도록 꽂는 책꽂이가 기본이지만, 작은 공간 안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시집의 얼굴(표지)이 보이도록 비치할 수 있는 평매대였다. 인용할 때 주로 쓰는 괄호와 콤마는 위트앤시니컬 브랜드의 상징이다. 이를 이용해 평매대에 ‘(오, 늘) 서가’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 시인이 직접 매일 다른 콘셉트로 시집을 재배치한다. 시집 수천 권이 차별 없이 고루 독자들에게 닿게 하고 싶은 마음이다. 단 한 권의 시집만으로 서가를 채우는 예외적인 날도 있다. 6월16일에는 최승자 시인의 신간 <빈 배처럼 텅 비어>만 여러 권을 올려뒀다. ‘위대한 시인’에 대한 후배 시인의 헌정인 셈이다.

매대 앞에는 책상이 하나 놓였다. 필사 테이블로 누구나 앉아볼 수 있다. 시인 친구들이 가져다놓은 피규어와 꽃으로 꾸몄다. 이름하여 ‘시인의 책상’이다. 앞으로 매달 선정할 ‘이달의 시인’ 시집도 올려뒀다. 6월의 시인은 마종기다. 매년 6월이면 한국을 방문하는 시인에게 시를 위한 공간이 생겼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슬쩍 시작해 천천히 소문나기를 바랐다. 그러다 한 달에 1000권을 팔게 되면 보도자료를 뿌리고 기자회견도 해야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는데, 정말 사람이 모이고, 시집이 팔렸다. 이왕 엎질러진 물, 마음을 다해 흘러보려고 한다. 시인과 독자가 같은 서가에서 시집을 고르고, 책등 위로 마주친 손가락이 양보를 하고, 서서 또는 앉아서 시를 읽는, 그러다 시집을 탁 덮고 계산대로 오는 모습…. “뭉클하고 자꾸 웃음이 나왔어요.” 인터넷에서 할인가로 살 수 있는 시집을 굳이 찾아와 정가를 치르고 사가는 손님들을 보며 유 시인은 생각했다. 시가 착한 것만은 아닐 텐데, 어쩐지 ‘시처럼 착한’ 사람들이 온다고.

시집만큼 잘 팔리는 건 위트앤시니컬에서만 살 수 있는 ‘굿즈’다. 아침달과 컬래버레이션한 첫 번째 상품인 140자 원고지 노트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앞으로도 자체 제작 상품이 여럿 나올 예정인데, 다 제가 갖고 싶은 것들로만 준비했어요.”

물론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다. 유 시인은 위트앤시니컬의 유통기한을 2년으로 본다. 아무리 시집을 많이 팔아도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버틸 만큼 주어진 시간 동안 시와 관련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려 한다. 절판된 시집을 발굴해 조명하는 일도 그중 하나다. 소설가 성석제의 절판된 시집 두 권(<낯선 길에 묻다> <검은 암소의 천국>)을 얼마 전 들여놨다. 유 시인이 간절하게 찾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다른 시인이 기증해준 시집인데, 아직까지는 팔고 싶지 않아서 ‘비매품입니다’라는 문구를 붙여뒀다.

매주 목요일 저녁 8시에는 낭독회가 열린다. 5월 말에야 알린 6월 낭독회 입장권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팬미팅 같은 분위기는 지양했다. ‘시만 읽는’ 낭독회로 시인들은 온전히 두 시간을 너끈히 채운다. 시인들이 선정한 노래만 트는 ‘시인의 플레이리스트’도 비정기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