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레나타 살레츨(54) 미국 예시바 대학 교수가 6월8일 서강대학교 다산관에서 한국 독자들과 만났다. 촉박하게 잡힌 방한 일정 탓에 일주일 전에야 강연 일시를 알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50석 규모의 강의실이 가득 찼다. 특강을 준비한 후마니타스 출판사 측도 놀랐다. 신청자가 많아서 애초 섭외한 강의실보다 더 큰 강의실을 빌려야 했다. 이날 강연은 ‘자기계발 시대의 불안을 넘어’라는 주제로, 살레츨 교수가 현재 집필 중인 책 〈무지를 향한 열망(Passion for Ignorance, 가제)〉의 내용을 일부 소개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살레츨 교수는 마르크스주의와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계승한 ‘슬로베니아 학파’의 일원이다. 국내에 소개된 단독 저작으로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2003, 절판),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2014)와 〈불안들〉(2015)이 있다. 철학·사회학·법이론·범죄학을 넘나들며 현대 사회를 분석한다.

‘불안(Anxiety)과 부인(Denial)을 어떻게 정치적 실천으로 연결할 수 있을까’가 살레츨 저작들의 주요 질문이다. 살레츨 교수는 지난 5월17일 서울 강남역 부근에서 발생한 여성 살해 사건 역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 “이번 사건을 통해 여성의 신체에 대한 폭력을 종식시키는 것은 물론 사회적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었다’는 불안이 공유되고 확인됐다. 살해당한 여성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은 스스로 갖고 있던 딜레마를 이 사건을 통해 풀고자 하는 것이다.”

ⓒ시사IN 이명익

살레츨 교수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무지(Ignorance)에서 커다란 위안을 찾고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사회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그 두려움이 앎에 대해 눈을 감게 만든다는 의미다. 사람들이 사회적 불평등에 눈감아버리게 되는 배경에는 ‘선택 이데올로기’가 있다.

2014년 TED 강연에서 살레츨 교수가 한 당부는 지금 한국 사회에도 유효한 말이다. “우리는 사회를 비판하기보다는 점점 더 자기 자신을 비판하는 데 열중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곤 한다. 우리는 자기 개인을 위한 선택에는 많은 시간을 쏟으면서도 함께할 수 있는 ‘공동의 선택’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보지 않는다. 선택이 항상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개인적인 변화도 가능하지만, 사회적 변화도 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변화를 만들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가능성의 공간이 지금, 한국에 열려 있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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