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를 시작한 건 우연이었다. 미대를 졸업하고 눈에 보이는 공모전마다 응모했다. 단편 만화 공모전도 그중 하나였다. 집에서 한숨 쉬는 일밖에 할 게 없는 백수가 한숨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풍력발전소에 취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날도 한숨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상상을 하던 나날 중 하루였다. 박윤선씨는 김대중 새만화책 출판사 공동발행인의 전화를 받았다. 단편집을 내보자는 그의 제안을 덜컥 수락했다. “정말 할 일이 없었고, 뭘 해야 할지도 몰랐던 때여서 단편집이라도 있으면 포트폴리오 삼아 일러스트 일감을 구할 수 있겠다 싶었다.”

생각처럼 쉽진 않았다. 책 한 권을 만들기까지 꼬박 5년이 걸렸다. 〈밤의 문이 열린다〉(새만화책, 2008)는 박씨의 20대가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마음껏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던 한 시절의 공기가 여백마다 오롯하다.

ⓒ박윤선 제공

한국에서의 삶에 점선 하나를 그은 것도 그즈음이다. 2007년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 놀러 갔다가 ‘작가의 집(La maison des auteurs)’이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작업실도 주고 집도 주는데, 자기 작업만 해도 되는 공간이 그곳에 있었다. 마침 프랑스어를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더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이듬해 박씨는 작가의 집에 입주했다. 그곳에서 박씨처럼 만화 그리기를 직업으로 삼은 프랑스인 남자친구를 만났고, 남자친구는 남편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고양이 세 마리의 집사가 되어서 한국에 가고 싶어도 못 움직이는 몸이 되었다(웃음).”

〈개인간의 모험〉(사계절)은 박씨가 한국에서 8년 만에 펴낸 만화책이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한국에서부터 구상했지만, 주변에 들려주면 반응이 좋지 않았다. 남편만은 달랐다. “이걸 왜 안 해?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줄 테니 해봐”라는 그의 응원이 없었으면 나오지 못했을 책이다. 프랑스어로 작업해 2013년 프랑스에서 먼저 출간됐는데, 애초 한국 출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국에서 낼 마음을 먹고 작업을 시작했으면 북한은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 같다. 내가 워낙 겁이 많아서….”

만화의 도시 앙굴렘에서 날아온 어떤 만화책

주인공 ‘무슈 김’(한국으로 치면 ‘김씨’)은 공무원 시험에 수차례 낙방한 끝에 개가 되기로 결심한다. 경찰견 역시 공무원이라는 이유였다. 백수 남편을 견디다 못한 보험설계사 아내 역시 훈련된 개가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를 허락한다. 외모의 변화는 없지만 무슈 김은 개가 되는 데 성공한다. 모두가 무슈 김을 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는 개·고양이·비둘기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이름이 널리 알려져 텔레비전에도 나온다. 종내에는 화합의 선물로 북한으로 보내지며 공무원의 꿈을 이룬다. 일견 황당한 줄거리이지만 무슈 김의 모험이 그저 엉뚱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 엉망진창인 세상에서 어떻게든 그럭저럭 삶을 굴려가고 있으니까. 그렇게 장면 곳곳에 박씨가 만화적 상상력으로 심어둔 거울이 사회를 빼꼼, 다정하게 비춘다.

박씨는 남편과 함께 번역도 한다. 〈불편하고 행복하게〉(우리나비, 2015), 〈예쁜 여자〉 (미메시스, 2014), 〈나쁜 친구〉(창비, 2012) 같은 한국 만화책이 박씨와 남편의 손을 거쳐 프랑스에 소개됐다. 하지만 역시 주업은 만화를 그리는 일이다. 언젠가 바닥을 드러내지 않을까 초조해하는 박씨 옆에서 남편은 〈개인간의 모험〉 작업을 독려했던 그때처럼 태연하게 말하곤 한다. “그릴 수 있을 때 그냥 그려”라고. 인구 4만명인 작은 도시 앙굴렘은 박씨에게 삶의 여유를 선물했다. 마당에 심은 작물 중에 마음대로 되는 건 없지만 말이다. “감자는 늘 잘 자랐기 때문에 요즘은 감자에 모든 희망을 걸며 지내고 있다. 딸기도 심었는데 민달팽이가 다 먹었다(웃음).”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