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미국 현대 정치사에 가장 위험한 후보’라 낙인이 찍힌 인물이 백악관을 차지한다? 공화당 대선 후보 자리를 사실상 차지한 도널드 트럼프(70)가 본선 승리의 자신감을 비치는 가운데 많은 미국인들이 설마 하던 ‘트럼프 공화국’의 출현 가능성을 점차 심각히 받아들이고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도 상대인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에 비해 10%포인트 이상 뒤지던 트럼프의 지지율이 최근 오차범위 내로 줄었거나 앞서기 시작하면서다.

지난 5월22일 〈워싱턴 포스트〉와 ABC 뉴스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46%, 클린턴은 44%로 오차범위 내 접전을 기록했다. 지난 3월 조사 때 클린턴이 그를 11%포인트 따돌렸을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약진이다. 같은 날 공개된 〈월스트리트 저널〉과 NBC 뉴스의 조사에서는 클린턴 46%, 트럼프 43%였다. 역시 지난 4월 조사 때 클린턴 50%, 트럼프 39%였던 것에 비하면 상당한 추격세다.

물론 5월의 지지율을 근거로 11월 대선 승자를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때 트럼프에 압도적으로 부정적이던 많은 유권자가 점차 그를 우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신호는 분명히 감지된다. 클린턴 측은 지금쯤이면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거부하고 클린턴 지지로 돌아서리라 예상했는데 실상은 다르게 나타났다. 클린턴 선거본부 유세담당 책임자인 로비 무크는 최근 지지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5월 선거모금액이 4월보다 떨어졌다며 SOS를 보냈다. 그는 이메일에서 “트럼프가 사실상 공화당 대선 주자로 확정된 지 3주가 지났지만 모금액이 늘지 않았다”라고 썼다.  

ⓒAP Photo트럼프의 지지율은 최근 힐러리 클린턴과 오차범위 내 접전을 보이고 있다. 지난 5월25일 애너하임 유세장에서 트럼프에게 몰린 지지자들.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절 국가기밀이 담긴 문건을 자신의 개인 이메일로 다룬 일 때문에 기소 위기에 처한 점도 트럼프에게는 호재다. 국무부 감사관실은 최근 의회에 제출한 감사보고서에서 클린턴이 장관 시절 개인 메일 서버를 만들어 연방정부 규정을 어겼다는 ‘위법 판정’을 내렸다. 연방수사국(FBI)이 클린턴을 기소할 경우 클린턴의 대선 행보가 휘청거릴 수도 있다. 유력한 보수 시민단체인 ‘사법감시단(Judicial Watch)’은 워싱턴 DC 연방지방법원에 클린턴 이메일 사건과 관련한 소송을 냈고, 이 과정에서 셰릴 밀스 전 국무장관 비서실장을 비롯한 클린턴 최측근 인사들이 법원에 관련 증언을 마쳤거나 증언할 예정이다. 게다가 클린턴의 라이벌인 버니 샌더스 후보에 대한 젊은 유권자층과 진보적 무당파 유권자들의 지지가 여전해서 민주당이 클린턴을 중심으로 단합하지 못한 채 지리멸렬한 것도 트럼프에게는 호재다.  

그러나 대다수 정치 분석가들은 트럼프의 대선 가도에는 여전히 난관이 적지 않다고 본다. CNN이 최근 공화당 선거 전략가 10여 명과 여론조사 전문가, 전직 및 현직 관리들을 접촉한 결과 이들은 트럼프의 걸림돌로 버지니아·오하이오·플로리다·콜로라도 주 등 격전지에서의 승리 여부, 여성과 소수계 유권자들을 등 돌리게 한 과격 발언과 과격 이미지의 탈피 여부, 클린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확산 여부를 꼽았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과제다.  

트럼프는 유세 과정 내내 반이민, 인종차별 및 성차별적 발언을 일삼아 흑인과 아시아계, 히스패닉 등 소수계 유권자들과 여성 유권자들의 신뢰를 잃은 지 오래다. 격전지 가운데 하나인 버지니아 주의 경우 이미 아시아계를 포함한 소수 유권자들이 전체 유권자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콜로라도 주도 히스패닉 인구가 상당하다. 트럼프가 지지층 외연을 확대하려면 각종 막말과 당 정강과 원칙에 위배된 정책 공약을 줄줄이 취소하거나 수정해야 하지만 그럴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는 ‘반정치’의 예술을 마스터했다”

누가 봐도 대선 고지가 험난하지만 트럼프는 여전히 여유만만하다. 왜 그럴까? 정치 분석가들은 클린턴의 정치적 악재 외에 몇 가지 다른 요인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트럼프가 최근 대선 후보로 낙점되면서 그를 중심으로 단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공화당 지도부에서 점차 커지고 있다.

나아가 제조업이 몰려 있는 중서부와 동북부 여러 주의 유권자들에게 일자리 약속을 강조해온 트럼프의 메시지가 통했다고 본다. 그가 자유무역협정은 물론 중국 등 해외에 생산기지를 둔 미국 회사들을 비판하며 반무역주의자를 자처하자, 격전지 오하이오·미시간·펜실베이니아 등 공장지대가 밀집한 주의 노동자들이 적극 반기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정치 분석가들은 또한 트럼프가 그토록 비난받아온 언행이 실은 핵심 지지층이라 할 수 있는, 교육 수준이 비교적 낮은 백인 노동자들에게 크게 먹히고 있다고 본다.

트럼프가 당파주의와 이념 갈등에 빠진 워싱턴 중앙정치와 정치인들을 싸잡아 비난하며 ‘새 정치’를 이뤄내겠다는 메시지도 정치에 염증을 느껴온 많은 유권자, 특히 무당파 유권자에게 잘 통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1990년대 초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캘리포니아 대학 정책대학원 교수는 최근 지역 매체 〈볼티모어 선〉 기고문에서 “트럼프가 떠오른 것은 일종의 ‘새 정치’를 시사한다. 이를 ‘반정치’라고 불러도 좋다. 트럼프는 일반 대중이 정치를 혐오하는 시점에 ‘반정치’의 예술을 마스터했다”라면서 트럼프의 본선 승리를 예측했다. 이런 ‘반정치’ 시대에는 국민에게 지탄받아온 기성 정치권에 속하는 후보가 불리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클린턴의 최대 약점이라고 라이시는 주장한다. 실제로 트럼프의 ‘반정치’ 전략은 2008년 대선 때 ‘희망과 변화’를 약속하며 냉소적인 유권자들을 대거 투표장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 버락 오바마의 선거 전략에 버금가는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요즘 들어 정치 분석가들 사이에 부쩍 대두되고 있는 ‘트럼프 과소평가’의 위험성이다. 트럼프는 지난해 6월 대선 출마 선언 직후부터 최근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낙점되기까지 공화당 주류와 언론, 정치 분석가들로부터 과소평가됐는데 실상은 정반대로 나타난 것이다. 공화당 주류 세력은 트럼프 낙마운동이 실패하자 그와 경선하던 테드 크루즈, 존 케이식 후보를 끝까지 경선에 참여시켜 7월 전당대회 때 ‘중재 전당대회’로 트럼프를 퇴출시킬 계획까지 세웠다가 실패했다. 이 역시 트럼프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사례다.

영국 유력지 〈인디펜던트〉 칼럼니스트 앤드루 맥레어드는 “지금도 미국 언론은 ‘트럼프가 자신의 세금 문제 때문에, 혹은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끌어내지 못해서, 샌더스든 클린턴이든 그를 패배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트럼프를 계속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런 과소평가가 계속되는 한 올해 대선은 트럼프의 압승으로 끝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백악관 대변인을 지낸 애리 플라이셔도 CNN과 인터뷰하면서 “지난 30~40년 동안 우리가 정치를 하면서 터득한 모든 게 이번 대선에서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다. 내년 1월20일 대통령 집무실에 트럼프가 앉아 있다고 놀라선 안 된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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