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3월 〈시사저널〉에 한 미국 기자가 3주에 걸쳐 커버스토리를 게재했다. “미국, 광주 학살 ‘방조·승인’했다.” 기자의 이름은 팀 셔록(64). 당시 미국 일간지 〈저널 오브 커머스〉 소속 기자로, 4년에 걸친 취재 끝에 이른바 ‘체로키 파일’을 공개했다.

‘체로키 파일’은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후 주한 미국 대사관과 미국 정부가 주고받은 비밀 전문을 뜻한다. 미국은 1989년 국무부 백서(White Paper)를 통해 “5·18은 한국인이 한국인을 죽인 사건이다. 미국은 당시 사건에 대해 도덕적 책임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팀 셔록 기자가 공개한 체로키 파일에서, 미국은 1980년 비상계엄에 찬성하고 신군부의 무력 동원을 묵인 내지 승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신군부가 광주로 특전사(공수부대)를 이동 배치한 것도 미국이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

민완 기자 팀 셔록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의 민낯을 폭로한 지 20년이 지났다. 그사이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방인의 눈에도 뒷걸음질 쳤다. 본인이 경험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1일, 그는 미국의 정치 주간지 〈더 네이션〉 인터넷판에 “한국에서 독재자의 딸이 노동자를 억압하고 있다(In South Korea, a Dictator’s Daughter Cracks Down on Labor)”라는 기사를 실었다. 기사가 나간 직후, 뉴욕 한국총영사관 쪽은 〈더 네이션〉 편집장에게 ‘코리안 스타일’로 수차례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시사IN 조남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두고도 북한 연계설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정부는 5·18 공식 기념·추모식장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올해도 불허했다. 게다가 전두환씨는 최근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광주와 나는 관계가 없다”라고 말했다.

광주의 진실에 매달렸던 팀 셔록은 오늘의 광주와 한국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광주광역시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팀 셔록을 5월25일 만났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36주기 기념식에 참석했다.
1980년 5·18 당시 광주 현장을 취재했던 브래들리 마틴(당시 〈더 볼티모어 선〉 기자), 노먼 소프(당시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 도널드 커크(당시 〈시카고 트리뷴〉 기자)와 함께 초청받았다. 기념식에서 박승춘 보훈처장이 쫓겨나는 장면도 직접 목격했다. 공식 행사보다 전야제가 더 기억난다. 광주시 금남로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여기서 참가자들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행진했다. 일부에서는 이 노래가 북한과 연계되어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지만, 전야제에서 시민들은 이 노래를 확신에 찬 모습으로 불렀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아는가?
가사를 쓴 사람(황석영 작가)이 북한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북한과 관계가 있다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국가보훈처 등 박근혜 정부에서 일하는 일부 사람들과 보수 우익 세력이 광주 정신을 폄훼하고 모독하기 위해서 그런 주장을 펼치는 것 같다.

ⓒ연합뉴스5·18 당시 광주의 상황을 취재해 세계에 알린 외신 기자 팀 셔록, 브래들리 마틴, 노먼 소프, 도널드 커크(왼쪽부터)가 지난 5월16일 광주를 찾았다.

1996년에 공개한 ‘체로키 파일’은 어떤 계기로 취재를 시작했나?
어릴 때 서울에서 살았다. 이후에도 한국은 늘 내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가졌다. 1981년과 1985년 두 차례 광주를 찾아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취재를 했다. 1988년 한국 국회는 광주 청문회를 열어 1980년 당시 주한 미국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과 전 한·미 연합군사령관 존 위컴의 증언을 요청했다. 미국 정부는 증언을 거부했고, 대신 국무부가 5·18 백서를 제출했다. 이 백서의 내용에 의구심이 들었다. 백서에는 미국 정부가 5·18 당시 특전사(공수부대) 이동을 몰랐다는 등 신군부의 시민 학살과 미국은 무관하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내가 확보한 내부 전문을 보면, 신군부의 움직임과 미국 정부는 무관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공수부대가 광주로 이동한 것에 대해 사전에 모두 알고 있었다.

실제 자료를 확보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나는 국무부 백서의 근거 자료를 추적했다. 1991년부터 국무부나 국가안보국 등 기관별로 문서를 일일이 따로 청구했다. 각각 문서의 기밀 해제 기간이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관련 문서를 확보한 뒤에 정리하고 분석했다. 1995년 확보된 문서를 퍼즐 맞추듯이 종합 분석해보니, 전체 맥락과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먼저 그 내용을 〈저널 오브 커머스〉에 실었다. 한국에서도 이 기사가 꼭 읽히길 바랐다.

지난해 12월 <더 네이션> 인터넷판에 박근혜 정부 비판 기사가 올랐다.

당시 기사의 반향은 어땠나?
내 기사가 나가고 나서 중요한 책 두 권이 나왔다. 돈 오버도퍼가 쓴 〈두 개의 한국(Two Koreas)〉과 찰머스 존슨이 쓴 〈블로우백(Blowback)〉이라는 책이다. 돈 오버도퍼는 기사가 나가자마자 관련 문서를 달라고 했고, 찰머스 존슨의 책에도 내가 공개한 내부 문건의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 이 보도가 역사학자나 전문가들이 당시 미국의 역할에 대해 시각을 달리하고 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 시민들에게도 한·미 관계에 대한 기존 시각을 되돌아보게 하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 한국 민주화와 민주주의에 조금이나마 기여한 것이 자랑스럽다.

미국 국무부는 왜 백서에 “광주민주화운동과 미국은 상관이 없다”라고 기술했을까?
백서 제1 저자인 존 메릴은 제주 4·3항쟁 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한국 전문가다. 이런 전문가가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는 미국인으로서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특히 광주에 대해 미국의 책임이 가벼운 것처럼 얘기하거나 한국인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가 담긴 전문을 찾아내면서, 미국 시민으로서 미국 정부의 진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는가?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민주화에도 기여했다. 실제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가장 중요한 것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냉전 시대에 미국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렸다는 점이다. 미국이 지원한 군사정권이나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위해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싸운 유일한 사례다. 위컴 전 한·미 연합군사령관이 “한국 사람들은 들쥐(lemming)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지 간에 추종하기만 한다”라고 말했는데, 5·18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생각하는 미국 관리들이 많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미국인들의 이런 고정관념을 완벽하게 깨뜨렸다.
전두환씨가 최근 한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광주 발포와 나는 아무 관련이 없다”라고 했다.
거짓말이다. 1980년 당시 광주 현장을 취재한 브래들리 마틴과 이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마틴은 “전두환씨는 그냥 멍청한(idiot) 사람 같다. 아주 기회주의적이다”라고 평가했다. 나나 마틴이나 전두환 정권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알고 있다.

지난해 12월 〈더 네이션〉에 박근혜 정부 비판 기사를 써서 뉴욕 한국총영사관에게 항의를 받았는데?
매우 놀랐다. 왜 미국 언론에 나온 기사에 대해 한국 외교 당국이 항의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네이션〉은 151년 전통을 자랑하는 권위 있는 잡지다. 물론 나는 미국인이고 미국 언론인이기 때문에 무슨 해코지를 하겠냐만, 실제로 위협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기사에서 쓴 ‘독재자의 딸(Dictator’s daughter)’이라는 표현이 한국 정부 관계자들을 화나게 한 것 같다. 그러나 이 표현은 엄연한 사실이다. (기사에서 다룬) 11월14일 민중총궐기는 노동 개악을 반대하기 위해 시민들이 항의하러 거리로 나온 것인데, 만약 노동법이 개악되고 쉬운 해고가 허용됐다면 한국의 노동운동은 상당히 어려움에 처했을 것이다.

그 시위에 참여했다가 중태에 빠진 백남기씨도 면회했다던데?
직접 서울대 중환자실을 방문해 백남기씨를 면회했다.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병상에 누워 있는 그를 보니 매우 슬펐다. 이 사건은 정부의 과잉 대응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물대포와 최루가스를 남용한 부분이 이해되지 않고, 박근혜 정부가 무엇이 두려워서 그런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국경 없는 기자회(RSF)’가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에서 한국은 10년 사이 70위로 떨어졌다.
한국 저널리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미국 상황만 살펴보자면, 최근 오바마 정부에서 내부고발자에 대한 탄압이 급증해 저널리즘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도 3년 전 국가안보국(NSA) 고위급이었던 내부고발자를 취재원으로 만났는데, 이 내부고발자는 기소되었고, 지금은 쫓겨나 애플스토어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 언론 상황을 모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사건이 있다. 얼마 전 한국의 한 언론에서 로렌스 펙이라는 미국인의 주장을 받아 ‘위민 크로스(Women Cross) DMZ’라는 단체가 뉴욕의 북한 외교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이 기사는 엉터리다. 이 기사 이후 ‘위민 크로스 DMZ’를 조직한 크리스틴 안의 한국 방문이 취소됐다. 로렌스 펙은 북한과 대화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모조리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이는 인물이다. 어떤 팩트 체크도 없이, 심지어 크리스틴 안에게 연락도 하지 않은 채 이 기사를 싣는 것은 최악의 언론 오용이다.

미국 정보기관도 당신의 주요 취재 대상이다. 2008년에는 미국 정보기관의 민간 외주 용역을 다룬 〈Spies For Hire〉도 출간하기도 했다.
정보기관은 취재가 쉽지 않은 비밀스러운 기관이다. 과거에 저지른 불미스러운 과오도 많다. 1970년대 NSA에 대한 폭로 내용을 보자. 애초 NSA는 해외 정보만 다루게 되어 있지만 당시 마틴 루서 킹 목사 등 반체제 인사를 감시하고 감청했다. 이후 국내 정보는 다루지 못하게 법을 개정했는데, 9·11 이후 부시 행정부는 모든 견제장치를 다 폐기했다. 최근에는 정보기관이 인터넷 회사로부터 메타 데이터 등을 덩어리째 가져올 수 있다. 나는 어떠한 정보기관도 신뢰하지 않고, 의심하고 감시하고자 한다.

한국에서도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하기도 했다.
알고 있다. 2013년 7월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국정원 댓글 공작 사건에 반대하는 시위를 목격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미국에서는 최근 NSA 같은 정보기관이 민간 정보회사에 외주를 주어 정보 분석이나 군사 정보 분석을 맡기고 있다. 국가와 민간 정보회사를 함께 봐야 한다. 이들은 한 몸이나 다름없다. 정보기관과 민간 정보회사 사이 커넥션을 의회가 감시·감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 미국 의회는 얼마나 많은 민간 정보회사들이 국가 정보기관과 계약을 맺고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다.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한반도 정책도 영향을 받는데?
힐러리 클린턴은 대북 강경파다. 오바마와 유사한 대북 노선을 지향한다.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다면 북·미 직접 협상은 없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한반도 정책은 전혀 예상이 안 된다. 대선 레이스는, 클린턴을 싫어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투표를 안 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클린턴이 매우 뛰어난 토론자(Good Debater)라서 후보자 간 TV 토론이 펼쳐지면 트럼프를 압도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포함해 대다수 미국 저널리스트들이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가 되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듯, 두 후보가 본선에서 박빙의 승부를 펼칠 가능성도 높다.

통역:정의당 박원석 의원실 조태근 비서관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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