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전개였다.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촉발된 ‘여성혐오를 멈춰라’라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남성혐오’라는 말과 맞닥뜨렸다. 자, 우선 아무 종이나 한 장 꺼내보자. 반으로 접는다. 한쪽에는 남성혐오, 한쪽에는 여성혐오를 적고 각 사례를 채워보자. 남성이 느끼는 혐오라는 단어에 대한 불쾌함(“난 잠재적 가해자 아닌데”)은 여성이 직면한 생명에 대한 위협(“살아남았다”)과 동등한 위치에 놓을 수 있는 무엇인가. “가해자는 피해자가 받은 타격을 언제나 과소평가하려고 한다”(〈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은행나무, 2012).

“남녀 편 갈라서 싸우지 말자”라는 언뜻 ‘중립적’으로 보이는 말도 마찬가지다. 가해자가 남성이고 피해자가 여성이었으며, 그것이 ‘범죄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는 점을 간과하기 쉽다. ‘좋은 게 좋은 거다’ ‘기존 질서에 순응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를까. 그 기존 질서가 바로 여성혐오라는 건 짐짓 모른 체하면서.

ⓒ시사IN 이명익5월26일 ‘거울 행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침묵 시위를 한 뒤 강남역 방향으로 행진을 하고 있다.

여성혐오, 즉 영어 단어 ‘misogyny’에 대한 번역이 이 같은 ‘성 대결’을 불러왔다는 주장도 있다. 김수아 교수(서울대 기초교육원)는 묻는다. “여성혐오라는 말을 뭐라고 바꾸면 동의할까요? 여성혐오를 어떤 단어로 바꿀까요? ‘여성 멸시’로 바꿔도 ‘나는 엄마를 존경하는데’라고 할걸요?”

여성들은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조심하라’는 당부를 듣고 자란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다 자기가 조심하지 않아서 초래된 결과다. “나 때문일까”라며 스스로 먼저 자책하고, “좀 조심하지”라는 타인의 말을 들으며 ‘내 잘못’으로 단정 짓는다. 그러나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사고는 생긴다.

5월17일 한 여성이 죽었다. 서울에서도 가장 번화한 강남 한복판에서. CCTV가 많은 곳이고, 친구와 함께 있었으며, 그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려고 했던 사람이 ‘여자라서’ 죽었다. “안전한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피의자는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며 남자 6명을 보내고 일곱 번째로 들어온 여성을 흉기로 죽였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시사IN 이명익5월26일 서울 강남역에서 영정 액자 모양의 거울을 든 시민들이 모여 ‘거울 행동’이라는 행사를 열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비추어보라는 뜻이다.

이 사건이 여성들에게 준 첫 번째 공포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경찰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정신질환 범죄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여성들은 피해자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게 나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몰카 찍지 말자, 데이트폭력 하지 말자를 넘어 ‘죽이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성은 이 사건을 통해 내 어머니, 여자 형제, 이성 친구의 안위를 걱정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안위까지는 걱정하지 않는다. 더는 ‘착한 남성’이 여성을 ‘지켜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를 뒤덮은 쪽지는 “살아남았다”라는 무수한 증언이 모이는 현장이 되었다. 수많은 여성들이 이 사건에 목소리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고통 자체도 상처지만, 말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상처다. 그래서 말한다는 것은 묘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개입하고 헌신(commitment)하는 실천이다”(〈페미니즘의 도전〉 교양인, 2005). 여성 각자가 겪어온 무수한 성차별과 성폭력이 특수한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매우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사실이 그제야 새롭게 조명받았다.

‘나였을지도 모른다’라는 실존의 공포가 지나간 자리에는 두 번째 공포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성혐오라는 ‘젠더 이슈’를 일상의 자리에서 꺼내놓기 위해 어떤 여성들은 관계의 단절까지 결심해야 했다. ‘여성혐오’가 리트머스지가 되자 각종 이별담이 커뮤니티를 달궜다. ‘내 문제’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들도 SNS에 오르내렸다. 이 역시 ‘말의 권력’이 남성에게 기울어져 있으며 평등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가정에서 혹은 회사에서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한 이들이 가장 많이 만난 반응은 냉소였다. 이런 여성이 유난한 걸까?

이 사건을 두고 벌어지는 이런 ‘호들갑’이 ‘사건을 키운다’라는 반응도 있다. 남녀 갈등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씨는 “사회적 약자는 자신을 억압하는 상황이나 사람을 만났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쉬운데 이건 너무나 당연하다”라고 말한다. 흔히 남성적이라 여겨지는 이성이 정적이고 위계적이라면, 여성적이라 쉽게 규정되는 감정은 움직이고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쿨’함은 지배 규범과의 일치 속에서만 가능하다”(〈페미니즘의 도전〉).

ⓒ시사IN 조남진5월26일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강남역 살인사건’과 관련해 긴급 집담회가 열렸다.

여성혐오는 살인이나 물리적 폭력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여성혐오를 한 적이 없다’라는 말은 ‘여성혐오가 무엇인지 모른다’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가수 오지은씨가 트위터를 통해 제안하고 여러 트위터 유저들이 덧붙인 ‘여성혐오 진단표’를 보자.

“여자에게 지시를 받으면 왠지 기분 나쁘다, 밥은 여자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공간 지각력이 떨어져서 운전을 못한다, 여자에게는 큰일을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말머리마다 ‘여자는’을 시도 때도 없이 붙인다, 그래도 애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 여자가 (섹스를) 밝히면 좀 그렇다, 여자는 뭘 몰라야 매력 있다, 여자는 감정적이라 이성적인 판단을 못한다, 기가 센 여자는 별로다, 여자들 사이에 진정한 우정은 없다….”

당신은 몇 개나 해당하는가. 그렇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여성혐오를 한다. 일본의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는 책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여성혐오 사회에 태어나 자라면서 여성혐오를 신체화하지 않은 여성은 없으며 페미니스트란 스스로의 여성혐오를 자각하고 그것과 싸우려는 이를 가리킨다”라고 말한다.

우에노 지즈코는 가부장제를 ‘여성과 아이의 소속을 정하는 룰’이라고 정의한다. 가부장제 사회는 일반적으로 남아를 선호하는데 이렇게 특정 성별을 선호하는 사회에서는 태어남과 동시에 성별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달라지며, 이 때문에 여아를 선택적으로 낙태(성 감별 낙태)하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남성도 여성도 만연한 여성혐오의 자장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강남순 교수(미국 텍사스크리스천 대학 브라이트 신학대학원)는 여성혐오라는 개념에 두 가지 함의가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inferior being)라는 것. 둘째, 여성은 위험한 존재(dangerous being), 즉 남성을 유혹하여 타락하게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여성에 대한 인식은 노골적인 비하나 배제·증오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매우 은밀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회는 급격히 변하고 있지만, 여성을 대하는 이러한 방식과 태도는 여전히 굳건하다. 소수의 여성이 성공과 권력을 손에 쥐었다는 것이 가부장제의 사망(여성혐오의 종식)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저 몇몇 여성의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이는 이번 사건이 여성이라는 젠더 안에 속한 다양한 계급과 계층의 사람들을 다시 ‘여성’이라는 이름의 단일한 집단으로 묶어주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상식’을 만드는 싸움이 시작됐다

페미니스트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여성은 자신이 놓인 상황 때문에 ‘페미니스트’로 사회화될 가능성이 높다. 여성들은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나와 내 주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할 언어를 얻는다. “페미니즘에도 문제가 있고 결함이 있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시시각각 변하는 이 사회에서 중심을 갖고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다. 페미니즘은 서로 자기 말만 하려고 아우성치는 이 세상에서 내 작은 목소리가 중요하다는 믿음을 갖게 해주었다”(〈나쁜 페미니스트〉 사이행성, 2016). 미국의 여성운동가 벨 훅스 역시 “페미니즘 운동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결국은 우리가 과거의 삶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페미니즘이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사랑은 사치일까〉 현실문화, 2015)라고 말한다.

ⓒ시사IN 신선영‘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는 피해자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추모의 뜻을 담은 포스트잇이 붙고 국화꽃이 쌓였다.

페미니즘, 즉 여성주의를 ‘배운다’는 것은 세상의 절반인 여성이라는 동료 시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 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페미니즘의 도전〉)다.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창비, 2016)에서 페미니스트에 대해 아주 ‘쉽게’ 정의를 내린다. “남자든 여자든, 맞아, 오늘날의 젠더에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해야 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바로 페미니스트라고 저자는 정의한다.

느리지만 세상은 변한다.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페미니스트 비평가 손희정씨는 “여성 살해(femicide)는 이전에도 있었고, 앞으로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분명히 달라졌다”라고 말했다. 여성학자들은 이 사건을 대하는 여성들의 반응이 단순히 ‘공포’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바꾸겠다’라는 흐름으로 이어지는 지점을 주목한다. 보통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여성들은 공포심에 스스로를 단속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이런 ‘단속 메커니즘’이 처음으로 깨졌다. “지금까지 ‘남녀 성 대결’이 벌어지지 않고 평화로운 공존이 유지된 것처럼 보인 것은 여성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녀 갈등은 이미 있었지만 가시화되지 않았을 뿐이다. ‘떠드는 여성들’을 나무라는 상황이 이번 사건의 여성혐오적 성격을 완성한다.”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여성의 삶이 숫자나 통계상으로 개선되었다는 의견에는 잘못된 점이 없으나, 이 정도면 충분히 나아졌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 (중략) 우리가 더 이상 (젠더와 관련한)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노력하라. 변화에는 의도와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1990년대부터 페미니스트 운동을 해왔던 이들이 기억하는 변화의 장면이 있다. 당시에는 성폭력 사건에서 발생하는 ‘2차 가해’라는 개념을 이해시키는 일이 하나의 ‘투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2차 가해라는 개념이 일상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직장 내 성희롱이나 성폭력, 부부 강간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여성혐오에 대한 이번 싸움 역시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내는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본다.

“의심할 나위 없이 더 많은 여성들이 폭력적인 남자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것은 페미니즘 운동의 긍정적 결과다. 만약 여성이 가부장적 폭력을 거부하는 데 남자들이 격분해 여성을 더욱 혐오하게 되더라도 페미니즘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다”(〈사랑은 사치일까〉). 맨스플레인(Mansplain, man+explain)이 횡행하는 세상에 펨스플레인(Femsplain, feminist +explain), 즉 ‘여성의 말’이 필요한 때가 지금 한국에 도래했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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