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교과서나 참고서를 비롯한 학습서를 빼놓으면 한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 물론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은 되풀이해서 읽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그런 버릇을 들이지 못했어. 문학작품이든 인문학·사회과학 서적이든 그것들이 아무리 공인된 고전이라 하더라도 되풀이해서 읽은 적은 많지 않아. 물론 글을 쓰다가 인용하기 위해 확인하려고 책의 한두 대목을 다시 펼쳐보는 일은 흔히 있지만.

시집은 다르지. 고전이든 아니든, 내가 좋아하는 시집을 나는 거듭 읽어. 그건 그 시집들에 묶인 시들을 다 외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좋은 시를 읽을 때는 마치 그 시를 이루는 언어랑 섹스를 하는 느낌이어서, 일종의 ‘성욕’ 때문에 시를 다시 읽게 되는 것 같아.

세월이 쌓이면 입맛이 변하듯(나는 젊은 시절 설렁탕을 아주 좋아했는데 지금은 그 음식이 그리 당기지 않아. 반면 젊은 시절엔 시큰둥했던 생선초밥과 생선회를 요즘엔 아주 좋아해), 독서 취향도 변하는 듯해. 젊어선 시보다 소설을 더 즐겨 읽었는데, 요즘은 소설을 거의 읽지 않거든. 사실 젊어서 좋아했던 소설도 ‘고전’으로 꼽히는 순문학 작품이 아니라 장르소설이었어.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이라든가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아이작 아시모프 등의 과학소설 말이야. 그런데 장르소설 가운데도 환상소설에는 별로 손이 가지 않았어. 내 이성이 납득할 만하게 결말이 이뤄지지 않는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뜻이야.

ⓒ이지영그림

추리소설과 과학소설에 빠져 있던 시절이 20대 중반부터 30대 말까지였는데, 묘하게도 이 소설들 중에서는 여러 차례 읽은 작품이 많아. 가령 나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중단편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읽은 것 같은데, 꽤 여러 편을 되풀이해서 읽곤 했어. 그런데 그 이유가 그 작품이 유난히 재미있어서가 아니었어. 어떤 뛰어난 소설가도 새로 쓰는 소설마다 완전히 새로운 플롯을 만들어내지는 못해.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 역시 열댓 권 읽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작가와 머리싸움을 하면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맞힐 수 있는 경우가 많아. 사실 그 재미로 추리소설을 읽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크리스티의 소설을 스무 권 넘게 읽다 보면, 이제 그의 어떤 소설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는 거야. 여하튼 내 경우는 그랬어. 이미 읽은 소설이라면 다시 읽지는 않았을 텐데,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가 가물가물하니까 안 읽은 소설로 여기고 또 읽는 거지. 그러다가 중간쯤 읽었을 때, 아, 이거 내가 이전에 읽은 작품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지. 그럴 때쯤이면 책을 집어던지는 게 아니라 그냥 끝까지 읽게 돼. 나처럼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은 사람에게 이로운 점 하나는 소설 한 권을 여러 번 즐길 수 있다는 거야.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비롯한 추리소설만이 아니라, 과학소설 가운데도 기억력이 모자라서 ‘내 뜻과 달리’ 여러 번 읽은 책들이 있어.

〈김수영 전집 2-산문〉김수영 지음민음사 펴냄

그런데 ‘다시 읽고 싶어서’ 여러 번 읽는 책이 내게는 두 권 있어. 오늘은 그 책들 얘기를 하려고 해. 첫째는 1981년 민음사에서 1쇄가 나온 〈김수영 전집 2-산문〉이야. 나는 김수영의 시도 좋아해서 전집 1로 묶인 그의 시들도 더러 펼쳐보지만, 산문 전집만큼 되풀이해서 읽지는 않았어. 이 책을 처음 읽은 게 35년 전인데, 그 35년 동안 이 책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아. 물론 두세 번까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어 나갔으니 몇 번 읽었네, 하고 짐작할 수 있지만, 그다음부터는 빈 시간에, 특히 잠자리에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가며 읽었으니 이 책을 정확히 몇 번 읽었다고 말하는 건 불가능하지. 모든 책이 그렇지만, 처음 읽을 때와 두 번째 읽을 때와 수십 번째 읽을 때의 느낌이 똑같지 않아.

좋은 텍스트는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다

다른 책의 예를 든다면 나는 조지 오웰의 〈1984〉를 10대에 처음 읽었고, 나중에 어른이 돼서 다시 읽었어. 두 번째 읽은 것은 그 소설의 단평을 쓰기 위해 의무적으로 읽은 거였어. 그런데 10대 때 읽은 〈1984〉의 충격이 감시 사회의 무서움이었다면, 나중에 어른이 돼 다시 읽은 〈1984〉의 충격은 어떤 사랑도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만큼 강하지는 못하다는 깨달음의 씁쓸함이었어. 나는 지금도 조지 오웰이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려 한 메시지가 전자 못지않게 후자인 것이 아닌가 생각해.

〈행복한 책읽기-김현 일기 1986~1989〉김현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

김수영의 산문들도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 그것은, 모든 좋은 텍스트는 여러 겹의 의미를 지녀서 해석의 지평을 크게 열어놓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똑같은 텍스트일지라도 독자들이 거기서 얻어내는 메시지는 저마다 다르다는 뜻이기도 할 거야. 김수영 산문 전집을 처음 읽은 게 스물세 살 때인데, 읽을 적마다 이 텍스트가 내게 조금씩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은 20대의 나와 30대, 40대, 50대의 내가 그 정체성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아주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겠지. 내가 변함에 따라 김수영 산문의 메시지도 달라진다는 거지. 처음 읽었을 때는 김수영 산문에서 드물지 않게 발견되는 오문이 마음에 무척 걸렸어. 그런데 되풀이해 읽어 나가면서 이 책에 묶인 글들이 쓰인 시기에 일반적이었을 울퉁불퉁한 한국어 문체를 생각하게 되고, 김수영이라는 사람이 한국어 문장보다는 일본어 문장에 더 익숙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게 되고, 무엇보다도 그 산문들이 나왔을 때 한국 문화의 가난함을 고려하게 되더군. 그러다 보니 이 책에 묶인 글들이 점점 좋아졌어. ‘시여, 침을 뱉어라’처럼 잘 알려진 산문만이 아니라, 이 책에 실린 글 모두가 잘났으면 잘난 대로, 못났으면 못난 대로 정이 가는 거야. 그것은 김수영 산문이 지닌 극도의 정직성 때문일 거야. 이 산문집에서 드러나는 김수영은 절대 겸손한 사람이 아니야. 자기가 잘난 것을 아는 사람이고, 저보다 못난 사람에게 면박을 줄 줄 아는 사람이지. 확실한 것은 김수영이 당대의 한국 문화를 훨씬 뛰어넘은 혜안을 가진 산문가였다는 사실이야.

내가 기꺼이 되풀이해서 읽는 또 한 책은 문학비평가 김현 전집의 제15권에 묶인 〈행복한 책읽기〉 부분이야. 1992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지. 이 〈행복한 책읽기〉는 그 부분만 따로 떼어내서 〈행복한 책읽기-김현 일기 1986~1989〉라는 표제로 지난해 말에 개정판이 나왔어. 개정판이라고는 하지만, 판형이 달라진 것일 뿐 내용은 그대로야. 김현이 작고한 해가 1990년이니까 〈행복한 책읽기〉는 김현 만년의 독서 일기라고 할 수 있지. 그렇지만 순수한 독서 일기는 아니야. 김현은 이 책 안에 그 시절 독서 체험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도 촘촘히 박아놓았어. 그래서 이 책은 김현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전기적 자료 역할도 할 수 있을 거야. 사실 그건 김수영 산문 전집도 마찬가지인 것이, 그 책 역시 텍스트에 대한 평가와 자기 일상을 버무려놓았거든.

김수영 산문 전집과 〈행복한 책 읽기〉를 견줘 읽다 보면, 처음에 들어오는 게 문체의 다름이야. 김현 산문의 문체가 김수영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세련됐다는 게 한눈에 들어와. 그러나 그것은 개인 김수영과 개인 김현의 차이 이상으로 김수영 세대와 김현 세대의 차이를 반영하는 걸 거야. 김수영과 김현의 나이 차는 스물하나. 김수영이 1921년생이고, 김현이 1942년생이지. 한국어 문체가 변한 속도는 그리도 빨랐던 거야.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를 읽다 보면 김현 역시 김수영처럼 당대의 한국 문화를 뛰어넘은 사람임을 알 수 있어. 언어랑 섹스를 하는 느낌은 주로 시를 읽을 때 생기는 법인데, 나는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를 읽을 때도 그래. 이리 말하고 보니 또 슬며시 ‘성욕’이 치밀어오르네그려.

기자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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