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부모의 그릇된 양육 탓인가? 지난 연말 미국 사회에서 큰 화제로 떠올랐던 ‘부자병’ 소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소년은 3년 전 만취 상태에서 차를 몰다 무고한 시민 4명을 희생시켰는데도 지난해 12월 고작 보호관찰 10년이란 판결을 받고 풀려나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진 바 있다. 이 소년이 그런 짓을 저지른 원인은 “부유한 가정에 태어난 탓에 절제할 줄 모르고 타인의 삶에 대한 존중이 부족해 생긴 ‘부자병’(affluenza) 때문”이라는 게 변호인의 주장이었는데, 이를 판사가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상식을 뛰어넘는 어처구니없는 판결에 공분한 대다수 미국인이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게 됐다. 보호관찰 규정을 어기고 지난해 12월 모친과 함께 멕시코로 도피했다가 올 1월 미국으로 압송된 범인 이선 카우치가 마침내 2년이란 실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사건 당시 열여섯 살 미성년이던 그는 지금은 열아홉 살로 어엿한 성인이다(미국 성년은 만 18세). 재판도 성인 자격으로 받았다. 그는 복역을 마친 뒤에도 10년 보호관찰을 받게 돼 있다. 이를 어길 경우 가혹한 징역형을 감수해야 한다. 이번 재판으로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지금 미국 사회는 미국판 ‘유전무죄’ 논란과 함께 ‘부자병’에 대한 관심이 달아오르고 있다.

ⓒAP Photo‘부자병’ 소년 이선 카우치는 미국에서 ‘유전무죄’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번 실형 판결로 대다수 미국인은 통쾌함을 느끼는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뒷맛은 개운치 않다. 모든 책임을 무조건 이선한테 뒤집어씌우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사건 초기만 해도 많은 미국인이 이선의 ‘부자병’에 초점을 맞춰 그를 격렬히 비난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그의 부모, 특히 마지막까지 아들을 무조건 감싸기만 한 모친에게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선이 저 지경까지 이른 건 결국 부모의 잘못된 양육이 주된 책임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럴까? 우선 이번 사건을 간단히 복기해보자. 이선이 텍사스 주 북부 포트워스 시에서 음주 교통사고(2013년 6월)를 일으키기 약 4개월 전의 일이다. 당시 16세이던 그는 텍사스 주 교외의 한 주차장에서 만취 상태로 노상 방뇨를 하다 경찰관에게 적발됐다. 그가 몰았던 픽업 트럭에서는 맥주와 보드카 상자가 널려 있는 가운데 나체 상태의 14세 여자아이가 발견됐다. 이선은 ‘미성년자 알코올 소지 및 음주’ 혐의로 벌금과 함께 6개월 보호관찰 명령을 받았다. 어머니 토냐는 만취한 이선을 어떤 질책도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데려갔다.

이런 어머니의 방임은 결국 아들의 또 다른 비극을 잉태했다. 이선은 4개월 뒤인 2013년 6월 월마트에서 훔친 맥주 등을 친구들과 함께 마신 뒤 잔뜩 취한 상태에서 픽업 트럭을 시속 113㎞(시속 65㎞로 속도가 제한된 구역이었다)로 몰다 도로변에 주차된 SUV 차량을 들이받았다.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은 끔찍한 사고였다. 그런데도 그는 사고 현장의 목격자들에게 “내가 바로 이선 카우치다. 이 정도 사건에서는 빠져나갈 수 있다”라며 허세를 부렸다. 사고 뒤 그는 검찰에 의해 ‘음주살인 혐의’로 기소돼 징역 20년 구형을 받았다. 하지만 진 보이드 판사는 그에게 실형 대신 보호관찰 10년 처분을 내려 검찰과 유가족은 물론 이 사건을 지켜보던 많은 미국인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보이드 판사는 “이런 사고가 일어난 부분적인 책임은 이선을 어릴 때부터 아무 절제 없이 방탕하게 키운 부모에게 있다. 결국 소년은 ‘부자병’의 희생자다”라는 변호인단의 논리를 수용한 것이다.

ⓒEPA이선의 어머니 토냐 카우치(가운데)는 아들을 방탕하게 키웠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텍사스 대학 사회학과 벤 애거 교수도 〈USA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의 경우 이선도 피해자다. 너무 유복해서 그런 짓을 벌였다기보다는 절제를 모르는 그의 행동이 빚은 결과다. 자식의 무모한 행동에 눈감아온 부모가 결국 책임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교사가 꾸짖자 아버지가 “학교를 사버리겠어!”

실제로 설득력 없는 주장은 아니다. 이선의 부모 역시 ‘사고뭉치’였기 때문이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부모가 저지른 전과를 합치면 교통속도 위반에서 폭력에 이르기까지 20여 건에 이른다. 아버지 프레드 카우치(50)는 고교 3학년 때 자신보다 13살 연상인 여성을 만나 결혼했다가 곧 이혼했다. 1983년 고교를 졸업한 그는 지붕공사 사업에 뛰어들어 종업원 40명에 연매출 1000만 달러의 중견기업으로 키워내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방탕하고 오만한 생활로 치달았고, 음주운전으로 걸리자 단속 경찰관에게 “당신이 1년 동안 버는 돈을 난 하루에 번다”라며 비꼴 정도였다. 프레드 카우치는 전처와 헤어진 뒤 자기 회사 직원이던 토냐(48)와 결혼해서 이선을 낳았다. 결혼 뒤 프레드 부부는 큼직한 수영장과 놀이터가 있는 호화 저택으로 이사했다.

이선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부모로부터 행동의 절제나 타인에 대한 존중 따위는 전혀 배우지 못했다. 이선은 13세 때 부친 프레드의 허락하에 차를 몰고 학교에 갔다가 담임교사에게 적발됐다. 학교에서 이의를 제기하자 아버지 프레드의 답변은 이랬다. “내가 학교를 사버리겠어!”

프레드 부부의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도 이선에겐 악몽이었을 것이다. 프레드는 여러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토냐에게는 폭력을 일삼았다. 토냐는 그런 남편에게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아들에게만 집착했다. 마약에도 손을 댔다. 법정 기록에 따르면, 이선은 만나기만 하면 소리를 지르고 싸워대는 부모 틈에서 정신적 방황을 겪었다. 결국 그는 일종의 도피처로 마약과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14세 때인 2011년 7월에는 술에 취해 실신한 적도 있다. 이런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은 16세 때 4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적인 음주 교통사고로 이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심리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점도 이선의 바로 이런 삭막한 가정환경이다.

아무튼 이선은 사고 3년 만에 죗값으로 실형을 살게 됐다. 그러나 파장이 만만치 않다. 일각에서는, 부자들이 법정에 선 자식들을 비호하기 위해 심리학자들을 증인으로 고용하면서 ‘부자병 판례’를 남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드렉셀 대학 법학과 대니얼 필러 교수는 〈USA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선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에선 부자들이 더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 더 좋은 재판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미 우리나라의 형사제도가 ‘부자병’에 시달리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미국 전역의 많은 판사가 이선에게 보호관찰 판결이 내려졌을 때 거센 분노를 표시한 바 있다. 미국 심리학회도 ‘부자병’을 정신질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부자병’이란 용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이었다. 당시 공영방송 PBS가 〈부자병〉이라는, 물질 만능주의의 사회적·환경적 피해를 파헤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던 것이다. 이후 부자병은 한동안 학자나 환경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어처럼 떠돌았지만 실제 법원에서 면죄부로 활용된 전례는 없다. 그러나 이선 사건을 계기로 부자병이 일단 판례로 나온 이상 부자들에게 악용될 수 있으며, 의회 차원의 강력한 규제 법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부자병’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는 대체로 비슷하다. 결국 부모의 올바른 양육만이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지난 25년간 부유층 자녀들의 행태를 연구해온 애리조나 주립대학 수니아 루타르 교수(심리학)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는 지금도 아주 부적절한 환경에서 제멋대로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상당히 많다. 이렇게 성장한 자녀들은 잘못된 일을 해도 걸리지 않고, 걸려도 별일이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선이 단적인 사례다. 그런 점에서 PBS 다큐멘터리 〈부자병〉 제작자인 존 디그라프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이선한테만 손가락질하다 보면, 이 현상이 이선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사실을 자칫 망각할 수 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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