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를 다른 동물들과 구별하는 중요한 특징 하나는 언어의 사용이야. 여기서 언어는 좁은 의미의 언어야. 언어라는 말을 느슨하게 사용할 때, 개미의 군락(群落)이나 화학언어, 벌들의 날갯짓도 언어라고 할 수 있겠지. 또 이런저런 컴퓨터 언어도 마찬가지고. 그렇지만 내가 말하는 언어는 개념과 청각 이미지가 결합된 기호들의 구조적 체계를 가리켜. 이런 언어를 자연언어라고 불러. 한국어, 일본어, 영어 같은 언어 말이야. 생각의 뭉치를 형태소로 나누고, 소리의 뭉치를 음소로 나눈 뒤 이들을 이리저리 배열하고 결합하고 대응시키며 표현과 소통의 길을 뚫는 이 언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류는 문명을 건설할 수 없었을 거야.

그렇지만 언어에 대한 학문, 곧 언어학은 과학의 옷을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현대 언어학이 출발한 19세기 이전에도 ‘문법’은 있었지만, 그걸 전문적 지식으로 여기지는 않았어. 문법이라는 말로 언어과학의 대부분을 지칭한 사람은 20세기의 촘스키야), 거기 관심을 지닌 사람도 드물어. 비인기 학문이고, 주변적 학문이지. 그렇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언어에 관심이 많았고, 결국 언어학을 전공으로 삼게 됐어. 언어학은 자연언어의 층위에 따라 음성학,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 의미론, 화용론 따위로 범주화돼. 언어학 개론서들도 대개 이 순서에 따라 독자들을 언어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고. 이런 영역들이 언어학의 몸통이라면 언어학의 곁다리들도 있어. 지리언어학, 사회언어학, 심리언어학, 역사(-비교)언어학, 언어치료학 같은 분야가 그런데, 이 영역들도 몸통 영역들과 일정 부분 포개지는 경우가 많아. 아무튼 언어학자가 교과서를 쓴다면 이런 체계를 벗어나지 않을 거야. 물론 각 분야에 따라 논문을 쓰는 거라면 체계를 넘나들 수 있겠지. 언어학자의 논문집이 아니더라도 이런 체계들을 마구 가로지를 수 있어. 그렇지만 그런 책은 정통 언어학이라기보다는 언어의 둘레를 살피는 풍경화 비슷하게 될 거야.

ⓒ이지영 그림

대니얼 헬러 로즌이라는 캐나다 출신의 미국 비교문학자가 쓴 〈에코랄리아스〉도 언어의 둘레에 대한 그런 풍경화야. 부제가 ‘언어의 망각에 대하여’고, 조효원이라는 사람이 번역했네. 책이 나온 곳은 문학과지성사고. 표제 ‘에코랄리아스’는 본문에서는 제1장 ‘극치의 옹알거림’의 마지막 문장에 딱 한 번 나오는데, 유아기 때의 음성모방이나 남의 말을 흉내 내는 반향언어라는 뜻이야. 그 장에서 얘기하는 것이, 옹알이하는 아이는 음성학적 능력의 한계가 없다가 단일언어를 배우면서, 즉 어른의 말을 ‘모방’하면서 조음능력이 쇠퇴한다는 거니까 제목을 그럴듯하게 지었어. 그렇지만 책 전체를 두고 본다면 부제인 ‘언어의 망각에 대하여’가 더 많은 말을 해주고 있어. 〈에코랄리아스〉는 체계적 저서가 아니라 언어에 관련된 에세이 모음이야. 그런데 그 에세이들 전부는 아닐지라도 태반이 언어의 망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거든. 망각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러니까 이 책은 (자연)언어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의 사라짐에 대해서, 그리하여 태어남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어. 물론 한 언어 형식 안에서 다른 언어의 메아리를 감지하는 게 이 책 저자의 기본 태도이기도 하니까 ‘에코랄리아스’라는 제목도 나쁘진 않아. 그렇지만 좀 현학적으로 들리는 건 사실이지.

실용성과는 무관한, 그러나 매우 흥미로운

저자 소개를 보니까 1974년생이네. 마흔이 조금 넘은 나이. 학문적으로 전성기이겠군. 원서도 한국어판 번역서도 작년에 나왔으니까, 이 책은 한 비교문학자가 제 학문의 정점에 이르러 쓴 책이라고 할 수 있어. 물론 에세이 모음이니까 이 책에 묶인 글들이 쓰인 시기는 저자의 나이 30대 말부터 40대 초 사이일 거야. 수학이나 자연과학은 아주 어릴 때 재능이 드러나고 업적이 쌓이는 경우가 많지. 말하자면 늙은 수학자나 자연과학자는 자기 제자 세대에 견주어 기량이 떨어지기 쉽다는 뜻이야. 인문학도 커다란 차이는 없어. 대부분의 경우, 한 인문학자의 가장 뛰어난 저서들은 30대 후반에서 40대에 나오게 마련이야. 물론 예외적인 이도 많지. 아무튼 그런데도 나는 〈에코랄리아스〉를 읽으며 계속 저자의 나이에 신경이 쓰였어. 그것은 이 책이 그야말로 박학의 전시장이기 때문이었어. ‘아, 나보다 열다섯 살이나 젊은 저자가 이렇게 박학하구나’ 하는 못난 자의식이 내 머리를 맴돌았던 거지. 물론 박학이 깊이를 뜻하지는 않아. 내가 앞에서 이 책을 풍경이라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였어. 〈에코랄리아스〉를 언어학의 몸통 위에 올려놓으면, 대체로 음성학·음운론·역사언어학 정도가 부분적으로 겹칠 거야. 그렇지만 이 책은 언어학의 그런 분야에서 축적된 소위 ‘이론’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지식의 모음이야. 그 지식을 모아서 그려낸 풍경화가 색채의 미묘함도, 원근법의 능숙함도 모자라 걸작이라고는 할 수 없어. 그게 이 책의 첫 번째 단점이야. 게다가 이 풍경화를 충분히 감상하는 건 일반 관람객에게 쉽지 않을 거야. 〈에코랄리아스〉를 읽으며 재미를 느끼려면 서남아시아와 유럽의 많은 언어를 수박 겉핥기식으로라도 이미 익힌 뒤여야 해. 그렇지만 독자 가운데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제3장 ‘알레프’를 읽으며 배움의 기쁨을 느끼려면, 히브리어나 아랍어를 알진 못하더라도 히브리문자나 아랍문자를 읽을 수는 있어야 하고, 제4장 ‘멸종 위기의 음소들’이나 제9장 ‘지층’을 즐기려면 서유럽어 대부분과 라틴어를 조금은 알아야 해. 제17장 ‘언어분열증’과 제20장 ‘천국의 시인들’을 읽으며 흥미를 느끼려 해도 마찬가지야. 제5장 ‘H와 그 친구들’은 서유럽어(의 역사)에 대해 조금만 알고 있으면(예컨대 라틴어 h가 현대 스페인어에서 f로 계승되고 있다거나, 독일어 이름 ‘하인리히’가 프랑스어에서는 ‘앙리’라는 걸 안다면) 〈딴지일보〉 기사만큼이나 재미있는 글인데, 그런 지식이 없는 독자에게는 전화번호부나 인명사전에 견주어야 겨우 참아내며 읽어낼 글이 되기 십상일 듯해. 저자 소개를 보니 대니얼 헬러 로즌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프로방스어 같은 현대 언어들만이 아니라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 아랍어 같은 고전어에도 능한 ‘언어 천재’인 모양인데,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언어들에 대해 약간이라도 알지 못하면 읽는 데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할 책을 쓰고 말았어. 그게 〈에코랄리아스〉라는 책의 두 번째 단점이야. 그러나 그런 단점을 벌충하고 남을 장점이 있으니, 그게 내가 앞서 말한 저자의 예외적 박식이지. 틀린 말도 하기는 해. 예컨대 저자는 ‘유대스페인어(주데스모)’와 ‘라디노’를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둘은 다른 언어거든.

〈에코랄리아스〉대니얼 헬러 로즌 지음, 조효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내가 이 책의 번역자라면 거의 모든 페이지에 주를 달아서라도, 이 책이 현대 서유럽어나 고전 서남아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여느 독자들에게도  쉽게 다가가도록 만들었을 거야. 그럴 정성이 없다면, 이 책을 아무리 재미있게 읽었다 할지라도 번역을 포기했을 거야. 이건 번역자를 탓하는 말이야. 그러나 번역 문장 자체는 깔끔하고 투명해. 이건 번역자를 추어주는 말이야.

나는 〈에코랄리아스〉를 매우 재미있게 읽었고(이건 의도된 잘난 척이야), 이 책에서 적지 않은 것을 배웠어(이건 겸손이 아니라 솔직한 고백이고). 그렇지만 이 책이 모든 사람에게 재미있거나 유익하지는 않을 거야. 요즘의 여느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외국어는 영어를 빼놓으면 일본어나 중국어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책을 읽으며, 저자가 거기 벌여놓은 지식을 모두 흡수할 필요는 없어. 〈에코랄리아스〉처럼, 담긴 지식들이 비체계적이고 잡다한 책은 더욱 그래. 이 책의 각 장은 서로 유기적 관련이 없어. 그래서 눈을 끄는 제목이 있는 장을 먼저 읽어도 돼. 이 책의 독자들은 실용성과 무관한, 그러나 매우 흥미로운 지식을 얻게 될 거야.

기자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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