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유력 정당들은 지난달 내내 공천 문제로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다행히 공천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면서 각 정당의 주요 정책이 하나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www.nec.go.kr)에는 4·13 총선에 출전하는 27개 정당이 내놓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10대 정책’이 일목요연하게 게시되어 있다. 각 당의 홈페이지에도 좀 더 자세한 내용의 정책공약집이 등록되어 있다. 교섭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의 경제·복지 부문 주요 정책을 추려봤다.

새누리당에서 실종된 ‘경제민주화’를 찾습니다

지난 2012년 총선과 대선 당시 경제민주화는 경제 부문의 강자들이 약자들에게 자행해온 ‘갑질’을 차단하자는 맥락에서 제기되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경제 먹이사슬’의 최상부에 있는 재벌 대기업이 경제민주화의 집중 표적으로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새누리당 역시 지난 총선과 대선 때 재벌 대기업에 대한 강도 높은 규제 공약을 잇달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총선 공약에선 ‘재벌 대기업 견제’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사라졌다. 새누리당의 총선 공약에서 경제민주화의 흔적을 애써 찾는다면, ‘소상공인 살리기’ 정도다. 대형 유통점의 골목상권 진입으로 자영업자들이 피해를 본다고 지적한다. 대안은 제시하지 않는다. ‘효율적인 대형 유통업체’가 ‘비효율적인 구멍가게’를 대체하는 것을 시장원리로 간주하는 듯하다. 대신 건물주를 슬쩍 겨냥한다. 과도한 임대료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건물주가 임대계약 갱신을 요구할 수 있는 기한을 5년에서 10년으로 늘리겠다는 것이다. 건물주와 임차 상인들 간의 자율적 상생 협약도 추진할 계획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맨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이번 총선 공약에서도 여전히 경제민주화를 강조한다.

양당이 공히 제시한 재벌 규제 공약으로는 다중대표소송제가 있다. 한국의 대기업 집단은, 재벌 일가가 A라는 기업의 다수 지분을 획득한 뒤, A사가 B사의 주식을 소유하고, B사는 C사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벌 일가는 A사의 다수 지분만 보유한 상태에서 B사, C사를 모두 자기 재산처럼 경영할 수 있다. 그런데 비상장 기업인 B사가 자사의 상품을 시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해당 재벌 일가가 다스리는 다른 회사에 팔았다고 치자. 이 경우, 재벌 일가는 엄청난 이익을 본다. 그러나 B라는 회사 법인은 손해다. B사의 이익금 가운데 일부를 배당금으로 챙기는 A사(B사의 모기업) 역시 손실을 입는다. 이에 따라 A사 주주에 대한 배당금이 줄어들거나 주가가 떨어질 수 있다. 결국 A사 주주들은 B사 경영진(이사)의 그릇된 결정(재벌 일가의 사적 이익을 위한) 때문에 손해를 본 것이다. 그러나 현행 법률에서는 A사 주주가 B사 경영진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 주주는 자신이 지분을 가진 회사의 경영진에게만 손해배상 소송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중대표소송은 모기업인 A사의 주주가 B사 경영진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연합뉴스야당은 소상공인 보호를 주요 공약으로 걸었다. 2013년 국회 앞에서 열린 골목상권 관련 시위 현장.

이처럼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재벌 총수 일가가 자신들이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업집단 구조를 악용해서 소액주주들에게 손해를 입히는 현상을 차단하기 위한 여러 제도를 공약하고 있다.

또한 양당은 ‘납품가 후려치기’ 등 재벌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착취를 막기 위한 방안들도 내놓고 있다. 중소기업(과 그 노동자)의 이익을 높이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이 ‘성과공유제’를 주장한다면, 국민의당은 ‘이익공유제’를 제창한다. 재벌 대기업이 하청업체에 적절한 납품가를 보장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대기업(원청)과 중소기업(하청) 사이의 ‘성과 공유’ 혹은 ‘이익 공유’는 윤리적으로나 국가 경제를 위해 너무나 타당한 주장이다. 다만 원·하청 기업들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전체 이익을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각각 어느 정도씩 배분해야 옳은지’에 대해서는 보편타당한 원칙이 없다. 주장은 무성하지만 실천이 되지 않는 이유다. 더욱이 늘어난 중소기업의 이익이 해당 기업 노동자에게로 넘쳐 떨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양당 역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소상공인 보호에 대해서도 강력한 처방들을 제시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소상공인의 전통적 사업 영역을 보호하기 위한 ‘중소기업 적합업종 보호 특별법’ 제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상업지역’ 내에서는 대형(바닥면적 1만㎡ 초과) 복합 쇼핑몰의 건축을 원천적으로 규제하는 법안도 마련했다. 임차 자영업자의 권리금을 보호하고, 퇴거당하는 경우 보상금을 받을 수 있는 공약도 내놓았다. 국민의당은 임대계약 갱신 기한이나 임대료 상승률을 지역별로 설정할 수 있는 ‘상가임대차 조정위원회’를 설립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키우긴 키워야 하는데…

새누리당·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은 모두 ‘미래형 신성장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약속했다. ICT, 신소재, 친환경 에너지, 인공지능 등 세계적 첨단산업들이다. 이런 산업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육성을 장담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반면 이에 필요한 막대한 규모의 자본과 혁신 시스템을 어떻게 형성해갈지 기획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단지 국가권력의 힘으로 특정 산업을 육성할 수 있는 시대가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스티브 잡스 등이 십몇 년 만에 글로벌 IT 기업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기술밖에 없는 청년이라도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발전된 주식시장’과 고수익-고리스크에 과감히 ‘베팅’하는 투자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정당들은 엄청난 자본이 소요되는 미래산업 육성의 수단으로 청년 창업과 중소기업 육성 방안만 제시할 뿐이다. 기술밖에 없는 중소기업이 발전된 자본시장과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자자들 덕분에 글로벌 거인으로 성장한 미국의 사례를 덮어놓고 한국에 적용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의 대표적 미래성장 동력 육성 방안은 이른바 창조경제 구현에 기여한 기업인들에 대한 포상을 강화하는 것이다. 현재 최고 훈격인 대통령상을 훈장과 포장(메달)으로 상향 조정한다고 한다. 또한 중소기업들이 지적재산(기술) 분쟁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중소기업 특허 공제제도’를 만들기로 했다. 중소기업들이 평소에 보험금을 납부하다 특허소송 등 지식·재산권 분쟁에 휘말리면 이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다.

한편 새누리당이 ‘내수산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내놓은 방안은 모두 세 가지다. 이 중 두 개가 ‘관광산업 활성화’와 ‘해양관광 활성화’인데, 항목 수를 늘리기 위해 관광에서 해양관광을 분리해 열거한 느낌이다. 나머지 하나는 ‘U턴 경제특구 설치’다. 한국 기업의 해외법인들을 다시 국내로 불러들이겠다는 취지다. 공약집에 따르면 국내 기업의 해외법인이 고용한 인력은 2014년 현재 모두 281만명으로, 해외법인 중 10%만 돌아와도 매년 일자리 50만 개씩(28만 개가 아니라)을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U턴한 기업들은 세제 혜택, 부지 무상임대 등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경제특구에 들어갈 수 있다. 정부는 이미 2012년부터 U턴 기업에 세제나 고용보조금 등에서 혜택을 주고 있다. 이로 인해 돌아온 기업은 30여 개에 불과하다.

ⓒ연합뉴스3월24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국제제조산업노조가 노동기본권 보장과 재벌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불평등 완화 자체를 경제 활성화 방안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저소득자가 더 많은 돈을 벌어야 소비가 늘어나 국가경제 전체가 부양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공약집의 상당 분량을 ‘777 플랜’이라는 이름의 불평등 및 양극화 해소 방안에 할애하고 있다. GNI(국민총소득) 대비 가계소득 비중, 국민소득 가운데 노동자(자영업자 포함)에게 배분되는 몫인 노동소득분배율, 중산층(중위 소득의 50~150%) 비중 등을 70%대로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대통령 직속으로 불평등해소위원회를 설치해서 양극화 극복 5개년 계획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그 수단으로는 더불어민주당 버전의 노동시장 개혁이나 대기업이 임금을 올렸을 때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에 혜택을 주는 방안 등이 제시되고 있다.

국민의당은 신성장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국가 부문의 R&D 투자를 혁신과 융합기술 쪽으로 구조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중소기업이 국가 특허기술을 이용해서 상업화에 성공한 뒤 특허료를 후불로 지급하거나, 창업 초기 기업엔 연대보증을 폐지하는 공약 등을 냈다. 특히 ‘M&A 플랫폼’은 벤처기업의 생태계를 잘 알아야 제시할 수 있는 공약이다. 투자자들은 벤처기업에 자금을 투입할 경우 가급적 빠른 시기에 수익을 회수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벤처기업이 주식시장에 상장되어 높은 평가를 받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자금력 있는 대기업이 벤처기업의 기술을 신속하고도 제대로 평가해 적절한 가격으로 M&A(인수합병)한다면, 투자자와 창업자는 자금 투자 및 노력의 대가를 빨리 회수할 수 있다. 대기업 역시 외부의 혁신을 사내로 끌어들일 수 있다. M&A 플랫폼은 이 같은 조건의 시장 환경을 촉진하기 위한 전문 중개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90%를 위하여

새누리당은 노동시장 개혁을 ‘내수산업 살리기’의 일환으로 배치하고 있다. 같은 직장에서 오래 일할수록 많은 임금을 받게 되는 연공급 임금 체계에서 직무능력 및 성과 위주로 바꾸고, 인사를 ‘합리화’하자는 내용이다. 일하는 것 없이 ‘밥만 축내는’ 중·장년층 노동자의 일자리와 보수를 젊은이들에게 이전하자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노동계마저 ‘갑’과 ‘을’로 이중화되어버린 상황에서 제기될 만한 방안이다. 그러나 이로 인한 사회 갈등의 격화가 예상되고, ‘쉬운 해고’로 떨어져나간 중·장년층의 일자리가 젊은이들에게 그대로 이전될지도 의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동일가치노동·동일임금·동일처우’ 슬로건 아래 불안정 고용을 억제하겠다는 공약을 냈다. ‘같은 일을 하면 같은 보수와 처우를 받는다’는 원칙이 관철된다면, 대기업이 직간접으로 비정규직을 사용할 인센티브가 줄어든다. 또한 비정규직을 사용하는 기업에 대해 부담금을 물리는 반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경우엔 1인당 최대 1200만원의 지원금을 기업에 지급하기로 했다. 최저임금도 2020년까지 시간당 1만원으로 올리겠다고 한다. 소득 하위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기 위한 수단들이다.

국민의당은 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90%의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칭 노동회의소를 설립하겠다고 공약했다.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의 권익 대변은 물론 입법 청원, 취업지원, 정책 연구 및 개발, 직업훈련 등의 역할을 노동회의소에 부여하고 있다. 이 공약이 실현된다면,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사실상 국가 차원의 노총이 탄생하게 된다. 또한 비정규직의 사회보험료 납부를 기업에 전액 부담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기업 처지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다.

ⓒ시사IN 신선영2015년 11월12일 청년단체 회원들이 새누리당사 앞에서 청년 정책을 위한 공개 토론을 제안했다.

10대 정책에 끼지도 못한 청년 일자리 문제

새누리당은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당과 달리 청년 일자리 문제를 ‘10대 정책’ 중 하나로 설정하지 않았다. ‘국민 맞춤형 일자리’ 정책의 하위 항목으로 ‘청년’ ‘경력단절 여성’ ‘어르신’ 등이 함께 열거되어 있다. 해법 역시 청년 일자리 ‘창출’보다는 ‘(노동 수요와 공급 간의) 중개’ 쪽에 가깝다. 일자리 자체가 크게 부족하다기보다 일자리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잘 연결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이에 따라 새누리당의 청년 일자리 공약은 ‘청년희망아카데미(일자리 정보나 멘토링 서비스, 창업교육 등을 제공하는 정부 유관 기관. 현재는 서울에만 있다)’를 전국으로 확산시키겠다는 정도다. 새누리당이 특별한 청년 일자리 정책을 제시하지 않는 이유는, 노동시장 개혁으로 중·장년층 노동자들이 밀려난 자리를 청년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더 좋은 청년 일자리’를 70만 개 ‘창출’하겠다고 약속한다. 경찰·보건의료 등 공공부문에서 34만8000개, 현재 공공부문에 의무화되어 있는 청년고용 비율(정원 대비)을 현행 3%에서 5%로 높여서 25만2000개(민간 대기업에도 의무화하는 경우), 실노동시간 단축(일자리 나누기)으로 11만8000개 등이다. 구직활동 중인 미취업 청년(18~34세)들에게 최장 6개월 동안 매달 60만원씩 지급하는 ‘청년안전망’도 제안했다. 다만, 공공부문이 직접 수십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안은 ‘선심성 공약으로 재정을 낭비한다’는 등의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국민의당 역시 청년고용 의무비율을 3%에서 5%로 높이면서 민간 대기업에도 적용하자고 주장한다. 더불어민주당에 비해 다소 엄격하지만, 가구 소득 70% 미만에 속하는 구직활동 청년들에게 6개월간 매달 50만원을 지급하는 제도도 구상 중이다. 다만 지원금을 받는 청년들은 취업 이후 4년간 고용보험료를 추가 납부하는 방식으로 원금을 상환해야 한다.

 

ⓒ연합뉴스2015년 8월27일 주빌리은행 출범식에서 참석자들이 부실채권 소각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시한폭탄’ 가계부채를 어찌할꼬

가계부채는 지난 총·대선 때도 중대 과제로 떠올랐던 이슈다. 박근혜 정부는 대선 공약인 국민행복기금(금융채무 연체자의 신용회복을 위해 채무감면이나 장기 분할 상환을 지원)을 설립했으나 그 실적은 당초 계획의 10%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새누리당과 국민의당 공약집엔 특별한 가계부채 대책이 없다. 새누리당의 경우 ‘서민금융 보호’라는 정책 아래 ‘인터넷 전문은행을 통한 10%대 중금리 대출상품 출시’ ‘서민금융진흥원(기존의 휴면예금재단·햇살론·국민행복기금을 통합한 서민금융 원스톱 지원을 위한 총괄기구) 설립’ ‘선제적 채무조정 강화’ 등의 수단을 열거할 뿐이다. 박근혜 정부가 현재의 가계부채 규모를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보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의 가계부채 해법은 파격적이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채무를 갚지 못하거나 채무조정 상태에 있는 시민(금융채무 연체 취약계층)이 모두 350만명에 달한다. 공약집에 따르면, 금융 당국은 이 중 114만명을 ‘채무 상환능력이 없는’ 계층으로 판단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공약은 이런 계층의 부채를 사실상 ‘탕감(소각)’하는 방식이다.

금융기관이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준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부터 원금과 이자를 받을 권리(대출채권)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다. 채무자가 상환하지 못하면, 금융기관은 다양한 추심 행위를 통해 원리금을 돌려받으려 한다. 그러나 추심이 불가능한 때가 있다. 채무자가 생계도 잇기 힘들어 추심을 해봤자 돌려받는 돈보다 비용이 더 드는 경우다. 금융기관이 일정 기간(소멸시효, 예컨대 10년) 동안 추심하지 않으면, 상환받을 권리(대출채권)가 소멸된다. 금융기관들은 이런 대출채권을 대부업체 등에 값싸게 넘긴다. ‘2000만원의 원리금을 받을 대출채권’을 예컨대 원금의 3%인 60만원 정도로 파는 것이다. 대부업체들은 은행 등 ‘점잖은’ 금융기관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꽤 거친 추심 수단을 동원할 수 있다. 대부업체가 60만원으로 매입한 ‘2000만원짜리 대출채권’으로 채무자를 찾아가 원리금을 모두 받아내면 무려 1940만원의 수익이 발생한다. 1000만원만 받아내도 940만원이 남는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2010년 이후 5년간 162개 금융회사가 4122억원 규모의 ‘소멸시효 완성 대출채권’을 불과 120억원에 대부업체들에게 매각했다. 더민주의 가계부채 대책은 이처럼 금융기관들이 상환받기를 포기한 ‘소액 장기연체 대출채권’을 대부업체 대신 정부가 싸게 인수한 뒤 소각해버리는 방식이다. 채무자는 더 이상 추심을 받지 않게 된다. 정부로서도 큰돈이 들지 않는다.

다만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를 선별하는 가운데 형평성 시비가 발생할 수 있다. 실시할 경우, ‘이런 방식의 채무 탕감 기회는 단 한 번’이란 것을 시민들에게 납득시켜야 한다. 추가로 탕감 여지를 남기면 모럴해저드의 확산으로 금융질서 전체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

국민연금으로 출산율 높여볼까

새누리당은 이미 한국에 가능한 정도의 복지 시스템은 거의 구축되었다고 여기는 듯하다. 더불어민주당에 비하면 ‘복지 메뉴’가 매우 빈약하다. 또한 ‘국민들의 추가 부담 없이 정상적 세입구조 내에서 총선 공약 소요 재원을 흡수’하는 방법으로 공약을 이행하겠다고 한다. 증세를 통해 적극적으로 복지국가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는 없다는 의미다.

새누리당의 대표적인 복지 공약은 국민연금 사각지대 해소다. 출산 등으로 직장을 나와 국민연금 최소 가입기간(10년)을 채우지 못한 주부들에게 추가 납부를 허용할 계획이다. 연금 수령 인구가 446만명 늘어난다. 청년 취·창업자 가운데 월급 140만원 미만 소득자에겐 연금보험료 중 일부를 지원하기로 했다. 건강보험료 부과체계도 소득 중심으로 뜯어고칠 계획이다. 그동안 지역가입자의 경우, 신고 소득 이외에 자동차 등 재산까지 보험료 부과 기준으로 간주되어 과도한 보험료를 청구받는다는 민원이 많았다. 주거복지 부문에서는, 도심에 늘어나고 있는 빈집을 리모델링해 1~2인 가구 임대주택으로 사용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신혼부부 행복주택 특화단지를 2017년까지 최대 10개 조성하고 주변에 국공립 어린이집 등 자녀 양육 편의시설을 도입한다는 공약도 포함시켰다.

국민의당 역시 새누리당과 비슷한 연금 사각지대 해소 방안을 공약했다. 이와 함께 국민연금 크레딧 제도(현재 출산이나 군 복무로 내지 못하는 연금보험료를 국가가 대신 납부)를 양육이나 실업으로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건강보험료 부과체계도 소득 중심으로 바꿀 계획이다. 공공보건 의료기관을 확충하고, 민간 보험사의 실손의료 보험료를 인하하는 공약도 내놓았다. 보육 부문에서는 출산휴가 기간을 90일에서 120일로 늘리고, 육아휴직 급여도 기존 보수의 40%에서 50%로 올릴 계획이다. 기초연금은 20만원에서 깎지 않고 제대로 지급하기로 했다. 현행 기초연금제도에서는 수급자가 국민연금이나 기초생활보장금 등을 받으면 20만원에서 일정 액수를 빼고 준다. 국민연금 기금을 투자해서 청년 대상 공공 임대주택을 건설하겠다는 공약도 나왔다.

더불어민주당은 ‘선택적(선별적) 보편주의’라는 개념을 채택했다. 2012년 선거 당시 내걸었던 ‘보편적 복지(빈부를 ‘선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규모의 복지 혜택을 제공)’에 선별주의를 가미하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기초연금 공약이 한 사례다. 더불어민주당은 국가가 최소한의 노후를 책임져야 한다는 원칙하에 기초연금을 최저생계비(2016년 약 64만원)의 절반 수준인 월 30만원으로 증액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 30만원을 받을 대상은 전체 노인이 아니라 ‘소득 하위 70%로 선별된’ 노인들이다.

ⓒ국토교통부 제공3월30일 국토교통부의 행복주택 입주자 모집공고가 시작됐다. 서울 가좌지구 행복주택 공사 현장.

또한 더불어민주당은 그동안 재원 부족으로 증설이 어려웠던 임대주택·보육시설 등 공공 인프라에 국민연금 기금을 투입하자고 제안했다. 정부가 향후 10년간 매년 10조원 규모의 국채를 국민연금공단에 팔아(연금공단으로부터 매년 10조원을 빌려)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10년 동안 100조원을 투입하면 장기 임대주택 85만 호, 국공립 어린이집 5600개 등을 확충할 수 있다. 물론 정부는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빌린 돈을 임대주택에서 얻은 수익 등으로 갚아야 한다. 임대료 수익이 연금공단에 갚을 이자보다 많다면 이 사업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국가는 시중금리보다 싼 이자로 빌릴 수 있는 데다 부지 매입 등의 비용도 낮출 수 있는 만큼 민간 임대사업자보다 유리한 처지다. 그래서 더불어민주당은 민간 사업자의 임대주택에 비해 10~20% 저렴하게 공급하면서도 국채금리 이상의 수익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민들의 노후자금인 연금 기금을 공공사업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도 나온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측은 국민연금 제도의 지속성을 위해서라도 연기금을 공공 인프라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국민연금 기금 가운데 90% 정도가 주식 등 금융자산에 집중 투자되고 있다. 한국 대표 기업들에서 연금공단이 1~3대 주주의 지위에 오를 정도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런 주식들을 팔아 연금을 지급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가 폭락 등으로 금융시장이 붕괴될 수 있다. 국민연금공단의 투자를 금융자산에서 공공사업 등으로 다변화해놓을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더욱이 세계 최악인 현재의 출산율이 지속된다면, 연금보험료를 낼 인구가 줄어들어 국민연금 제도 자체가 지속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럴 바엔 연금 기금을 공공 임대주택이나 어린이집 등 출산율을 올릴 수 있는 부문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 더불어민주당의 논리다.

한편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공약집에서 다른 정당들과 달리 복지를 강화하려면 증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고 있다. 일단 재벌 대기업의 비과세·감면 축소, 현행 22%인 법인세율을 25%로 인상하는 방안을 명시했다. 또한 한국인들이 부담하는 복지비용(세금과 사회보험료)이 OECD 최저 수준인 현실에 대해 “최저 복지 수준도 뒷받침할 수 없는 세입구조”라고 지적한 것을 감안하면, 대기업과 초부유층 이하의 계층에 대해서도 증세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듯하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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