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양산시에 사는 지훈이(가명·6)는 삼 남매 중 막내다. 나이 차가 크게 나는 고등학생 형과 누나가 있다. 10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미숙아로 태어난 지훈이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해 각종 검사를 거친 끝에 알게 된 병명은 ‘상세 불명의 근육병’. 원인도, 치료 방법도, 예후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증상만은 뚜렷했다. 근육세포가 정상적으로 생성되지 않아, 호흡이 불안하고 음식물도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다. 목을 절개해 ‘호흡보조기’를 삽입하고 링거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했다. 의사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치료가 없다고 했다. 엄마는 포기할 수 없었다.

엄마 김미희씨(가명·39)는 걷지 못하는 지훈이를 안고 양산과 부산을 오가며 꾸준히 재활치료와 인지치료를 받게 했다. 결과는 의사도 놀랄 정도였다. 2년간 누워만 있던 아이는 이제 앉을 수 있고, 보조기 도움 없이 스스로 숨을 쉰다.

ⓒ시사IN 조남진희귀한 근육병을 앓고 있는 지훈이네 가족(위)은 치료비로 한 달에 120만원 이상을 지출한다. 치료비를 대느라 빚이 8000만원까지 늘었다.

하지만 지훈이의 상태가 좋아질수록 집안 살림은 어려워졌다. 지금까지 치료비로 들어간 돈만 어림잡아 5000만원이 넘는다. 김씨는 일부러 치료비를 꼼꼼하게 정리하지 않았다. “그러면 치료를 못할 것 같았다. 그때그때 필요한 검사나 치료가 있으면 거기에 맞춰서 돈을 구한다. 일일이 따지다 보면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그러면 포기하고 싶은 맘이 생길까 두렵다.” 김씨는 ‘소원’을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녀의 현재 소원은 지훈이가 보행기를 잡고 혼자 일어서는 것이다. 보조 장비의 도움을 받더라도 걸을 수만 있다면 특수학교에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지훈이 같은 중증질환 아이의 딱한 사연은 종종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모금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된다. 시민들의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치료비에 보탠다. 하지만 환자는 많고 수혜자는 적다. 이 때문에 민간에 의존해 도움을 주는 방식에서 벗어나 국가가 전체 어린이의 입원치료비를 보장하게 하자며 사회복지사협회와 시민단체, 어린이 관련 단체 등 58개 단체가 손을 잡았다. 지난 2월 발족한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추진연대(어린이병원비연대)’다.

어린이병원비연대는 20대 총선을 맞아 새누리당·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등과의 정책협약을 추진하고 있다. 기존 무상급식이나 무상보육 운동을 시민사회 단체가 주도했다면, 이번에는 복지의 최일선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들이 앞장서고 있다. 서울·광주·부산·대전 등 광역 단위 사회복지사협회가 팔소매를 걷어붙였고, 초록우산어린이재단·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유니세프한국위원회·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한국수양부모협회·홀트아동복지회 등 어린이 관련 단체가 참여했다.

본인부담상한제 있지만 ‘비급여’는 해당 안 돼

이들이 전체 어린이 병원비를 당장 국가가 책임지게 하자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2014년 기준으로 0~15세의 한 해 병원비는 총 6조3937억원 정도이다. 병원비는 입원진료비·외래진료비·약제비로 이뤄진다. 이 가운데 목돈이 들어가는 입원진료비를 국가가 보장하자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 기준으로 0~15세의 입원진료비는 1조7053억원이 쓰였다. 이 가운데 1조1901억원을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부담했다. 보통 입원비 20%를 부담하는 법정 본인부담금은 2014년 기준 1306억원이었고, 선택진료료·상급병실료·간병료· MRI·초음파 등 비급여 본인부담금이 3846억원이었다. 환자의 병원비 부담이 일정한 상한(소득에 따라 120만~500만원)을 넘으면 건강보험공단이 전액 부담해주는 본인부담상한제도가 있지만, 법정 본인부담금에만 적용되고 비급여 본인부담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지훈이가 받고 있는 재활치료·인지치료·언어치료도 비급여 항목에 해당된다. 고스란히 본인 부담이다. 1회 20만원인 이 치료를 정기적으로 받아야 해 월 치료비가 120만원을 넘는다. 가계소득은 중소기업에 다니는 아버지 월급 180만원이 전부다. 벌이의 대부분이 치료비로 나가는 셈이다. 그간 빚도 8000만원까지 늘어났다.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꽉 채워서 이제는 대출을 더 받기도 어렵다. 하지만 치료를 중단할 순 없다. 지훈이는 자연스레 근력이 키워지지 않기에 근육을 훈련하는 재활치료를 받지 않으면 예전 상태로 돌아간다. 위독해질 수도 있다.

 

지훈이 엄마가 일부러 치료비를 기록하지 않으며 버티듯, 어린이가 중증질환을 앓는다고 포기할 부모는 거의 없다. 저소득층 가운데 ‘치료 방임’을 하는 부모도 있지만 어떤 식으로든 아이를 치료하려고 애쓴다. 어린이병원비연대는 입원진료비의 환자 본인부담금에 해당하는 법정 본인부담금과 비급여 본인부담금을 국가가 보장하자고 주장한다. 2014년 기준 0~15세 입원진료비의 법정 본인부담금(1306억원)과 비급여 본인부담금(3846억원)을 합치면 5152억원가량이다.

이 돈은 어디서 마련할까? 대안이 있다. 바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다. 건강보험의 누적 흑자 규모는 2010년부터 해마다 늘어서 2016년 1월 기준으로 16조8700억원을 넘어섰다. 어린이 입원진료비 100%를 보장하는 데 들어가는 5152억원은 누적 흑자의 3%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어린이병원비연대는 곳간에 돈을 쌓아두지 말고, 어린이 입원진료비에 적극적으로 쓰자는 주장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돈을 쌓아둔 이유는 두 가지다. 국민건강보험법 제38조에 따라 감염병 유행 등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한 준비 차원에서 회계연도마다 잉여금 가운데 당해 연도의 보험급여에 든 비용(총지출)의 5~50%를 적립해야 한다. 또 하나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 적자로 전환되므로 이에 대비하자는 논리다. 현직 의사인 김종명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의료팀장은 “조기에 적자로 전환될 것이라는 건강보험공단의 예측은 틀린 것으로 이미 판명됐고, 앞으로 상황에 맞게 보험료를 조정해 나가면 문제가 없다. ‘어린이 입원진료비 국가 부담’은 쌓아둔 돈의 3%만 투입하면 당장 실현 가능한 정책이다”라고 말했다. 일부에서 지적하는 도덕적 해이에 대해 김 팀장은 “병상 자체가 한정되어 있고, 아이가 입원하면 부모까지 병원에서 며칠 밤을 새워야 하는 등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일부러 입원시키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부모들은 만일에 대비해 태아보장·소아암·희귀질환·실손의료비 보장 등으로 구성된 민간 의료보험에 대부분 가입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10세 미만 어린이는 월평균 4만8429원, 10~19세는 월 3만9270원을 보험료로 지출하고 있다. 15세 이하 어린이의 민간 의료보험료만 추산해보면 연간 4조2302억원을 쓰고 있는 셈이다. 국가가 5152억원만 책임지면, 연간 4조원 가까운 가계 지출도 줄여 살림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희귀성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어린이의 경우 사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쉽지 않다.

다섯 살 수현이(가명)는 생후 11개월 무렵 폐렴에 걸려 병원을 찾았다가 더 큰 이상을 진단받았다. 근육에 힘이 생기지 않는 희귀성 질환이었다. 발병 원인조차 알 수 없었다. 자가호흡이 어려워 기도절제술을 한 뒤 호흡보조기를 통해 숨을 쉬어야 했다. 말이 빨라 어른들이 기특하게 여겼던 수현이는 호흡보조기가 성대를 누르는 탓에 그 이후 말을 하지 못한다.

수현이도 정부로부터 의료비 보조를 받기는 한다. 외할아버지가 국가유공자여서 의료급여 1종 수급 자격을 얻었다. 희귀난치성 질환으로도 등록했지만 중복 지원은 받지 못한다. 수현이 부모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미리 사보험에 가입했다. 하지만 가입한 어린이 실손보험을 강제로 해지당했다. 희귀난치성 질환이 발견되기 전이었다. 생후 100일쯤 됐을 무렵 목을 잘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아 발달검사를 받고 보험사에 검사비 40만원을 청구했다. 보험사는 ‘고지 의무 위반’을 이유로 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알고 보니 생후 한 달 무렵 같은 소아과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의사가 ‘발달 지연’이라는 소견을 의료 기록으로 남기고는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보험사는 심사 과정에서 그 기록을 찾아내 이를 근거로 보험계약을 해지했다. 공보험(건강보험)의 빈 곳을 메우기 위해 가입한 사보험도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구실을 하지 못했다.

ⓒ시사IN 윤무영3월16일 시민단체 ‘어린이병원비연대’가 어린이 입원진료비를 국가가 보장해줄 것을 촉구했다.

‘어린이 입원진료비’ 국가 보장에 무관심한 정치권

비급여 본인부담금은 수현이 부모가 고스란히 부담해야 했다. 수현이는 치료 때문에 1인실에 입원했다. 여기에 보험으로 보장되지 않는 각종 검사나 특진료 등을 합하니 병원비만 2000만원이 나왔다. 목돈이 없었던 부모는 카드 할부로 병원비를 갚아 나갔다. 수현이 부모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보습학원을 운영한다. 월소득은 250만원 정도다. 진료비와 주택담보대출금을 상환하면 빠듯한 살림이다.

한국은 1992년 유엔 국제아동권리협약을 비준했다. 아동권리협약 제6조는 아동의 생명권을 인정하며 당사국은 최대한도로 아동의 생존과 발달을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서 의료비 지원 업무를 맡고 있는 이선영 팀장은 “유엔 아동권리협약위원회는 가입국에 대해 정기적으로 이행 정도를 심사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저소득 가정의 아동이 무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공공의료를 확대하라고 권고했다”라고 말했다.

어린이병원비연대는 20대 총선을 앞두고 각 당에 정책협약을 제안했다. 있는 재원을 투입하면 되기에 총선을 계기로 현실화를 꾀했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은 3월23일 현재 아무런 답변이 없다. 정의당만 지난 3월11일 정책협약에 응했다. 지훈이나 수현이처럼 암·심장 질환·뇌혈관 질환·희귀난치성 질환 등 이른 바 4대 중증질환을 앓고 있는 어린이는 현재 4만여 명에 달한다. 이들 가족의 표심에도 각 정당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기자명 고제규·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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