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새 투쟁(새누리당), 비례대표 선발 파동(더불어민주당), 공천 탈락 도끼 시위(국민의당) 등 거대 정당의 총선 후보 선발을 두고 온갖 잡음이 불거졌다. 공천을 둘러싼 다툼이 후보 등록일까지 이어지면서, 역대 어느 선거보다 정책 이슈가 사라졌다. 하지만 주목도는 떨어져도 신선한 정책으로 실험에 나선 정당과 후보들이 있다. 현장과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 정치적 상상력을 넓힌 소수 정당과 그 당에 소속된 후보들이다.

녹색당 이계삼 후보는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 사무국장’이라는 직함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을 계기로 중학교 국어교사에서 탈핵 활동가로 삶의 방향을 튼 그가 또다시 낯선 길로 들어섰다. 밀양에서 ‘정치의 부재’로 고통받는 현장을 절실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후보는 출마의 변에서 밀양 주민들과 함께 국회를 찾았던 때를 떠올렸다. “주권자들이 주권을 위임받은 자들에게 아주 작은 책임이라도 질 것을 부탁하는 자리에서 보험 외판원처럼, 다단계 판매원처럼 굽신거려야 했다.”

이 후보는 녹색당 비례대표 2번이다. 지난해 12월 당원 투표를 통해 비례대표 후보 5명이 선출됐다. 지역구 후보는 서울 종로구에 출마한 하승수 공동운영위원장을 포함해 5명이다. 녹색당은 ‘N선본’이라는 이름으로 후보별·의제별로 선거본부를 꾸렸다. 이계삼 후보가 이끄는 ‘탈탈+선본’은 탈핵이 의제다. 이 밖에 거주권·동물권·기본소득·먹을거리 안전 등 다양한 가치를 내세우는 선본이 활동 중이다. 중앙당·지역구·비례대표 등 인물 위주로 선본을 꾸리는 기성 정당과 차별화된다.

ⓒ시사IN 조남진녹색당 비례대표 2번인 이계삼 후보(앞)가 3월23일 오전 한국전력 앞에서 유치원 전자파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녹색당은 20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당선자를 배출하면 ‘임기순환제’를 적용한다. 당선자가 임기 2년 뒤 사퇴하고 후순위 후보자가 의원직을 이어받는 방식이다. 당선되지 못한 나머지 비례대표 후보는 보좌진으로 함께 국회에 들어간다. 비례대표 1번인 황윤 영화감독이 2년 임기를 마치면 2번인 이계삼 후보가 의원으로, 황윤 감독은 보좌관으로 자리를 바꾼다. 당선자를 여럿 배출하기 어려운 소수 정당에서 의정 경험을 폭넓게 쌓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전문성을 키우기에 2년은 너무 짧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독일 녹색당은 초기에 임기순환제를 채택했지만 이런 이유로 중단했다. 녹색당도 20대 국회에 한정해 시행해본 뒤 지속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녹색당은 ‘팀의 정치’를 하려 한다”

‘임기순환제’에는 녹색당의 경험과 철학이 녹아 있다. 이계삼 후보는 “민주주의는 ‘꼭 이 사람이어야 한다’는 필연의 논리가 아니라, 우연과 순환의 논리에 맡겨야 한다. 교수·변호사 같은 전문가들이 아니라 시민이라면 모두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 국회에는 이미 입법조사처 등 전문성을 갖춘 기관이 마련돼 있다. 녹색당은 특정 인물에 기대는 게 아니라 ‘팀의 정치’를 하려 한다”라고 말했다. 녹색당은 대의원 300명을 모두 추첨으로 뽑았다. ‘우연과 순환의 논리’라는 철학에 기반을 둔 일종의 민주주의 실험이다. 무작위로 선출된 대의원이지만 전국 대의원대회 출석률은 70%에 달한다.

녹색당 공약집 이름은 ‘성장중독 탈출, 행복이 우선이다’이다. 탈핵, 동물권 보장 등 전통적인 녹색 공약도 있지만 공약집의 초점은 ‘탈산업사회에서의 지속 가능한 삶’에 맞춰져 있다. 대표 공약도 녹색보다는 적색 가치에 가까운 ‘월 기본소득 40만원 보장’이다. 이 후보는 “통념과 달리 녹색당은 환경보호만 다루는 정당이 아니다. 우리는 대안 정당을 지향한다”라고 말했다.

녹색당 총선공약개발단은 선거 1년 전인 2015년 4월에 출범했다. 개발단이 만든 공약은 그해 9월 전 당원 정책대회를 거쳐 다듬어졌다. 그 뒤 올해 초, 해당 공약에 영향을 받는 당원들에게 감수를 받았다. 교육 공약은 교사와 청소년 당원, 농업 공약은 농민 당원의 손길을 거치는 식이다. 이계삼 후보는 “당원이 9000명인 작은 정당이지만 녹색당은 오랫동안 꼼꼼하게 선거를 준비해왔다. 그만큼 정책으로 승부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컸는데, 정책이 실종된 인물 대결로 총선이 흘러가 아쉬움이 크다”라고 말했다.

노동당 구교현 대표는 지난해 9월 당 대표로 선출됐다. 나경채 전 대표를 비롯해 진보 결집파가 탈당한 직후다. 당원 1500명도 떠나 현재 전체 당원 수는 1만2000명, 진성 당원은 4200명 수준이다. 간판 스타였던 심상정 의원, 노회찬 전 의원이 탈당했던 2012년 총선보다 상황은 더 어렵다. 비례대표 2번으로 나선 구교현 대표는 냉혹한 현실을 인정했다. “정의당과 다른 게 뭐냐는 반응이 있다. 우리 당의 색깔을 뚜렷하게 보여주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구 대표가 꼽는 노동당의 정체성은 ‘불안정 노동자들의 대변자’다. 그는 출마의 변에서 “야당도 노동계도 비정규직의 끝자락에 있는 아르바이트 노동문제는 말하지 않는다. 야당은 노동개악 저지에 힘을 쓸 뿐이고 노동계도 쉬운 해고 반대에 힘을 쓸 뿐, 이미 개악된 일터에 출근하고 늘 해고를 걱정해야 하는 노동자의 현실은 잘 다루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시사IN 윤무영노동당 당 대표이자 비례대표 2번인 구교현 후보가 출근길에 노동당의 정책을 홍보하고 있다.

구 대표는 알바노조 위원장 출신이다. 스물세 살 때부터 패스트푸드점, 택배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거친 그는 2013년 알바노조를 만들었다. 당시 경험을 통해 정치의 필요성에 눈을 떴다.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은 일자리가 불안정해 계속 직장을 옮기기 때문에 노동조합이라는 기존 틀로 묶는 데 한계가 있었다.”

노동당은 20대 국회 1호 법안으로 ‘최저임금 1만원’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주당 노동시간 35시간, 월 기본소득 30만원 공약을 함께 내놓았다. 노동당은 기초적인 소득이 보장돼야 장시간 노동을 줄일 수 있고,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는 그림을 그렸다.

구 대표는 “피켓을 들고 선거운동을 하면 ‘짱 좋다’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 뉘앙스가 ‘정말 필요하니 꼭 실현되면 좋겠다’가 아니라 ‘저게 되겠어?’ 하는 투다. 주권자는 좋다고 여기면 소리 높여 요구하면 된다. 실현 방법은 정치가 찾으면 되는 거다. 그게 정치인이 할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민중연합당 이상현 후보는 서울시 동작을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 중 유일한 30대다. 그는 민중연합당 당원이면서 흙수저당 소속이기도 하다. 올해 2월27일 창당한 민중연합당은 청년정치를 표방하는 ‘흙수저당’과 ‘노동자당’ ‘농민당’이 모인 연합 정당이다. 민중연합당에서는 20대 총선에서 지역구 후보 53명(3월24일 기준), 비례대표 4명이 출마한다. 이 가운데 지역구 후보 19명과 비례대표 1번이 흙수저당 출신이다. 흙수저당 후보 중 최고령자는 만 34세 유지훈(서울 은평을) 후보다. 황인용(광주 동구남구을), 윤미연(서울 동대문을) 후보는 피선거권이 주어지는 나이인 만 25세다.

이상현 후보는 학비를 내지 못해 졸업을 2학기 남겨두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던 ‘진짜 흙수저’다. 졸업장은 받지 못했지만 학자금 대출 1700만원은 남았다. 빚을 갚기 위해 월세 23만원인 고시원에 살며 창고에서 일하던 중 결핵에 걸려 장애까지 얻었다. 이 후보는 “등록금 부담, 구직난 등 청년 문제가 심화되는데 정치권은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 청년들이 스스로 나서서 당을 만들고 정치에 나서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다”라고 말했다. 민중연합당은 반값등록금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등록금 100만원 상한제’를 공약으로 내놓았다.

이 후보는 정치권 앞에 쳐진 진입 장벽을 절감하고 있다. 출마기탁금 1500만원부터 발목을 잡는다. 우리나라는 선거 비용을 보전해주는 선거공영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실제 투표에서 10% 이상을 득표해야 비용의 절반을 보전해주며, 선거 비용을 전액 보장받기 위해서는 15% 이상 득표해야 한다. 이 후보는 “선거제도가 기성 정치인에 맞게 설계돼 있다. 처음으로 출마하는 청년이나 신생 정당에게는 매우 불리하게 작용한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서울 동작을에 출마한 민중연합당 이상현 후보(오른쪽)는 이 지역 출마자 중 유일한 30대다.

야간 노동하는 흙수저 청춘을 위하여

민중연합당은 2014년 해산된 통합진보당이 이름만 바꾼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통진당 출신 김선동·김재연·이상규 전 의원이 입당하면서다. 김재연·이상규 전 의원은 민중연합당 후보로 각각 의정부을과 서울 관악을 지역에 출마한 상태다. 이상현 후보는 “통진당 당원들이 일부 입당한 건 사실이지만 민중연합당은 흙수저당을 중심으로 노동자당과 농민당이 모인 연합 신생 정당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후보는 오히려 통합진보당 출신 당원들이 더 많이 입당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당이 해산됐다고 정당 활동까지 금지된 게 아니다. 그분들이 진보 정치의 꿈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 33세인 후보를 제외하고 전원 20대로 구성된 이상현 후보 캠프는 ‘유세차·현수막·문자 없는 선거’라는 원칙을 정했다. 대신 대학가라는 지역 특성에 맞게 청년들을 많이 만날 계획이다. 이 후보는 “특히 편의점이나 PC방 야간 아르바이트처럼 밤에 일하는 청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려 한다”라고 말했다.

녹색당, 노동당, 민중연합당의 20대 총선 목표는 비례대표 1석이다. 정당 득표에서 3%를 얻어야 한다. 지난 19대 총선에서 녹색당은 정당 득표율 0.48%, 노동당(당시 진보신당)은 1.13%를 기록했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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