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체(體)자와 벌벌(罰)자의 합인 ‘체벌’은 글자 그대로 ‘몸에 직접 고통을 주어 벌한다’라는 의미다. 영어로도 ‘corporal punishment(신체적 처벌)’인데, 이처럼 ‘신체성’은 체벌의 핵심이다. ‘사랑의 매’나 ‘교육적 체벌’ 등 은유나 수식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결국 타인의 신체에 물리력을 가한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체벌이란 다른 인격체에 대한 구타이자 폭행이다.

아동·청소년은 ‘미숙’하기 때문에 때려서라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이들의 논리다. 폭력의 대상을 열등한 것으로 규정해, 그 정당성을 찾는 오래된 방식이다. 그러나 아동·청소년에 대한 체벌이 교육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구체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수많은 경험적 연구를 통해 체벌의 교육적 효과가 없다는 점, 체벌을 통해 아동·청소년이 폭력과 복종을 내면화하고 학교폭력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 등이 명확하게 입증되고 있을 뿐이다. 체벌을 당한 아이들의 감정을 조사한 한 연구에서, 그 어떤 아이도 체벌 이후 ‘반성’이나 ‘미안함’을 느꼈다고 응답하지 않았다. 체벌을 당한 아이들이 품었던 감정은 당연하게도 무서움·화남·끔찍함·창피함·외로움이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 아동·청소년에 대한 모든 형태의 체벌을 금지하자는 목소리는 희박하기만 하다. 여론조사에서 체벌이 필요하다고 응답하는 비율은 늘 80%를 상회하고 있으며, “말이 안 통하는데 어떻게 가르치느냐” “맞을 만한 짓을 하면 때려야 한다” 같은 언어가 단단한 상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연일 언론을 채우는 끔찍한 아동학대 사건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학대 행위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라’고 외치고 피해 아동의 사연에 가슴을 치면서도, 학대와 체벌은 다르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사랑의 매와 분노의 매가 다르다는 것은 전형적인 가해자의 논리다. 자신의 의도에 따라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 아이들에게는 맞는 이유가 사랑이든 분노든 다를 바 없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영희 그림〈/font〉〈/div〉

학대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수갑 찬 괴물에 의해서만 일어나지 않다. 2014년 아동보호 전문기관에 접수된 사례를 기준으로 아동학대는 1만72건이었고, 이 중 81.8%가 부모에 의해서 발생했다. 실제 건수는 신고된 건수보다 훨씬 많을 수밖에 없기에 2014년 한 해만 해도 수만명의 부모가 아동학대를 저지른 것이다. 체벌이 부모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되는 나라에서, 가정 내 체벌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때리는 자는 무뎌지고 맞는 자는 자포자기하게 된다. 이처럼 학대는 체벌의 과정이자 합으로서 발생한다. 체벌이 근절되지 않는 한 아동학대를 막을 수 없다.

꾸준한 캠페인으로 아동의 ‘체벌 경험’을 한 자릿대로 줄인 스웨덴

학대에 대한 신고와 처벌은 사후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거부감은 있겠지만 아동·청소년에 대한 체벌 금지를 논해야 한다. 이미 아동복지법이나 초·중등 교육법 시행령에서는 아동(학생)에게 가하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를 알고 있는 사람조차 드물다. 법으로 ‘금지’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스웨덴은 1979년 부모에 의한 체벌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면서 2년 동안 90%의 가정에서 아이·청소년을 때리는 것이 적법하지 않다는 인식을 갖도록 하겠다는 구체적 목표를 설정했다. 제정 당시 70% 이상의 반대 여론을 뚫고 겨우 제정되었으나, 꾸준한 캠페인 결과 2000년 이후 스웨덴 아동의 체벌 경험은 한 자릿대로 떨어질 수 있었다. 아동학대 문제가 해결된 것은 물론이다. 우리의 체벌금지법도 그러해야 한다. 인식의 전환, 긍정적이고 비폭력적인 형태의 교육으로 옮아갈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지원과 정책이어야 한다.

기자명 임재성 (평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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