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초 어느 날 새벽 5시께였다. 미얀마(버마) 옛 수도 양곤에 취재차 머물던 필자의 전화기 너머로 “양곤에 도착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며칠 전 인터뷰를 요청했던 전 승려 우 감비라의 전화였다.  

감비라는 2007년 8~9월 기름값 인상으로 폭발한 민심을 휘감으며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거리시위를 조직한 이른바 ‘사프란 혁명’의 지도자다. 혁명은 실패했고 감비라는 그해 11월 체포됐다. 온 가족이 잡혀갔다. 도망자가 된 아버지와 누이 한 명 빼고 후천성면역결핍증(HIV+) 환자인 남동생 윈 초까지 잡혀갔다. 감비라의 자수 유도용으로 체포된 동생은 옥사했고 감비라는 중노동이 포함된 68년형을 선고받았다. 2012년 1월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기까지 4년2개월간 그는 구타, 잠 안 재우기, 화학주사 등 모진 고문을 당했다. 특히 머리를 많이 맞았다.

감비라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두통이 심했고 까먹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국 현안을 묻는 질문엔 언변이 살아났고 ‘고맙게도’ 필자가 듣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그는 2007년 혁명의 기억을 더듬는 질문엔 날짜까지 기억했다. ‘기록’의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했던 엄혹한 시절 모든 건 머릿속 ‘기억’으로만 붙들어 매야 했다. 엄청난 고문과 강도 높은 PTSD에도 그 기억은 용케 사라지지 않았다. 감비라뿐 아니라 미얀마 정치범들의 기억이 남다른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EPA수치 여사가 최측근 우 틴 초(왼쪽)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위는 2010년 가택연금 해제 당시 모습.

서슬 퍼런 독재와 그 체제가 명령한 고문은 한 사람을 후유증 속에 반영구적으로 가둬놓았다. 전 학생운동가 짐미(46, 본명 초 민 우)도 그중 한 사람이다. 인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낸 짐미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책을 읽을 수도 펜과 종이를 만져볼 수도 없었다. 음식은 입에 넣을 수 없는 수준이고 군정보국(MI)의 고문도 심했다. 구타는 그들의 무기였다.”

짐미의 아내이자 이른바 ‘88세대’ 동지로 감옥에서 사랑을 키운 닐라 테인(44)은 출소한 남편 짐미와 함께 사프란 혁명 전야 8월의 시위를 조직한 바 있다. 그 시위가 다시 두 사람을 감옥으로 몰아넣었다. 6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닐라 테인과 짐미는 2012년 1월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다.

그런데 요즘 이들의 구속 소식이 다시 귀를 어지럽히고 있다. 지난 1월19일 감비라가 다시 철창에 갇혔다. 지난해 11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총선 승리 후 안도했던 감비라는 그동안 거부당해온 여권을 발급받으러 미얀마에 돌아갔고 그게 화근이 되었다. 감비라는 오스트레일리아인 아내 마리 시오차나와 함께 매사이(타이)-타칠레익(미얀마) 육로 국경 이민성을 넘어 입국했지만 구속 사유는 ‘불법 입국’이었다. 식민 시절 법인 ‘1947이민법’ 제13(a)항이 적용됐다. 감비라의 PTSD를 치료했던 전문기관 더 캐빈(The Cabin)의 로리 마기 의사는 크게 염려했다. “감비라가 PTSD 치료에 놀라운 진전을 보여왔는데, 그를 PTSD를 야기한 공간으로 되돌려 보낸 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다”라는 우려였다.

ⓒ이유경 제공‘정치범’이던 우 감비라(위)는 또 구속됐다.

2월24일, 이번에는 닐라 테인 체포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해 3월, 학생회 결성을 금지한 교육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벌어졌을 때 배후 조종을 했다는 혐의다. 짐미는 전화 및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아내의 구속을 예상하지 못했다”라고 했다. “이제 곧 민주정부가 들어설 것이고 나라 상황이 좀 달라졌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닐라 테인은 집시법(Peaceful Assembly and Peaceful Procession Law) ‘제18조’ 위반에 걸렸다. “허가 없는” 집회 시 6개월 징역형이나 3만 차트(약 3만원)의 벌금을 물린다는 조항이다. 액수는 그리 크지 않지만 닐라 테인은 거부하고 있다. 수사에도 협조하지 않겠다며 사보타주 중이다.

2014년 12월 구속됐던 토지주권 운동가 틴 툰 아웅 역시 같은 이유로 10달러의 벌금 대신 감옥을 선택한 적이 있다. 벌금을 내는 건 유죄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정치범 명단을 채우는 농민과 빈민들

2010년 11월13일 아웅산 수치가 가택연금에서 석방된 후로 미얀마는 개방 노선을 걸어왔다. 고무적인 진전은 두 가지였다. 언론 사전검열 폐지로 언론의 자유가 대폭 확대되었고, 정치범이 대거 석방되었다. 군사정부 시절 2000명을 웃돌던 정치범은 2월18일 현재 복역 중인 인원 87명, 재판 중인 409명을 합해 총 500명가량 된다.  

그러나 정치범이 재생산되는 구조는 여전히 작동 중이다. 감비라와 닐라 테인이 다시 감옥으로 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짐미는 작금의 정권교체기에 기성 권력이 자신들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방편으로 체포를 남발하고 있다고 봤다. 3월10일 NLD는 대통령 후보로 아웅산 수치의 오랜 측근이자 한때 운전기사 노릇을 했던 우 틴 초(U Htin Kyaw)를 지명했다. 사실상 아웅산 수치를 수장으로 하는 ‘민주정부’ 출범은 이제 3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경찰력은 내무부 직속 관할이고 2008 미얀마 헌법에 따라 내무부는 대통령이 아니라 군 참모총장의 명령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

또 다른 구조도 있다. 개방 노선 후 정치범 구도에 변화가 왔다. 과거 정치범이 주로 학생, 지식인 등 사상의 자유를 중심에 두고 싸운 ‘양심수’ 위주였다면, 개방 후 5년여간 미얀마의 감옥에는 농민과 빈민들이 정치범에 명단을 올리고 있다. 2000년부터 타이에 본부를 두고 미얀마 정치범을 지원해온 미얀마정치범지원연대(AAPP)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현재 복역 중인 정치범 87명 중 29명이 농민이다. 단일 직업군으로는 가장 많다. 개방정책에 따라 공격적 개발 붐이 일었고 땅을 빼앗긴 농민, 빈민들의 반대 시위는 2012년 이래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그 시위에 참여한 농사꾼, 주민 그리고 이들과 연대해온 토지 주권 운동가들이 대거 구속되면서 일종의 정치범 신세대가 되었다. ‘장미’를 좇던 양심수가 북적대던 감옥으로 ‘빵’을 사수하려던 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물론 양심수는 여전히 존재한다. 닐라 테인이 잡혀갔듯 교육법 개정에 반대했던 학생운동 지도부는 죄다 감옥에 있다. 언론 자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확대됐지만 그렇다고 언론인 정치범이 사라진 건 아니다. 현재 10명의 언론인이 정치범 명단에 올라 있다.

특히 군의 화학무기공장 건설 의혹을 제기했던 〈유나이티 위클리(Unity Weeky)〉 기자들은 편집장 포함 5명이 ‘국가기밀누설’죄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감옥에 갇힌 기자 중에는 감비라의 매제 루 모 나잉도 있다. 이들에게는 ‘1923 국가기밀법(1923 State Secret Act)’이 적용됐다. 이 역시 식민지 시절 법이다.

또 다른 유형의 정치범도 있다. 최근 수년간 불거진 종교분쟁은 칼럼니스트 틴 린 우같은 인물도 양심수로 만들었다. 그는 지난해 10월 문학축제에서 “인종과 종교로 특정 커뮤니티를 차별하는 건 불교의 교리에 어긋난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NLD 정보국장도 역임한 틴 린 우는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종교 갈등을 부추긴” 죄로 구속 수감 중이다. 중노동을 포함한 2년형을 선고받았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테인 세인 대통령은 감비라가 체포되고 사흘 뒤인 지난 1월22일 52명의 정치범을 포함한 102명을 석방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누구도 포함되지 않았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유명했던 정치범 아웅산 수치가 대통령 위에 군림하는 시대가 왔다. NLD 정부가 실질적으로 펼 수 있는 개혁은 그리 많지 않고 한계는 너무 자명하다. 그런데도 바로 실행할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대통령 사면권 발동이다. 정치범 전면 석방, 이는 아웅산 수치 정부가 가장 신속하게 주도해 선보일 수 있는 첫 번째 과제다.

기자명 방콕·이유경 (프리랜서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