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은 각 기업에 ‘청소년 캠프’를 기획해 8월15일 행사에 동원하라는 공문(위)을 보냈다.
“지금이 3공화국 시절인가? 가뜩이나 할 일 많은 기업한테 어린 애들이나 동원하라니 말이 되나? 몇 백명씩 데려오라고 할당량까지 던져주고, 비용은 기업에서 대라고 한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라면서 말도 안 되는 일로 기업의 팔이나 비튼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소속 기업의 한 관계자가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의 화를 돋운 것은 전경련이 보낸 공문이었다. 전경련은 7월 중순 회장단 그룹과 10대 그룹사에 ‘청소년 대한민국 대장정 협조 요청’ 공문을 보냈다. 건국 60주년을 맞이해 ‘청소년 대한민국 대장정’ 행사를 개최하려고 하니 기업은 10세 이상 30세 미만 청소년 100~500명씩 모아 캠프를 열고, 캠프 참가자들을 8월15일 경복궁으로 집결시키라는 내용의 공문이었다. 캠프 테마까지 제시했다. 건국 60주년 행사임을 감안해 국토대장정, 안보대장정, 나눔대장정, 역사·문화 대장정, 경제대장정, 환경대장정 6가지 테마별로 프로그램을 편성하라는 제안이었다.

이 공문이 각 회원사에 전해지면서 기업 관계자의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한 기업 관계자는 “이런 행사를 하려면 사전에 논의를 하거나 적어도 올해 초부터 준비했어야 하는데, 한 달 만에 졸속으로 조직하라니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명씩 모았다가 식중독 사고나 예기치 않은 사고라도 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나. 얼마 전 국토순례를 떠났던 여대생이 사망한 사건 때문에 해당 기업도 곤욕을 치렀다. 임직원 자녀를 동원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라고 걱정했다.

기업 “울며 겨자 먹기로 직원 자녀 동원”

전경련이 매년 개최하는 프로그램이거나 회원사와 협의해 일찍부터 기획한 프로그램이이었다면 불만의 목소리가 밖으로까지 새어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특별한 배경 없이 전경련이 자체적으로 기획한 일이라면 기업 사정에 따라 협조하거나 무시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 행사의 기획 의도와 배경을 아는 기업 처지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공식 협조를 요청했지만 비공식으로는 할당량까지 정해주면서 거절하지 못하게 했다. 대통령의 사돈이 회장으로 있는 전경련이 정부와의 교감 아래 기획한 행사여서 기업 처지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협조할 수밖에 없다”라고 털어놓았다.  

사건의 발단은 8·15 행사에 있다. 정부는 오는 8월15일 ‘건국 60년 및 광복 63주년 중앙경축식’을 대대적으로 기획 중이다. 군중 수만명을 모아 옛 중앙청사(경복궁) 자리에서 시끌벅적하게 행사를 치르겠다는 목표다. 관건은 사람 동원. 정부가 잡고 있는 행사 참석 규모는 장내 7000명, 장외 2만명 정도. 자발적인 참가자로만 채우기에는 만만치 않은 숫자다. 실제로 예년 행사와 달리 참가자 모두에게 선물을 주겠다는 미끼까지 던졌지만, 7월25일 현재 2000명 정도만 신청한 상태다. 정부는 인터넷을 통해 자발적인 참가 신청을 받는 동시에 ‘조직적인 동원’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전경련이 ‘조직 동원’의 총대를 멘 덕에 정부는 걱정을 덜었다. 전경련이 경제계, 시민사회 단체와 더불어 ‘청소년 대한민국 대장정’ 프로그램을 기획해 청소년 1만명을 행사장에 결집시키기로 정부에 약속했다.
그 불똥이 기업으로 튀었고, 기업마다 청소년 캠프를 기획하느라 툴툴거리는 것이다. 

전경련은 경축식 행사에 청소년을 동원하기 위해 ‘청소년 대한민국 대장정’ 행사를 기획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기업의 사회 공헌이 요구되는 분위기여서 전경련 차원에서 사회 공헌에 나서보자고 기획한 프로그램이다. 광복절 행사를 피날레로 생각한 것은 경축식 행사가 다채로워 청소년이 그 행사들을 보며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자는 생각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행정안전부 대한민국 건국 60년 중앙경축식 실무 작업단의 한 관계자는 “전경련 행사를 정부와 협의한 것은 맞다. 중앙경축식 행사 참가자 중 1만명은 전경련 대장정 프로그램에 참석한 청소년으로 채우기로 했다. 중앙경축식 행사에 정부가 책정한 예산은 21억원 수준인데, 전경련 행사는 기획부터 예산까지 전경련이 자체적으로 다 알아서 하기로 했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학계에서는 ‘건국 60년’이라는 표현부터 잘못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는 5월22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건국 60주년 기념사업회’ 회의.
미리 기획된 행사가 아니다 보니 전경련 측은 예산을 충분히 확보한 처지가 아닌 듯하다. 전경련 관계자는 “행사 예산을 10억원 정도로 책정했는데, 생각보다 신청한 단체가 많아 예산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분배할지 고민이다”라고 말했다. 전경련은 애초 6000~1만명 정도를 대장정 행사에 ‘동원’할 계획이었다. 기업에 할당한 3000명을 빼더라도 시민단체가 모을 7000명에 대해서는 전경련이 비용을 대야 한다. 청소년 국토대장정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진행해온 한국소년탐험대 관계자에 따르면, 이런 프로그램의 경우 1주일 기준으로 보통 40만~50만원 정도 든다. 10억원으로는 2500명만 지원할 수 있는 셈이다. 전경련으로서는 예산을 늘리든 행사 참가자 수를 줄이든 계획을 수정해야 할 상황이다. 
예산을 걱정하는 전경련과 달리 참가를 신청한 단체는 참가자 모집과 프로그램을 완성하는 데 더 애를 먹는다. 워낙 급하게 기획된 행사이다 보니 대상자를 모으기가 쉽지 않고, 행사에 활용할 숙박시설을 잡기도 녹록지 않다.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국토횡단 프로그램을 중지한 채 이번 행사 참가자를 모집하는 한국소년탐험대에 전화를 걸었더니 “이 행사는 전액 무료니까 무조건 신청하라”고 부추겼다. “프로그램 내용을 본 뒤 아이의 의사를 타진해봐야 한다”라고 했더니, “프로그램의 자세한 내용은 아직 공개할 수 없으니 나중에 취소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신청해야 선착순에서 잘리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사)뉴라이트 학부모연합도 뒤늦게 소식을 듣고 7월22일부터 부랴부랴 각 시도 교육청에 공문을 보냈다. ‘청소년 대한민국 역사문화 탐방 대장정’을 기획하고 있으니 참가를 원하는 학생과 단체를 추천해달라는 협조 요청 공문이었다. 그러나 7월25일 오전 현재 신청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뉴라이트 학부모연합 나범정 사무처장은 “여행사에 연락해보니 방 잡기도 힘들다고 한다. 원래 뉴라이트 전국연합으로부터 예산을 받아 1000명 정도 모아 역사문화 탐방을 떠나려고 했는데 여의치 않을 것 같다”라고 털어놓았다.

정부가 기획하는 8·15 행사를 앞두고, 학계에서는 일찍부터 비판이 일었다. ‘건국 60주년’이라는 표현부터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단국대 한시준 교수(역사학과)는 “건국 60주년이라는 표현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무시한 처사로 이 정부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한심한지 보여주는 사례다”라고 꼬집었다. 정부는 정작 중요한 비판에는 귀를 닫은 채 전경련을 앞세워 ‘행사 인력 동원’에만 열을 올린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 같다.

기자명 안은주 기자 다른기사 보기 anjo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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