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위대한 나나이’ 조합원이 되다


구호단체가 떠나고 난 뒤

 

필리핀은 빈부 격차가 극심한 나라다. 수도인 마닐라 중심부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초대형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다. 사설 경비원의 삼엄한 경호 속에 명품 숍과 고급 외제차 행렬이 넘실대는 공간이다. 그러나 에어컨 바람 서늘한 이곳을 벗어나 땡볕 아래 거리로 발을 내딛는 순간 여행자들은 ‘리얼 필리핀’과 접속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더미 위에 아무렇게나 잠들어 있는 가족, 걸음마를 떼자마자 구걸에 나선 어린아이를 거리 곳곳에서 무시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구호단체 조끼를 입고 다니는 외국인 무리도 흔히 마주칠 수 있다. 전체 국민의 18.4%가 일일 소득 1.25달러로 살아가는 이 나라의 민낯이다.

개신교 목사 출신인 이철용 ‘캠프(CAMP)’ 대표 또한 필리핀을 처음 찾은 10년 전에는 이런 구호활동을 꿈꾸었다. 가난한 어린 시절 미국 대학생과의 자매결연으로 어렵게 학업을 마칠 수 있었던 만큼 자신도 어려운 나라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다. 다만 무료급식이나 의료·교육 봉사 등을 하는 단체는 이미 많았다. 이에 그가 눈을 돌린 것이 인터넷 신문이었다. 한국에서 장애인 관련 매체를 발행했던 경험을 살려 필리핀 약자층을 위한 무료 신문을 만들고자 했다.

ⓒ선지혜 제공캠프봉제센터에서 일하는 조합원 대부분은 ‘익팅’에서 봉제기술을 처음 배우고 자립에 성공했다.

그러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좋은 뜻을 갖고 신문을 무료로 발행해본들 읽는 사람이 없으면 헛일이었다. 무엇보다 필리핀의 낮은 인터넷 보급률이 문제였다. ‘이대로 그냥 한국에 돌아가버려?’ 고민할 무렵 필리핀 현지 구호단체인 조토(ZOTO) 친구들과 함께 들르게 된 곳이 불라칸 주에 있는 타워빌 지역이었다. 마닐라에서 북동쪽으로 40㎞가량 떨어진 타워빌은 일종의 집단 이주촌이다. 필리핀 정부는 태풍 같은 자연재해 또는 도심 재개발 등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빈민들을 마닐라 외곽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그 대상지 중 하나가 타워빌이었다.

겉보기에 타워빌은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시멘트로 똑같이 지어놓은 집 6000여 채가 늘어서 있다지만, 시내 쓰레기촌보다는 거주하기 나아 보였다. 문제는 사람들 표정이었다. “웬만하면 필리핀 사람들이 낙천적인데, 이곳 주민들은 너무 우울해 보였다.” 이유를 알아본즉 갑자기 낯선 환경에 던져진 탓이 컸다. 더 큰 문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었다. 급조된 이주촌에 일터가 있을 리 만무했다. 전기·수도세는커녕 당장 가족들이 굶지 않을 쌀 1㎏을 구할 길도 막막했다. 시내와 달리 이런 외곽의 이주촌에는 구호단체의 손길도 미치지 않았다.

결국 가장들이 돈을 벌려면 다시 마닐라로 나가 날품팔이라도 해야 했다. 출퇴근은 불가능했다. 왕복에만 4~5시간이 걸리는 데다 차비를 감당하기가 벅찼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의 귀가 주기는 점점 길어졌다. 1~2주에 한 번 집에 오던 가장이 한 달에 한 번, 분기에 한 번 얼굴을 비치다 어느 날부터는 아예 연락이 끊어지는 식이었다. 그 결과 타워빌에는 아이를 홀로 키우는 미혼모 등 여성 가장이 넘쳐났다. 이들은 하소연했다. “내게도 일자리가 있다면….”

이 대표는 이들을 돕고 싶었다. 그러나 실패의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심하던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이상헌 한신대 교수에게 자문을 했다가 뜻밖의 조언을 들었다. 이 교수는 당시 한국에서 확산돼가던 사회적 기업·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모델을 이 지역에도 적용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구호단체가 떠나고 난 뒤 기사 참조). 순간 이 대표는 무릎을 쳤다. 어찌 보면 마닐라에서의 실패는 ‘주는 쪽의 눈높이로만 상황을 재단한 것, 그리하여 상대를 철저히 객체로 소외시킨 것’에서 기인했다. 그런데 ‘1인1표’ 원칙에 의해 모두가 주인으로 참여하는 사회적 경제 방식으로 일을 조직해본다면 이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시사IN 김은남이철용 대표는 집단 이주촌인 타워빌 등에서 사회적 경제를 실험 중이다.

내수시장의 틈새를 직접 찾아 나선 조합원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2011년 7월 타워빌에는 캠프 봉제센터가 들어섰다. 실태 조사에서 여성 가장들이 가장 원하는 일자리가 봉제 분야라는 결과가 나오자 이에 따라 기술센터·봉제공장, 그리고 엄마들이 일하는 동안 아이를 돌봐줄 어린이집 등이 복합된 봉제센터를 세운 것이다. 센터 건립 비용은 함께일하는재단, 한국국제협력단(KOICA) 지원금 등으로 충당했다.

이곳 기술센터에서 봉제 기술을 익히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 노동자 수는 초창기 20여 명에서 5년이 흐른 현재 70여 명으로 늘었다. 이들 대다수는 노동자인 동시에 조합원이다. 이들은 ‘익팅’이라는 협동조합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봉제센터를 운영하고 있다(익팅은 필리핀어로 ‘불을 붙이다’라는 뜻이다). 조합원들은 직원을 뽑고, 매출 목표를 정하고, 생산량을 관리하고, 마케팅을 벌이는 모든 일을 직접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모든 조합원은 생산분과, 마케팅분과, 재정·인사분과, 교육분과 중 하나에 속하게끔 규정돼 있다(협동조합 이사장과 분과별 위원장은 1년에 한 번 직접선거로 선출한다).

물론 봉제 기술조차 서툴렀던 이들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변해갔다. 취지에 공감한 필리핀 국립대학 지역사회개발학과 학생 4~6명이 1년 내내 봉제센터에서 합숙하며 협동조합 교육과 훈련을 함께한 것이 특히 주효했다. 주당 5페소(약 130원)씩 6개월간 출자하는 것으로 조합원 자격을 획득하는 이들은 매달 총회를 열어 지난달 매출을 결산하고 배당(임금)을 결정한다. 1월에도 조합원들은 배당을 50%로 할 것이냐, 60%로 할 것이냐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결론은 50%. 올해 경기 상황이 불안정한 만큼 눈앞의 이익을 택하기보다 미래를 대비하기로 한 것이다.

초창기 80%에 달했던 한국 시장 의존 비율을 20%대로 끌어내린 것도 조합원들이었다. 한국의 공정무역 마켓 등에만 의존해서는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여긴 이들은 내수시장의 틈새를 직접 찾아 나섰다. 그 결과 주목한 것이 유니폼 시장이다. 필리핀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유니폼을 즐겨 입는다. 일반 회사도 마찬가지다. 그런 만큼 조합원들은 일차로 지역사회에 있는 학교들에 직접 연락을 취했다. 샘플을 보내고, 익팅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이렇게 몇몇 학교의 교복 수주에 성공하자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재하청을 받아 만들던 맥도날드 사 유니폼에도 눈을 돌렸다. 기왕이면 직접 하청을 받아 도급 단가를 높이자는 것. 어찌 보면 무모할 수도 있는 이 계획은 조합원들이 직접 맥도날드 본사를 찾아가 담판을 벌임으로써 현실이 됐다.

3년째 열리는 패션쇼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합원 손으로 기획한다.

이들의 앞날이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2015년의 경우 익팅의 생산량은 늘었는데 이익은 전해보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당 또한 다른 지역 봉제공장보다 30%가량 적은 200~250페소(약 5150~6450원) 수준이다. 그럼에도 찰리 레예스 씨(43)는 “높은 임금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난생처음 내 기술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입사한 그는 마닐라 쓰레기촌 출신이다. 술에 찌들어 살던 중 익팅을 알게 돼 4개월간 봉제 훈련을 받고 국가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조합원으로서 자치와 자율을 체험하면서 이들의 자긍심은 더 커진다. 조합원들은 외부인들의 견학 프로그램도 직접 진행한다. 필리핀 사람들은 그간 외부 구호단체 대표들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면 이를 일방적으로 듣는 의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런 식의 ‘무늬만 교류’ 프로그램이 적어도 익팅 내에서는 사라진 것이다. 3년 전부터는 봉제센터 패션쇼도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자기들이 디자인해 만든 옷을 직접 입고 선보이는 패션쇼로 무대 세팅에서 쇼 기획, 바이어에 대한 초청장 발송까지 모든 것을 조합원 힘으로 해결한다.

최근 봉제센터 옆에는 양계장이 들어섰다. 주민들의 일자리 소득 기회를 더 늘리기 위해서다. 이곳에 친환경 양계 기술을 전수 중인 이호용 상지대 생명과학과 교수는 “아무리 많은 돈과 최신 기술을 이전한다 하더라도 주민들이 바뀌지 않고서는 한계가 있더라는 것이 그간 국제 구호단체들이 내린 결론이다. 익팅의 실험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라고 말했다. 이철용 대표의 바람대로 ‘위대한 나나이(엄마)들의 힘’은 과연 지역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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