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독자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 그런 책을 만난 사람이 못 만난 사람보다 더 운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 예컨대, 올해 들어서야 독일에서 비판적 주석을 붙여 출간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오래전부터 한국에서 해적판으로 나돌았지만, 그 책을 읽고 감명받아 파시스트가 된 사람을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야. 물론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게 책만은 아니지. 스승, 부모를 비롯한 가족, 특이한 경험들, 그 밖에도 많겠지. 내 경우는 삶이 책이라는 거푸집을 통해 빚어진 것 같아. 책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은 독자의 사상이나 이념의 수준에서도 가능하고, 직업의 수준에서도 가능해. 그리고 때때로 그 둘은 서로 길항하기도 하지.

내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준 책은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과 존 롤스의 〈정의론〉이었어. 나는 그 책들을 대학교 1학년 때 읽었어. 영어로!(이건 물론 잘난 척이야!) 이 두 책은 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을 완전히 차단해버렸어. 내가 그 책들을 읽지 않았으면, 나도 젊은 시절 한순간 설익은 마르크스주의자 노릇을 했을지도 몰라. 물론 나는 그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에서 레닌과 스탈린을 거쳐 심지어 김일성 선집까지 읽었지만, 마르크스주의나 유사 마르크스주의는 내게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어.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랑 〈정의론〉이라는 백신이 워낙 효능이 좋았던 거지.

희이지영 그림

가만있자, 아직도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국가보안법 때문에 변명을 하자면, 내가 김일성 선집을 읽은 건 서울 광화문우체국 옆에 있던 통일부 도서관에서였어. 초년 기자 시절이었는데, 편집국장의 허락을 받으면 그곳을 출입하게 해주었어. 이 도서관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지는 모르겠네. 아무튼 북한에서 나온 책들로 가득한 도서관이었어. 물론 열람만 할 수 있었을 뿐, 대출도 할 수 없었고 복사도 할 수 없었어. 노트에 메모하는 건 가능했지만. 그때 김일성 선집을 읽으며 느낀 건 극도의 허탈함이었어. 레닌이나 심지어 스탈린의 책조차도, 결국은 틀린 말들이지만, 나름대로 이론의 꼴을 갖추고 있었어. 그런데 김일성 선집이라는 건, 연설이나 교시를 모아놓은 건데, 무슨 도덕 교과서 같았어. 반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나머지 반은 너무나 당연해서 할 필요가 없는 말들이었어. 본디 마르크스주의나 유사 마르크스주의와는 인연이 없던 나지만, 김일성 선집을 읽고는 ‘아디오스, 마르크스!’ 소리가 나오더구먼.

10대 후반 청계천 헌책방에서 만난 〈우리말본〉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랑 〈정의론〉이 나를 보호해준 것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만이 아니야. 어쩌면 민족주의에서 나를 보호해준 몫이 더 큰 것 같기도 해. 열아홉 살에 그 두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민족주의에 꽤 끌리고 있었거든. 그리고 나를 민족주의로 이끈 것은 10대 후반 내내 읽은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의 책들이었어. 최현배는 언어학이라는 ‘과학’에 민족주의라는 ‘이념’의 베일을 씌울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을 지닌 학자였어. 〈조선민족 갱생의 도(道)〉라는, 언어학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민족주의 선동서를 쓰기도 한 그는 언어학 책들에마저 민족주의라는 빛깔의 페인트칠을 했어. 나는 10대 후반에 외솔의 책을 거의 다 읽은 것 같은데, 그 책들이 나를 소박한 민족주의자로 만든 거야. 그리고 그 민족주의를 말끔히 씻어준 것이 포퍼와 롤스의 책들이었고.

앞서 얘기했듯 책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은 직업 수준에서이기도 해. 10대 후반 내내 외솔의 책들이 내게 주입한 민족주의를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말끔히 씻어버렸지만, 결국 그 책들은 내 삶에 영향을 주었어.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했던 내가 대학원에서는 언어학을 전공하게 만들었거든. 일일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스물예닐곱 권의 책을 쓴 것 같아. 그런데 그 가운데 적어도 3분의 1은 언어학과 관련된 책이야. 그 가운데는 〈감염된 언어〉처럼 학술서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는 책도 있지만, 대개는 언어와 관련된 비평적 에세이들이지. 나는 그 책들을 내가 쓴 소설이나 정치평론보다 더 소중히 여겨.

내가 처음 읽은 외솔의 책은 〈우리말본〉이야. 열여섯 살 때인가 열일곱 살 때인가 그랬을 거야. 그때 나는 학교에서 내쳐진 ‘비행’ 청소년이었어. 어디로든지 날아갈 수 있는! 그 책을 산 건 서울 청계천의 한 헌책방이었어. 지금도 청계천에 그 흔적이 남아 있긴 하지만, 1970년대에는 청계천 4가쯤부터 동쪽으로 헌책방이 끝없이 들어서 있었어. 그 책방들을 순례하는 것이 학적 없는 비행 청소년의 커다란 기쁨이기도 했고. 그 책방들 중 하나에서 이름만 들어본 〈우리말본〉을 발견한 거야. 그 책은 어찌어찌해서 지금까지 지니고 있는데 판권 페이지를 보니 이렇게 써 있네. “1929년 3월29일 첫째매 펴냄, 1937년 2월20일 온책 초판 펴냄, 1965년 4월1일 네 번째 고침 펴냄.” 1965년이면 지금으로부터 반세기도 더 전이군. 나는 책을 잘 간직하지 않는 터라, 어쩌면 이 책은 내가 지니고 있는 한국어 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지도 몰라.

책을 사온 날 저녁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재미있었는지(10대 비행 청소년에게 문법학의 고전이 재미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푹 빠져서 채 사흘도 안 돼 다 읽어버렸어. 신기한 건 이 책에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이 거의 없었다는 거야. 〈우리말본〉은 지금까지도 한국어 문법책 가운데 고전으로 꼽히는 책인데, 10대의 내가 이 책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은 조금 과장일지도 몰라. 아무튼 그때는 그랬어.

〈우리말본〉은 지금의 학교 문법과 체계도 조금 다르고, 무엇보다도 용어가 아주 달라. 견결한 언어민족주의자였던 외솔은 일본에서 수입된 한자어 용어를 거의 다 고유어로 고쳤어. 예컨대 ‘불구동사’는 ‘모자란 움직씨’로, ‘의문문’은 ‘물음월’로, ‘서술형’은 ‘베풂꼴’로, ‘호격조사’는 ‘부름자리토’로, ‘양성모음’은 ‘밝은홀소리’로 고쳤지. 10대의 나는 이런 소박한 민족주의에 매혹돼버린 거야. 이런 단어 다듬기가 지적 성취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좀 더 나이가 들어서야. 〈우리말본〉이 내게 그렇게 큰 영향을 줬는데도, 지금의 나는 ‘이름씨’라는 말보다는 ‘명사’라는 말을 사용하고, ‘움직씨’라는 말보다는 ‘동사’라는 말을 선호하고, ‘그림씨’라는 말보다는 ‘형용사’라는 말이 편안해. 사실 이런 고유어 용어를 만드는 데 외솔이 사용한 방식은 언어학에서 ‘번역 차용(loan translation)’ 또는 캘크(calque)라고 부르는 베끼기일 뿐이야. ‘누선’을 ‘눈물샘’이라고 ‘베껴본들’, 거기서 어떤 지적 진전이 이뤄지는 건 아니지. 다만 민족주의적 허영심을 만족시킬 뿐. 그리고 이런 베끼기식으로 만든 고유어 용어들은 언중에게 뿌리내리기도 쉽지 않아.

그러나 〈우리말본〉은 1920년대까지 축적된 한국어 문법학을 집대성한 책이야. 1937년판에 외솔이 적은 서문은 한때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바 있어. 그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해. “한 겨레의 문화 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 이제 조선말은, 줄잡아도 반만년 동안 역사의 흐름에서, 조선 사람의 창조적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성과의 축적의 끼침이다.” 이 서문의 끝에 외솔은 ‘감메 한 방우 적음’이라고 썼어. ‘외솔’이라는 고유어 호도 성에 안 차 이를 ‘감메’로 바꾸고 ‘최현배’라는 성명은 ‘한 방우’로 바꾼 거지.

오늘날 읽으면 〈우리말본〉의 내용이 고졸(古拙)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겠지. 그러나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는 게 좋아. 독자들의 독서 의욕을 잃게 할지 모를 사족: 외솔은 이 방대한 책을 쓰면서 한국어문법을 독창적으로 세웠을까? 그렇지 않아. 그 당시 조선은 이식된 일본이었어. 〈우리말본〉도 그 예외가 아니야. 일본의 국수주의 언어학자 야마다 요시오의 그림자가 이 책 곳곳에 드리워져 있어. 슬프게도, 냉정하게 말하자면, 외솔은 야마다의 언어국수주의를 조선의 언어민족주의로 번역한 것일 뿐이야.

기자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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