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말에 이사를 했다. 8년 넘게 살았던 원룸보다 훨씬 넓고 시설도 좋은 7평(약 23㎡)짜리 원룸이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이지만 춤과 자전거로 단련된 허벅지가 있는 내게 그쯤이야. 커다란 붙박이장과 신발장이 있어서 수납공간도 넉넉하다. 커다란 창이 두 개라 환기도 잘 되고 채광도 좋다. 오전에는 부엌 창으로, 오후에는 침대 쪽 창으로 햇볕이 쨍쨍하게 든다. 꼭대기 층이라 겨울에 다소 추울 것을 각오했는데 웬걸, 집이 따뜻해서 가스비도 적게 나온다. 무엇보다도 집세가 매우 착하다. 보증금도 훨씬 싸거니와 월세가 10만원이 채 안 된다.

새 집주인은 SH공사다. ‘기존주택매입임대 입주 대기자 공고’를 보고 신청해 입주하게 됐다. 자격을 계속 유지한다면 계약을 아홉 번까지 갱신할 수 있다. 기초생활수급자와 보호 대상 한부모 가족 등이 1순위로 신청할 수 있었는데, 우리 구에서는 그 1순위가 미달됐다. 2순위 신청을 받던 날 지원 서류를 냈고 몇 달 뒤 당첨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확인했다. 계약 기간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이사를 하면서 잠깐 마음고생을 했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채 계약금을 치르느라 지인에게 돈을 빌렸다. 잔금을 치를 때는 은행 대출을 받았다. 두 달간 이전 집과 지금 집에 이중으로 월세를 냈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영희 그림〈/font〉〈/div〉

이사를 오면서 이전 집에서 쓰던 낡은 가구와 살림살이들을 거의 다 버렸다. 어차피 제대로 된 가구가 아니라 공간박스나 플라스틱 서랍 따위를 두고 살았으니까. 그동안 살림살이는 무얼 사든 무조건 제일 싼 걸로 샀다. 커튼도 달지 않았다. 이사 온 후 광명에 있는 유명 조립가구 매장에 드나들었다. 매장에서 집어온 카탈로그를 거의 한 달간 매일 들여다보며 머릿속에서 가구를 이리저리 배치했다. 집 근처에 있는 인테리어 소품점에도 자주 들렀다. 무조건 싼 것이 아니라, 튼튼하고 실용적이면서 가격 대비 성능이 좋고, 그러면서도 ‘예쁜’ 것들로 가구와 살림살이들을 골랐다. 눈이 펑펑 오던 어느 날엔 회사에 휴가를 내고 5층 창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정성스레 유리창을 닦고 뽁뽁이도 붙였다. ‘집밥’을 제대로 해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식칼도 샀다. 새집에 설치돼 있는 전기레인지 화구에 맞춰 아담한 크기의 새 냄비와 프라이팬도.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창에 커다란 암막 커튼을 사서 달았다. 가족과 친구들은 제 일처럼 기뻐하며 온갖 예쁜 것들을 앞다투어 집들이 선물로 주었다. 휴지에 그릇, 통삼중 스테인리스 냄비, 갓 달린 향초, 찻잔 세트, 심지어 전기밥솥에 에어컨, TV까지.

나보다 더 절실한데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사는 곳이 안정되니 생활 전반이 안정되는 느낌이다. 청소하고 정돈하고 집을 꾸미는 데에 관심이 생긴 것은 물론이고 예전보다 자주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사위가 조용한 밤엔 한결 평온한 기분이다.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는 때가 많아졌다. 보증금을 돌려받고 남은 돈으로 빚과 대출금 일부를 갚고, 이제 적금을 들 궁리를 하고 있다. 미래를 보고 준비할 수 있는 삶이라니, 이런 게 사람답게 사는 거지!

이곳에 살 수 있게 된 것은 내가 저소득자이기 때문이다. 전년도 도시근로자의 월평균 소득의 50% 이하인 무주택자, 그게 2순위 신청 자격이었다. 40대가 되도록 저소득에 가난해서 오히려 쥘 수 있게 된 안정감이란 게 아이러니지만, 이런 거야말로 현대사회가 보장해줘야 하는 기본 복지 중 하나 아닌가. 하지만 종종 마음에 걸린다. 나보다 더 가난하고 더 절실하게 필요한데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보증금을 마련할 수 없어서 지원 자체를 포기한 사람들, 돈을 빌릴 지인도 없고 은행 대출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서류상 가족이 있고 당장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하지만 그러지 못해 지원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 여전히 집다운 집에서 살고 있지 못한 사람들…. 7평 원룸 하나가 사람의 삶을 이렇게 바꿔놓을 수 있는데, 이런 변화가 더 많은 이들에게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기자명 김숙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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