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가 세계 최고의 바둑기사 이세돌과 겨루고, 로봇 기술과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쏟아지면서 기술에 대한 체념 섞인 공포감이 커지고 있다. 기술이 보여주는 미래가 한편으론 신기하지만 인간의 삶을 순식간에 파괴할 가능성도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술을 외면하고 살 수 있을까? 기술을 가지고 노는 유쾌한 반란을 꿈꿔보는 것은 불가능할까?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이 사활을 걸고 추진해온 테러방지법을 정의화 국회의장이 ‘국가비상사태’라며 직권상정한 직후, 야당은 즉각 반발하며 필리버스터로 대응했다. 시민단체와 누리꾼들도 기민하게 움직이는 중이다. 이제 막 시작된 테러방지법 저지 운동과 관련해 주목할 현상은 이 운동을 지원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필리버스터닷미(http://filibuster.me/)는 법안이 직권상정된 지 24시간이 되기도 전에 오픈되었다. 필리버스터닷미는 단상에서 반대 토론을 하는 의원들의 입을 빌려 시민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사이트인데, 하루가 지나기 전에 약 2만여 개 시민 목소리가 올라왔다. 단상에 오른 의원들은 발언 중 이 사이트에 올라온 시민들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시민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의원들이 하도록 하고, 의원들에게는 단상에서 말할 거리를 제공해주는 1석2조를 노린 필리버스터닷미의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20년 가까이 인터넷 산업에 종사한 필자로서는 하루 만의 대응이 얼마나 피 말리는 작업인지 잘 알기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필리버스터닷미 갈무리시민의 목소리를 전하는 필리버스터닷미(위)는 법안이 직권상정된 지 24시간이 되기도 전에 오픈됐다.

‘진짜 국가비상사태’를 맞이한 누리꾼들

구글 독스(Google Docs)를 활용한 필리버스터 시민 참여 아카이브(https://t.co/mOf4yot0T1)도 열렸다.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나 편집 가능한 이 페이지에는 필리버스터 진행 현황, 여론조사 현황, 관련 사이트 정보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다. ‘유쾌한 민주주의 플랫폼’을 표방한 빠띠(parti.xyz)도 급히 문을 열었다. 빠띠는 누리꾼들이 서로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좀 더 심도 깊은 토론을 해보자는 취지의 온라인 토론 플랫폼이다. 테러방지법에 반대하는 45개 시민단체는 직권상정 전날인 2월22일 공동으로 테러방지법 반대 서명운동 페이지를 열었는데 사흘 사이 23만명이 넘게 서명했다. 구글 독스의 서명 기능을 활용한 시민단체의 발 빠른 대응에 시민이 발 빠르게 호응한 것이다. ‘진짜 국가비상사태’를 맞아 어디선가 또 다른 이들은 밤을 새우며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사회운동에서 인터넷이 핵심 도구로 활용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홍콩의 우산혁명에서도, 스페인의 포데모스에서도 SNS와 동영상 사이트 그리고 각자의 필요에서 만든 여러 용도의 인터넷 서비스들은 새로운 정치운동을 열어주는 핵심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특히 올해 총선을 앞두고 선거 감시, 선거 관련 정보 공유, 투표 독려 등 여러 형태의 정치 관련 온라인 서비스들이 준비 중이다. 기술에 주눅 들지 않고, 기술을 가지고 놀며 유쾌한 반란을 꿈꾸는 디지털 게릴라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기자명 전명산 (정보사회 분석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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