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창대했다 그 끝은?
  • 이오성 기자
  • 호수 442
  • 승인 2016.02.29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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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로 야권이 오랜만에 정국의 중심에 섰다. 야권 지지층의 호응도 뜨거웠다. 하지만 선거구 획정과 테러방지법 저지 사이에 낀 야권의 고민이 깊어간다. 필리버스터에 대한 찬반 의견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커버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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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창대했다 그 끝은?

 

필리버스터 72시간 (2월26일 오후 7시 현재)

 
 

아주 오랜만에 야권이 정국의 중심에 섰다. 노동시장 구조개혁, 국정교과서 추진, 위안부 문제 졸속 협상 논란에 이은 개성공단 전면 폐쇄까지, 정부·여당의 독주에 휘둘리기만 했던 야권이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2016년 2월 말은 ‘필리버스터 정국’으로 기억될 것이다.

야권 지지층의 호응도 뜨거웠다. SNS에서는 야당 국회의원들의 헌신적인 필리버스터 릴레이를 지켜보며 비로소 ‘대의제 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인했다는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여세를 몰아 정국 반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물론이고 아예 총선 연기까지 감수하고 필리버스터를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본회의장 밖에서 새누리당 박윤옥(왼쪽)·안상수 의원이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의 온도는 사뭇 달랐다. 지지층의 열광이 커질수록 필리버스터를 이끌고 있는 야권의 고민도 깊어갔다. 필리버스터의 첫 테이프를 끊은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2월26일 자신의 SNS에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선거구 획정안을 처리하려면 필리버스터를 멈춰야 하고 테러방지법은 원안대로 통과되게 됩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선거구 획정이 우선일지, 필리버스터 지속이 우선일지 의견 주세요.”

아이러니하게도 야권의 고민은 필리버스터와 함께 시작됐다. 필리버스터는 ‘퇴로’가 없는 카드였다. 야권이 필리버스터를 강행하면서 주장할 수 있는 협상 카드는 딱 한 가지였다. 테러방지법의 독소 조항을 수정하는 것. 애초부터 이것이 최소이자 최대치였다.

처음부터 한계가 명확했다. 총선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국회를 한없이 공전시킬 수는 없었다. 1년 넘도록 선거구를 획정하지 못하면서 19대 국회는 역대 최악이라는 여론의 뭇매를 맞아왔다. 선거구가 불확실한 지역의 원외 총선 예비주자들의 불만도 턱밑까지 차올랐다. 현역 의원들에게 유리하도록 일부러 선거구 획정을 질질 끄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선거구 획정 지연이라는 부담 속에서 시작한 필리버스터는 ‘시한폭탄’을 품에 안고 전장에 뛰어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총선 연기까지 감수하자는 야권 지지층 일부의 의견은 물색없는 소리다. 사상 초유의 총선 연기 사태가 벌어지는 순간, 필리버스터 정국을 이끈 야권이 천문학적인 ‘독박’을 뒤집어쓸 것이 뻔하다. 국민의당마저 필리버스터에 거리를 두는 행보를 보이면서, 선거구 획정 지연 등 19대 국회의 모든 책임을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이 덤터기 쓸 공산이 크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필리버스터가 70여 시간째 진행 중인 2월26일 오후 국회 소회의실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가 열렸다. 필리버스터 정국의 마지노선은 3월10일이다.

새누리당은 크게 잃을 것이 없다. 야권의 카드는 처음부터 다 파악됐다. 테러방지법 원안 통과를 고집하면서 국회 공전의 책임을 야권에 돌리면 그만이다. 새누리당의 법안 밀어붙이기에 대한 책임론도 불거지겠지만, 언론 지형이 새누리당에 기울어 있다. 필리버스터 정국이 계속될수록 보수 언론은 야권에 집중포화를 가할 것이다. 조원진 의원 등 일부를 빼면 새누리당 지도부 대다수가 본회의장 밖에서 ‘여유 있게’ 팔짱을 끼고 있는 이유다.

정국의 엄중함에 비하면 새누리당의 태도는 ‘관망’에 가까웠다. 필리버스터 첫날만 해도 “국민 안전에 대한 테러를 벌이고 있다”라며 강력 반발했던 새누리당은 시간이 흐르면서 “총선용 얼굴 알리기 이벤트 아니냐”라는 비아냥조로 선회했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야권이 제풀에 지쳐 떨어질 것이라는 판단이다. 필리버스터 정국이 최고조에 이른 2월25일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필리버스터에 들어간 것이 얼마나 바보짓이었는지 두고 보면 알 것이다. 전체 여론은 야권의 편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테러방지법 저지와 총선 사이에서 발목 잡힌 야권이 여론의 부담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여론은 찬반이 팽팽하다. 2월24일 CBS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전국 성인 532명을 대상으로 필리버스터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은 결과 ‘찬성 42.6% 대 반대 46.1%’로 오차범위 내에서 팽팽하게 맞섰다. SNS상의 뜨거운 반응과는 온도 차가 있다. 리얼미터 관계자는 “필리버스터는 2030 SNS 이용자 중심으로 뜨겁게 반응하는 이슈로 파악된다. 이를 계기로 오히려 새누리당 지지층이 결집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앞으로 찬반 여론이 팽팽하게 지속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테러방지법이 진영 논리로 갈리기 쉬운 이슈인 만큼, 여론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 일은 없으리라는 분석이다.

재외국민 선거인 명부 작성 기한이 3월4일

필리버스터 정국의 마지노선은 3월10일이다. 이날 2월 임시국회가 끝난다. 임시국회가 끝나는 순간 필리버스터도 자동 종료된다. 4월13일 총선을 딱 33일 남긴 시점이다. 이때까지 국회 본회의에서 선거구획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총선 일정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당장 선관위가 계획한 재외국민 선거인 명부 작성 기한이 3월4일이다.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자칫 총선 연기가 현실화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새누리당은 필리버스터 정국이 3월10일까지 이어져도 불리할 것이 없다는 태도다. 3월10일 2월 임시국회 종료 이후 다시 본회의를 열어 테러방지법 ‘원안’을 통과시키면 그만이다. 더불어민주당 핵심 당직자의 말처럼 “악법은 악법대로 통과시켜주고, 총선은 총선대로 죽 쑤는 최악의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당직자는 “솔직히 뚜렷한 해법은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필리버스터는 정부·여당이라는 거대한 바위에 야권이 던진 계란이었다. 지지층은 열광했지만, 바위는 꿈쩍하지 않았다. 테러방지법처럼 이념적으로 갈리기 쉬운 이슈에 승부수를 던진 것이 야권의 실책이었을까. 현실은 냉엄하지만, 단정하기는 이르다. 필리버스터가 촉발한 에너지가 어디로 수렴될지 아직은 모른다. 2016년 2월 말의 정치사를 기록한 페이지는, 승자가 어느 쪽이든 희비가 엇갈릴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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