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민주주의의 시간
  • 천관율 기자
  • 호수 442
  • 승인 2016.03.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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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는 살아 있는 세대 대부분이 처음 보는 풍경이다. 야당의 필리버스터에 지지층은 온·오프라인에서 열광했다. 2012년 국회법 개정안(‘국회선진화법’)이 설계된 구조를 들여다보면 43년 만의 필리버스터 부활이라는 사건을 입체 조명할 수 있다.

은수미 의원(더불어민주당)이 10시간18분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마친 다음 날인 2월25일, 의원실 직원은 후원금 통장을 정리하느라 진땀을 뺐다. 1만원 안팎의 소액 후원금이 물밀듯 들어와서 다 정리하는 데 통장 8개가 필요했다.

박원석 의원(정의당)은 은수미 의원의 다음 차례로 나서 9시간29분 필리버스터를 마치고 내려왔다. 박 의원은 “기록 경쟁으로 가면 취지가 왜곡된다. 안기부 고문 피해자인 은수미 의원의 기록으로 남았으면 했다”라고 말했다. 기록 깨기 경쟁으로 필리버스터를 소비하던 분위기가 이 발언 이후 바뀌었다.

신경민 의원(더불어민주당)은 2월25일 필리버스터에서 “필리버스터는 새누리당 총선 공약이다. 새누리당 홈페이지에서 뽑아왔으니 직접 확인해보라”고 말했다. 직후 새누리당 홈페이지 메인 화면이 접속불가 상태가 되었다. 국회방송의 영상을 받아 필리버스터를 생중계하던 팩트TV의 서버도 동시 접속자 폭증을 감당하지 못하고 한때 마비됐다.

강기정 의원(더불어민주당)은 지역구가 전략공천 지역으로 선정되어 사실상 공천 배제 통보를 받은 날 필리버스터에 나섰다. 강 의원은 ‘한숨 요정’ ‘강블리’ ‘강 목사님의 국회복음’ ‘홀리버스터’ 등등 숱한 별명과 패러디를 이끌어내며 졸지에 인터넷 스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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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월23일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당들이 ‘테러방지법’ 저지의 마지막 수단으로 필리버스터를 뽑아든 이후,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열광에 직면했다. 〈중앙일보〉 인터넷판은 2월24일부터 필리버스터에 대한 찬반 투표를 진행했다. 필리버스터 개시 72시간째인 2월26일 오후 7시 기준으로, 투표자 10만7000명이 넘는 이례적인 참여 열기를 보이는 가운데, 야당의 필리버스터가 적절하다는 응답이 9만명을 넘겨 85%를 기록했다. 온라인 공간의 열광은 오프라인으로도 흘러넘쳤다. 국회 앞에서는 시민 필리버스터 릴레이가 열렸고, 평소에는 텅 비어 있는 국회 방청석도 지지 방문한 시민과 학생들로 자리가 찼다.</p>

<p>필리버스터는 실시간 방송을 보며 댓글로 참여하는 인터넷 특유의 놀이문화와 만나 정치인이 주인공인 ‘캐릭터 버라이어티’가 되었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을 빗대 ‘마이 국회 텔레비전’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인터넷방송 문화에 익숙한 시청자들은 정치인마다 캐릭터를 포착해 패러디물을 쏟아냈고, “별풍 쏜다”라는 말과 함께 필리버스터 의원의 후원금 계좌를 돌렸다(‘별풍선’은 유력 인터넷 실시간 방송 채널의 사이버 화폐다).</p>

<p>댓글이 2차 콘텐츠가 되고 방송인이 다시 댓글을 소개하며 노는 인터넷 방송 특유의 순환 구조마저 구현됐다. 여러 의원들이 인터넷의 테러방지법 반대 댓글을 본회의장에서 읽어 국회 속기록에 남겼다. 가장 지루하고 따분한 정치행위로 손꼽히는 필리버스터는, 가장 정치와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던 10~20대 인터넷 이용자들을 열광시키는 킬러 콘텐츠가 되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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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필리버스터는 소수당이 강하게 반대하는 법안의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지연전술이다. 재적 의원 3분의 1 이상이 찬성해 무제한 토론이 개시되면 토론자가 소진되기 전까지는 중단할 수 없다. 의사 진행은 전면 중단된다. 재적 의원의 5분의 3(300석 기준 180석)이 무제한 토론 종결동의안에 찬성하면 강제 종료가 가능하다. 필리버스터는 유신 시절인 1973년 폐지되었다가 2012년 국회법 개정으로 부활했다. 이 2012년 국회법 개정안이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으로 불린다. 국회선진화법이 설계된 구조를 들여다보면 43년 만의 필리버스터 부활이라는 사건을 입체 조명할 수 있다.</p>

<p>국회선진화법은 새누리당으로부터 ‘소수당 독재법’이라는 초현실적인 비난을 받고 있지만, 실제 설계는 그보다는 복잡하다. 국회선진화법은 일종의 맞교환 모델로, 여당도 얻는 게 있다. 예산안 합의가 11월30일을 넘길 경우 본회의에 자동으로 올라가도록 했다. 의장석 점거도 즉시 징계 절차를 밟도록 규정해 사실상 금지했다. ‘예산안 연계 투쟁’과 ‘의장석 점거 투쟁’이라는 야당·소수당의 고전적 무기가 봉쇄된다.</p>

<p>반대로 국회선진화법이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권한을 크게 축소한 것은 소수당의 협상력을 높여준다. 국회선진화법은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할 수 있는 상황을 천재지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로 한정했다. 비상 상황이 아닌데도 의장이 직권상정을 하려면 역시 재적 의원의 5분의 3이 필요하다. 직권상정을 상당히 까다롭게 만들어 다수당의 무기를 봉쇄했다.</p>

<p>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18대 국회에서는 수시로 물리적 충돌이 벌어졌다. 이명박 정부는 종합편성채널 도입과 4대강 사업 등 논란 많은 국책사업을 직권상정으로 강행 처리하는 길을 즐겨 택했다. 야당은 여당의 강행 처리와 지지층의 저지 압력 사이에 끼여 물리력 외에 대안이 없는 상황으로 자주 몰렸다. 18대 국회가 끝나갈 즈음에는 물리적 충돌이 반복되는 후진성을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국회선진화법은 19대 총선 직후이자 18대 국회 임기 막바지인 2012년 5월에 본회의를 통과했다.</p>

<p>국회선진화법은 일종의 상호 군비 감축 협약이었다. 소수당·야당은 ‘예산안 연계 투쟁, 의장석 점거 투쟁’을 내려놓고 다수당·여당은 ‘직권상정’을 내려놓는 맞교환이 핵심 뼈대다.</p>

<p>단순다수 소선거구제가 주력인 한국의 선거제도에서는 1당과 2당은 대체로 득표율보다 많은 의석을 얻는다.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246곳 지역구 선거에서 43.3%를 득표했지만 지역구 의석 점유율은 51.6%였다. 투표자 과반의 지지를 받지 않은 정당이 선거제도에 힘입어 의석 과반수를 차지했다는 이유로 모든 법안을 강행 처리해도 되느냐는 문제가 지적되었고, ‘국회에서 마음대로 굴려면 50%가 아니라 60%를 넘겨라’로 요약할 수 있는 국회선진화법이 등장했다.</p>

<p>이런 설계가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고 강력하다. 상호 군축을 실현한 새로운 게임의 룰을 적용하였을 때, 국회 운영의 핵심 변수는 다수당의 능력이다. 소수당이 반대하는 법안을 다수당이 통과시키려면 둘 중의 하나를 이뤄내야 한다. 소수당이 수용할 만한 타협과 맞교환의 패키지를 짜거나, 소수당이 버틸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여론 압박을 만들어내야 한다. 군축 협상이 단독·강행 처리라는 무기를 제약해버렸기 때문에 다수당은 이제 ‘거래’와 ‘압박’ 둘 중 하나에는 유능해야 한다. 국회선진화법은 본질적으로 다수당에 유능해질 것을 요구하는 제도였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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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청와대에 눌리자 ‘게임의 룰’ 공격하는 새누리당</strong></p>

<p>19대 국회의 새누리당은 이 요구를 충족하지 못했다. 야당보다도 더 힘겨운 파트너는 박근혜 정부였다. 청와대는 관심 법안일수록 “한 획도 고칠 수 없다”라는 태도를 되풀이했다. 청와대가 일자리 문제의 최종 해결책으로 선전하는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의료영리화 관련 조항이 논란이 되어 임기 내내 공전하고 있지만, 의료영리화 방지 조항만 넣고 통과시키자는 야당의 수정안이 벽에 막혀 있다. 협상 관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원안 고수 의지가 완강한 것은 새누리당보다 청와대다. 필리버스터를 촉발한 테러방지법 역시 야당은 테러 대응 기능을 국정원 외의 조직에 맡기거나 최소한 국정원을 통제할 권한을 요구했지만, 청와대는 요지부동이다.</p>

<p>국회선진화법은 다수당이 협상과 여론 동원에 유능할 것을 요구하는데, 정작 청와대의 근본주의가 새누리당을 옥죄면서 다수당이 유능해질 공간이 박탈당했다. 새누리당은 몇 차례 저항을 시도했다. ‘친박’ 서청원에 맞선 김무성 당대표 선출, ‘친박’ 황우여를 제치고 정의화 국회의장 선출, ‘친박’ 이주영 대신 유승민 원내대표 선출. 저항은 민망할 정도로 가혹한 진압을 당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노골적인 찍어누르기로 사퇴시켰고, 김무성 대표는 친박 성향 지도부로 포위해 끊임없이 힘빼기를 하고 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자신의 호언장담을 뒤집고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을 발동해 체면을 구겼다.</p>

<p>19대 국회에서 박근혜 청와대는 원하는 법을 손에 넣는 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새로운 게임의 룰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다수당의 협상 능력을 청와대가 묶어버린 것이 문제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게임의 룰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떠넘겼다. 국회선진화법이 식물 국회를 만든다는 ‘비효율 공세’가 주력이었다. 또한 국회선진화법을 공격하는 한편으로, 게임의 룰에서 빈틈을 찾으려 했다.</p>

<p>눈에 띄는 빈틈은 하나였다. 직권상정 요건에 규정된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라는 모호한 대목이었다. 원론적으로는 전시·사변에 해당하는 중대한 비상사태일 때에나 발동이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국회의장이 자의적인 판단으로 국가비상사태라며 직권상정을 발동하더라도 제지할 마땅할 방법이 없다.</p>

<p>지난해 12월11일 정의화 국회의장은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청와대의 테러방지법 직권상정 압력을 공개 반박하는 자리였다. 이날 정 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어 IS 테러가 서울이나 부산에 어디 생겼다고 치자. 그렇다면 테러방지법은 직권상정할 수가 있다. 그건 상식적인 거잖나. 그렇지도 않은데 내가 테러방지법을 국가비상사태 어쩌고 하면서 직권상정해봐라. 여러분들이 웃지 않겠나.” 입법 취지에 맞는 정론이었다. 정 의장은 두 달 만에 남북관계 긴장을 명분으로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p>

<p>정 의장이 방향 전환을 택한 이유가 어떻든 간에, 이 조항이 군축 협상의 약한 고리였던 것은 2012년 법 개정 때도 예측되던 사실이다. 그에 대응할 소수당의 방어 조항이 필리버스터다. 필리버스터는 대단히 미묘한 균형이 이루어졌을 때나 발동된다. 의회의 의석 분포상 다수당 동조 의석이 180석을 넘길 경우 필리버스터는 의미가 없다.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국민의당은 자당의 중재안을 받지 않을 경우 새누리당에 동조해 무제한 토론 종결결의안을 낼 수 있다고 더불어민주당을 압박했다.</p>

<p>만일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이 명분이 충분할 경우, 즉 실제로 국가비상사태에 준하는 위기 상황이거나 하다못해 여론의 직권상정 지지가 뚜렷할 경우, 필리버스터는 소수당의 자살행위다. 발목잡기 역풍을 감당할 방법이 없다. 그러니 필리버스터는 다수당의 의석이 부족하고 국회의장의 무리수가 분명하며 해당 법안에 대한 여론전이 적어도 비등한 정도로 가능할 때에만 선택 가능한 옵션이다. 테러방지법 정국은 그 미묘한 조건을 모두 만족한다고 더민주 이종걸 원내지도부는 판단했다. 주말까지 필리버스터를 이어간 후 더민주 비대위는 더 지속할 경우 역풍이 우려된다며 2월29일 밤늦게 중단 결정을 내렸고, 다음날 의원총회에서 격론을 거친 끝에 중단을 확정했다. 3월2일 현재 진행중인 이종걸 원내대표의 필리버스터를 마지막으로 종료된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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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는 불가능에 가까운 확률의 장벽을 뚫고 현실에 등장했다. 임기 내내 되풀이된 박근혜 청와대의 근본주의, 그에 압도당한 새누리당의 협상력 고갈, 소수당에 충분한 명분을 열어준 국회의장의 입장 전환, 그리고 테러방지법의 비교적 눈에 잘 띄고 여론전을 해볼 만한 독소조항(22~23쪽 기사 참조)까지, 일련의 조건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이번 필리버스터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p>

<p>그리고 이 확률의 장벽을 뚫고 소수당이 꺼내든 무기가 어떤 물리력도 불법성도 배제한, 국회법이 보장한 방어무기인 ‘말’이었다. 이는 살아 있는 세대 대부분이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191시간동안 이어지고 있는 말의 릴레이는 세계 정치사에 최장기간 필리버스터로 기록되게 되었다. 정치의 본령이 말싸움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극적으로 상기시키는 풍경은 흔치 않다. 처음에는 마치 기록 경쟁처럼 보였으나 곧 콘텐츠로 무게중심이 옮아갔다. 어떤 필리버스터는 자체로 청자를 끌어들이는 완결성 있는 연설문이었고, 또 어떤 필리버스터는 끝도 없는 패러디 생산을 자극하는 데 성공한 콘텐츠였다.</p>

<p><strong>“의회의 경쟁력은 지독한 비효율성에 있다”</strong></p>

<p>정치학자인 박원호 서울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의회는 내전을 대체하는 제도다. 과거에 총칼로 싸우던 걸 이제 대표를 보내 말로 싸우는 제도가 의회다. 그런 제도가 효율적일 수도 없지만, 효율적이어서도 안 된다. 의회가 행정부보다 효율적일 수가 있나? 오히려 의회의 경쟁력은 그 지독한 비효율성에 있다. 갈등을 다루고, 드러내고, 폭발시키는 과정 그 자체가 의회다. 필리버스터를 보면서 ‘그래도 몸싸움보다 말싸움이 낫더라’는 정서가 있는 것 같다. ‘내전에서 의회로’ 넘어오는 경로의 한 단계를 지나고 있는 셈이다.”</p>

<p>필리버스터는 의회의 비효율성 중에서도 정점이라 할만하다. 191시간에 걸쳐 한 얘기를 하고 하고 또 하는, 아예 탄생 목적이 ‘방해’인 제도다. 이 비효율의 절정이 어떤 이들에게는 식물 국회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자 참을 수 없는 기능장애였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행정부와 대비되는 의회 본연의 속성을 체감하게 해주었다. 사흘간 필리버스터를 호의적으로 지켜본 시민은 비효율이야말로 의회의 경쟁력이라는 낯선 명제와 만났다. 그렇게 기묘하고 역설투성이고 거대한 농담 같은 191시간이 지나가고 있다.</p><!--sisain_content_728x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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