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의 구시가지 풍경과 시민들 표정을 접하며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거리는 활기차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한 달에 8000명씩’ 엑소더스가 일어나는 도시치고는 너무나 밝고 유쾌했다. 거리 곳곳에 때로는 혼자, 때로는 3~4인조 밴드가 대기하고 있다가 관광객들이 다가오면 흥겨운 라틴 음악을 연주하며 영접하곤 했다.

쿠바 음악은 보통 스페인의 기타와 나이지리아 북의 전통이 결합된 손(Son)에서 룸바, 맘보, 차차차로 파생했다고 한다. 거기에 살사, 차랑가 등이 더해지면서 쿠바는 일약 라틴 음악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거리의 악사든 식당의 밴드든 연주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쿠바에 가면 굳이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멤버들이 나오는 클럽을 찾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웬만한 식당에는 식사 중에 꼭 밴드가 등장하는데, 손님들이 만족도에 따라 몇 가지 등급으로 나눠 팁을 지불하는 게 관례라고 한다.

돌이켜보면 쉽지 않은 여행이었다. 풍요로움과 편리함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이 낡은 호텔방에서부터 돌발 사태에 따른 갑작스러운 여행 스케줄 변경, 도시에서 도시로의 장거리 버스 이동, 발에 물집 잡히기 십상이던 트리니다드의 자갈길 걷기 등 낯설고 힘든 경험들을 공유했다. 마지막 날쯤에는 다들 같거나 다른 이유로 신경이 날카로워지기도 했다.

ⓒ시사IN 남문희아바나 구시가지에서 만난 길거리 밴드. 거리의 악사든 식당의 밴드든 연주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정작 돌아와서는 며칠 지나지도 않아 불편했던 기억은 다 사라지고 뭔가 소중하고 애틋한 것들을 두고 온 느낌이 대부분인 것 같다. 일종의 ‘쿠바 여행 증후군’이라고나 할까? 참여자 가운데 한 분은 모임방에 “쿠바가 고향 같아요”라는 짤막한 후기를 남기기도 했다.

처음 본 사람에 대한 친절과 선의, 기꺼이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씨,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거리에서 만난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던 알 수 없는 기품. 게다가 교양미까지. 문화적으로 앞서 있다고 여겨지는 유럽인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은 캐나다나 멕시코를 통해서 갈 수 있다. 우리는 멕시코시티 공항을 경유했다. 그런데 멕시코시티와 아바나, 두 공항의 분위기가 천양지차다. 멕시코가 마약 문제로 복잡한 나라라는 것을 감안한다 해도, 멕시코시티 공항에서의 경험은 매우 불쾌했다. 불필요할 정도로 까다롭고 공항 직원들의 태도도 왠지 거슬렸다. 멕시코가 북미 자유무역지대의 중심국이자 세계 15위의 무역대국이란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외국인 전용 화폐에 손 벌리는 젊은이들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은 분위기부터 달랐다. 입국 심사대 근무자들 얼굴에서 호의가 느껴졌고, 심지어 ‘꼬레아, 웰컴’ 하며 웃는 낯으로 반갑게 인사하는 직원도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과거 중국이나 러시아의 공항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며 긴장했던 경험을 떠올렸다가 예상치 못한 환대에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그런 환대와 친절이 공항뿐 아니라 이 나라의 어디에서나 일상화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1980년대 독일 주재 코트라(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사무소에 근무하며 동유럽을 수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는 한 지인은 “그때 동독이나 폴란드 사람들도 매우 순박하고 친절했다. 그러다 서독으로 돌아오면 사람들이 모두 야수처럼 보였다”라고 회상했다. 자본주의 바람과 돈이 인심마저 바꿔놓기는 그때의 서독이나 지금의 멕시코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한때 순박했던 동유럽과 중국·베트남·북한 사람들 역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물결 속에서 점차 인간의 얼굴을 잃어가는 모양새다. 쿠바 사람들도 앞으로 그렇게 바뀔까?

요사이 물밀듯 쿠바를 찾는 미국이나 유럽인 중에는 지난해 7월 미국과의 수교 이후 쿠바 사회도 지금까지의 모습을 곧 잃어버릴 것이라 예상하고 변하기 전의 쿠바를 눈과 마음에 담으려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미국이 쿠바의 문호를 연 이상 5년 안에 바꿔놓을 것이라고 벼르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아닌 게 아니라 쿠바에서는 예전에 볼 수 없던 현상들이 이미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시사IN 남문희쿠바에서 만난 흑인들의 표정은 몹시 해맑았다. 쿠바 전체 인구의 약 11%가 흑인으로 파악된다.

밤에 호텔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외국인 전용 화폐인 쿡(CUC)을 달라고 손을 벌리는 젊은 친구들을 가끔 마주친다. 지방의 시엔푸에고스에서는 멀쩡하게 생긴 젊은이가 대낮의 공원에서 관광객에게 돌아가며 손을 벌리는, 쉽게 보기 어려운 장면도 등장했다. 밤에 호텔 주변에서 매춘 여성들을 목격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일행 중 한 명은 20대 남짓한 한 여성이 자기를 여대생이라고 소개하며 접근하기에 10쿡(약 1만원)을 쥐여주며 그냥 보내려 했더니 무척 감격스러워하더라고 전했다.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바나에서는 매일 저녁 8시30분부터 옛 스페인의 산 카를로스 카바나 요새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포격식을 거행한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카리브 해의 해적이나 미군의 침공을 막기 위해 성문을 폐쇄했는데 그 폐쇄 시간을 알리는 저녁 예식이었다. 우리 일행도 이 장면을 지켜보았는데, 일행 중 한 명이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높이 든 사이 바지 주머니 속의 지갑이 털렸다. 첫날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하면서 가이드가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라 법이 엄격해 치안만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큰소리쳤는데 바로 다음 날 사건이 터진 셈이다.

피해를 당한 분이 재발 방지 차원에서라도 경찰에 신고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해 쿠바인 가이드와 운전기사 그리고 통역과 경찰서에 갔다가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호텔로 돌아왔다. 그런데 피해자의 표정이 의외로 밝았다. 쿠바 경찰이나 가이드, 운전기사의 친절함과 헌신적인 태도에 오히려 자기가 미안해질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쿠바를 다녀온 이들은 특히 흑인들의 표정이 해맑은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쿠바 정부가 그 자체가 인종차별이라는 이유로 인종별 통계를 발표하지 않아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쿠바 전체 인구의 약 11%가 흑인인 것으로 파악된다. 스페인계 백인이 51%, 흑백 혼혈인 물라토가 37%, 중국계 등 아시아 출신이 1% 정도다. 여행을 가기 전 쿠바에 몇 차례 다녀온 한 인사로부터 쿠바에 가거든 흑인들의 표정을 유심히 보라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세계 어느 나라의 흑인들보다 표정이 밝다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현지에서 접한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 깊었다. 아바나에 머물 때 밤에 호텔 길 건너 슈퍼마켓에 다녀오다가 흑인 청년이 다가와 일순 긴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웃으면서 자기가 혹시 도와줄 일이 있느냐고 묻는 모습에 ‘아, 여기는 쿠바지’라는 생각을 퍼뜩 떠올리게 됐다. 아바나 인근의 유기농 생태농업으로 유명한 비날레스 지역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일이다. 선사시대 지형인 모고테를 관측하기 좋은 휴게소가 있어서 들렀는데, 커피를 마시던 중 버스가 출발한다는 소리에 서두르다가 커피 스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흑인 청년 하나가 얼른 허리를 굽혀 스푼을 주워주며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씩 하고 웃는 게 아닌가.

음악과 춤을 즐기는 여유는 어디서 오는가

문득 궁금해졌다. 이들의 이런 친절함과 타인에 대한 배려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그리고 최소한 생필품에 대해서만은 무상분배가 이루어지는 등 삶의 기본적인 인프라가 갖춰진 데서 오는 여유가 아닐까 여겨졌다. 반세기에 걸친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해 국가는 가난하고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삶의 만족도가 세계 7위라고 하지 않는가. 재일 동포 3세로 미국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온 요시다 사유리 씨의 책 〈작은 나라 큰 기적-가난하지만 행복한 쿠바 사람들〉을 쿠바에서 돌아온 뒤 국회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저자가 쿠바의 일반 시민들과 같이 살며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그들의 삶을 관찰해 기록한 책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어느 날 한 가족에게 “당신들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는가”라고 묻자 한참을 생각한 이 사람들이 한다는 소리가 “지진, 허리케인, 어둠 등등에 대해 불안함을 느낀다”였다고 한다. 요시다 씨 본인은 장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때문에 저축을 좀 더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하니까 다들 깜짝 놀라며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더란다. 그러면서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렵다니 거참 불쌍하네’라며 다들 동정하는 표정이었다나.

ⓒ시사IN 남문희쿠바의 한 병원 응급실. 쿠바에서는 모든 진료가 무상으로 이뤄진다.

무상교육·무상의료에 최저생계비 보장, 노인을 봉양하기 위한 양로 시설 및 장례와 묘지 비용까지 무료인 쿠바에서는 인생 설계를 위해 따로 저축을 할 필요가 없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는 데에서 밝고 구김살 없는 표정과 타인에 대한 배려, 음악과 춤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물론 갈수록 내국인 화폐인 페소(CUP)만으로 살 수 있는 생필품 가짓수가 줄어들어 외국인 전용 화폐(CUC)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하고, 이것이 결국 의사 등 유능한 인력의 해외 유출로 이어지긴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갈라파고스 섬처럼 고립된 채 자신들만의 낙원을 건설해온 이 나라의 정체성이 급격하게 변화할 것 같지는 않다.

2011년 기준으로 우리가 공교육에 쏟은 예산이 GDP 대비 4.9%였던 데 비해 우리보다 훨씬 가난한 이 나라는 12.8%를 교육예산으로 지출했다. 우리가 겨우 2.1%를 보건의료 예산으로 지출한 데 비해 이 나라는 8.8%를 할애했다. 국가는 가난하지만 국민의 교육과 의료에 많은 예산을 할당해 2002년 기준으로 문자해독률 99.8%, 국민 대다수가 고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교육 선진국이자 의료 선진국, 장수 국가 반열에 올랐다. 최소한 이 나라보다는 부강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오늘날 ‘헬조선’에서 사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만, 우리보다 훨씬 가난한 이 나라 국민들은 국가가 없는 살림을 쪼개 자기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며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남들이 꺼려하는 에볼라 바이러스 퇴치를 위한 의료인단 모집에 서로 가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선별해서 보내느라 애를 먹는 것이나, 체르노빌의 피폭 아이들을 자신의 처지도 어렵던 1991년부터 선뜻 무료로 치료하겠다고 나선 쿠바인들의 이타적인 행동을 전부 설명하기는 어렵다. “나머지 세계가 돈을 좇느라고 반세기를 보냈다면 쿠바 사람들은 정신수양을 하느라 반세기를 보냈다”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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