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비영리 학술NGO인 국제한민족재단(이사장 이창주)이 주관한 ‘쿠바 교류탐사대’가 1월23~31일 쿠바를 방문했다. 미국과 쿠바가 2014년 말 53년 만의 국교 정상화를 선언한 이래 쿠바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게 계기가 되었다. 수도인 아바나를 출발해 생태도시인 비날레스와 시엔푸에고스, 트리니다드를 거쳐 혁명의 도시 산타클라라까지 이어진 여정은 가난하지만 생기가 넘치는 쿠바 사회의 정신적 토대를 경험하는 기회였다는 게 참가자들의 중론이다. 〈시사IN〉 독자를 포함해 쿠바에 관심이 있는 남녀노소 37명(주최 측 포함)과 동행했던 남문희 기자가 보고 듣고 느낀 바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카리브 해의 거센 파도 소리가 호텔 두빌레(Deauville)의 창문을 밤새 두들겼다.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첫 장면에 경쾌한 라틴 음악과 함께 등장하던 말레콘 방파제는 밤새 울부짖듯 달려드는 성난 파도를 겨우 달래고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북중미 대륙 전체가 엘니뇨에 따른 기상이변으로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워싱턴에 때 아닌 폭설이 내려 이번 쿠바 여행단에 참석하기로 했던 일행 중 한 명의 발이 묶이기도 했다.

아바나 도착 첫날,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새워버렸다. 1월23일 오전 10시10분 인천공항을 출발해 일본 나리타 공항과 멕시코시티를 거치는 길고도 긴 여정이었다. 비행 시간만 22시간. 중간 기착지마다 대기한 시간까지 따지면 하루를 넘겨 도착하는 게 정상이겠으나 14시간의 시차 덕에 당일 밤 10시5분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시사IN 윤무영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첫 장면에 등장한 말레콘 방파제는 쿠바의 관광 명소다.

시차에다 밤새 울부짖는 파도 소리, 게다가 공항에 마중 나온 미국 로스앤젤레스 교민 원 마르코스 씨의 충격적인 얘기가 밤잠을 설치게 했다. 원 씨는 이번 쿠바 교류탐사대 주최 측인 국제한민족재단(이사장 이창주)이 선택한 한국 여행사의 현지 대리인 격 인물이다. 쿠바는 아직 한국과 수교하지 않은 상태라 국내 여행사가 현지에서 직접 영업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원 씨 같은 현지 대리인을 통해야 하는데, 그는 직원 350명을 거느린 쿠바 관광청의 극동 파트와 일종의 파트너십을 갖고 움직인다고 했다.

그는 공항에서 호텔까지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지금 쿠바에 방문객이 폭증해 호텔 방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지난해 7월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 이후 주로 미국과 캐나다인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수교는 했지만 쿠바 여행 제한 조치를 전면 해제한 것은 아니다. 개인 여행은 안 되고 공무나 연구 목적 등 8개 분야만 풀어놓은 상태다. 그러나 원 씨에 따르면 알게 모르게 다 들어오고 있으며 미국 정부도 이를 일일이 체크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고 한다. 여행객의 폭증으로 아바나 시내 호텔의 수용 한도는 이미 한참 초과됐다. 시내 호텔의 객실을 통틀어봐야 1500개, 하루 수용 가능 인원이 3000명인데, 하루 몰려드는 관광객은 약 1만명. 앞으로 호텔을 100개 정도 더 지어야 할 상황이라고 한다.

달변에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그의 얘기들 속에서 한마디가 가슴을 쿵 하고 쳤다. 미국과 수교 후 지금 쿠바에서 ‘엑소더스’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미국으로 가려는 쿠바인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쿠바에서 에콰도르까지 비자 없이도 나갈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에콰도르로 빠져나가는 인원이 한 달에 약 8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쿠바 정부가 에콰도르와의 국경을 통제하자 이번에는 돈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과테말라까지 비행기로 이동하는 새로운 루트가 등장한 실정이라고 한다. 1980년대 말 동독 시민들의 탈출 러시를 연상케 하는 말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쿠바와 관계를 정상화한 것이 양날의 검이 될 것이란 얘기들이 있었다. 50년 넘게 이어져온 쿠바 봉쇄를 완화해 숨통을 열어준 측면도 있지만 ‘화평연변’(평화적인 방법으로 사회주의 체제의 변화를 꾀함)의 쿠바식 버전이 될 수도 있다.

ⓒ시사IN 윤무영아르마스 광장의 거리 책방. 주로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에 관한 책을 팔고 있었다.
ⓒ시사IN 윤무영미국 식민지 시절 워싱턴의 미국 의회 건물을 본떠 지은 옛 국회의사당 앞에 주차된 오래된 차들.

국내에는 이미 쿠바를 보는 관점을 둘러싸고 보이지 않는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보수 언론은 주로 고장 난 사회주의 체제에 불과하다는 식의 냉소적 관점으로 쿠바를 들여다봤다. 한 일간지에 기고한 한 대학교수의 글은 얼마 전 쿠바 방문에서 겪은 일들이 악몽 같다고 하기도 했다. 외국인에게 비싼 교통비, 고물가, 형편없는 숙박시설, 불친절, 거리의 매연, 심지어 매춘까지. 그의 열거대로라면 ‘카리브 해의 진주’니, 생태유기농·무상의료의 천국 같은 말들은 일장춘몽처럼 느껴진다. 칼럼 제목도 ‘쿠바, 일장춘몽’이었다.

두빌레 호텔은 아바나 관광의 1번지 격인 말레콘 방파제에 면해 있다. 입지 조건으로는 나쁜 편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관광객들이 득시글거렸다. 그러나 시설은 엉망이다. 엘리베이터부터 그랬다. 해외 여러 나라에 가봤지만 호텔 엘리베이터 바닥의 철판이 낡아서 불안해하기는 처음이다. 룸 역시 낡고 불편했다. 결국 마지막 날 사고를 쳤다. 지방도시를 돌다가 마지막 숙박을 이곳에서 하기로 했는데 호텔 6층의 풀장에 관광객이 몰려 4, 5층까지 물이 새는 통에 방이 없다는 것이었다. 호텔 측 주선으로 다른 호텔로 옮기기는 했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촌극이었다.

아침 일찍 호텔 밖으로 나오니 밤새 파도의 기세는 조금 꺾였다. 호텔 앞에 주차된 차들을 보면서 드디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시작됐다는 점을 실감했다. 서울에서 틈틈이 봤던 쿠바 여행 서적이나 인터넷 자료 등에서 가장 신기했던 게 바로 자동차였다. 아바나 시내를 1950년대 미제 시보레나 포드 자동차가 굴러다닌다는 것이 아닌가. 연식이 1950년대면 자동차 한 대를 가지고 거의 60년을 탔다는 얘기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그런데 정말 눈앞에 그런 광경이 펼쳐졌다. 아바나 하면 그래도 쿠바의 수도인데 그 수도의 거리를 마치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차들이 굴러다닌다. 색깔도 파랑·노랑 등 원색 계통이 많고, 청결을 중시하는 쿠바인들 기질 때문인지 깔끔하기까지 해 착각이 들 정도다. 그 차들이 2016년 현재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1940년대나 1950년대 미국의 어느 도시에 서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시사IN 윤무영아바나의 구시가지인 오비스포 거리(위)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장소다. 쿠바에 오래 머물렀던 헤밍웨이가 흔적을 남긴 거리이기도 하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했다. 첫날 찾은 아바나 구시가지 오비스포 거리는 지금이라도 시가를 문 헤밍웨이가 밤새 마신 럼주와 새벽 창작의 피로를 풀기 위해 어디선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날 것만 같았다. 말 그대로 헤밍웨이의 거리다. 1928년 플로리다 반도의 키웨스트 항에서 요트를 타고 바다낚시를 떠난 헤밍웨이는 쿠바의 매력에 푹 빠져 1961년까지 머물며 이곳저곳에 흔적을 남겼다. 거리 초입에 그가 자주 들러 다이퀴리라는 칵테일을 마셨다는 ‘라 플로리디타’라는 바가 있다. 여기서부터 약 1㎞가 옛 식민지 시절 가장 번화가였다는 오비스포 거리다. 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거리답게 레스토랑·카페·환전소·고급 의상실 등 전용 상점이 즐비하다. 상업용도가 아닌 건물들은 서민용 주거지였다. 옛 스페인이나 미국의 식민지 시절 부자들의 대저택을 혁명 이후 여러 세대에게 분양해준 것이다. 군데군데 빨래가 걸려 있기도 하고 수리가 안 된 채 빈집으로 쇠락한 곳도 눈에 띈다.

ⓒ시사IN 윤무영코히마르에 있는 헤밍웨이 흉상.

한국과 쿠바, 지구 반대편 두 나라의 어떤 운명

거리의 끝쯤에 헤밍웨이가 장기 투숙했던 암보스문도스(Ambos Mundos) 호텔이 있다. 그가 제일 좋아했다는 511호실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쓸 때 이용했을 법한 타자기가 진열돼 있다. 영화 〈헤밍웨이와 겔혼〉에 보면 밤새 파티를 벌인 헤밍웨이가 새벽에 일어나 서서 타자를 치는 장면을 겔혼으로 분한 니콜 키드먼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혁명 후 헤밍웨이와 만난 피델 카스트로는 스페인 내전을 다룬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통해 게릴라전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호텔 옥상에는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는 모히토 칵테일을 파는 바가 있다.

아바나 항은 우리로 치면 인천항이나 마찬가지다. 저 항구를 통해 1492년 10월27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그의 1차 항해 때 이 섬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스페인 정복자들이 밀고 들어와 약 30만명에 이르는 원주민 인디오들을 학살했다. 그러고는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주로 나이지리아 쪽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수입해왔다. 스페인 치하의 아바나 항은 사탕수수와 노예무역을 위한 항구이자 스페인의 중남미 진출을 위한 거점이었던 셈이다.

그러다 1898년 메인호 폭발 사건을 빌미로 한 미국의 일방적 공격에 스페인이 패배한 후 3년의 미국 군정기를 거쳐야 했고, 군정 이양 이후 1959년 쿠바 혁명까지 반세기 동안 친미 독재정권을 앞세운 사실상의 미국 식민지 시기를 거쳤다. 스페인 식민지에서 미군정을 거쳐 친미 독재정권으로의 이양 과정은, 일제강점에서 해방된 후 미군정을 거쳐 이승만 정권으로 권력이 이양된 남한의 해방 직후사와 패턴이 일치한다. 쿠바에서 3년의 미군정 기간은 호세 마르티의 유지를 받들어 제2차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쿠바 혁명당 등 독립운동 세력을 배제하는 기간이었다. 남한에서 미군정이 김구 선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배제했던 것과 겹친다. 미국 생활을 오래한 이승만이 미군정 직후 초대 대통령이 되었듯이 쿠바에서도 미국 시민권자였던 에스트라다 팔마가 민정 이양 후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해방 후 남한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바로 반세기 전 쿠바에서 일어난 일의 재현이었던 셈이다. 쿠바 모델의 남한 적용이라고 해야 할까? 지구의 반대편쯤에 있는 쿠바와 우리가 시간의 축선 상에서 운명적으로 교차하고 있었던 셈이다.

ⓒ시사IN 윤무영헤밍웨이가 장기 투숙했던 암보스문도스 호텔.

그러나 닮은 것은 여기까지. 50년 후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린 쿠바 혁명정부는 2차 독립전쟁의 영웅 호세 마르티를 국부로 섬긴다. 쿠바 곳곳에 피델 카스트로의 동상은 없지만 호세 마르티의 동상은 넘쳐난다. 쿠바의 관문인 아바나 공항부터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이다. 우리로 치면 종종 김구 선생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호세 마르티의 영향력은 그보다 훨씬 깊고 크다. 해방된 지 70여 년이 지난 우리 사회가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자는 의식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과는 천양지차다. 쿠바 역사에서 이승만에 버금가는 인물은 역시 미국 시민권자로 어울리지 않게 초대 대통령이 된 에스트라다 팔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은 왜 미국으로부터 독립하지 않는가’라며 직격탄을 날리는 쿠바인들이 이 얘기를 들었다면 기절초풍하지 않을까 싶다. 오비스포 거리 끝에 아르마스 광장이 있고 그 좌측에 시립박물관이 있다. 스페인 총독 관저와 미국 군정청이 차례로 들어섰던 영욕의 유산이다. 우리 현대사와 오버랩되면서 상념이 깊어졌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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