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알다시피 ‘독서’는 책을 읽는다는 뜻이야. 그런데 책이란 뭘까? 지니고 있는 〈동아국어사전〉에서 ‘책’을 찾아보니 “1. 어떤 생각이나 사실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한 종이를 꿰맨 물건을 통틀어 이르는 말. 2. 종이를 여러 장 겹쳐 맨 물건”이라고 풀이돼 있네. 두 번째 뜻의 책이 쓰인 예문으로는 “모조지를 책으로 매어 연습장을 만든다”를 들어놨어. 물론 이 뜻의 책은 ‘독서’라고 말할 때의 책은 아니지. 그런데 첫 번째 뜻의 책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책’이라는 말과 고스란히 포개지지는 않아. 예컨대 우리는 리플릿이나 팸플릿이라고 부르는 얄팍한 인쇄물은 보통 책이라고 하지 않아. 또 전자책이라는 말도 있고 전자책을 읽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까지 책이라고 하면 첫 번째 정의에 나와 있는 대로 ‘종이를 꿰맨 물건’을 연상해. 미래에는 전자책도 그냥 책이라고 부를 날이 오긴 하겠지만, 아직은 ‘e북’이나 ‘전자책’이라고 부르지, 그냥 책이라고 부르는 것 같지는 않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기간행물은 책에서 제외하는 것 같아. 물론 두툼한 계간지라면 더러 책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일간지나 시사 주간지 같은 걸 책이라고 부르지는 않는 것 같아. 일간지라면 몰라도 시사 주간지는 ‘종이를 꿰맨’이라는 정의에 딱 들어맞는데도 그걸 책이라고 잘 부르진 않아. 그렇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더 자주 접하는 읽을거리는 두툼한 단행본보다는 정기간행물인 듯해. 그래서 오늘은 정기간행물 얘기를 좀 해보고 싶어.

ⓒ이지영 그림

모든 정기간행물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시사’에 관한 정기간행물로 국한하려고 해. 사람들은 취미에 따라 음악 전문 월간지를 볼 수도 있고, 영화 전문 주간지를 볼 수도 있고, 낚시 전문 격월간지를 볼 수도 있지. 이런 전문적 정기간행물과 시사를 다루는 정기간행물의 차이는 전자가 특정 분야 ‘덕질’의 무기인 반면, 후자는 공화국의 양식 있는 시민이 되는 데 필요한 읽을거리라는 거지. 후자도 이제는 인터넷으로 읽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지금 종이를 염두에 두고 얘기를 하려고 해. 그리고 내가 추천하는 정기간행물은 내 정치적·이념적 성향을 얼마쯤 반영하고 있다고 미리 털어놓을게.

우선 일간신문. 종이 신문이 내리막인 건 사실이지만, 나는 공화국의 버젓한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종이 신문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일간신문 가운데는 〈한국일보〉와 〈경향신문〉을 추천해. 〈한국일보〉는 그야말로 정치색이 엷은 신문이야. 말하자면 전형적인 중도 신문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런데 그 중도라는 게 거의 모든 기사들이 중도라는 이유만으로 나온 결과가 아니라(중도적 기사가 많긴 하지), 보수에서 진보에 이르는 수많은 빛깔의 기사가 뒤섞이다 보니 평균적으로 나온 결과이기도 해. 〈한국일보〉의 어떤 기사는 꽤 진보적이고, 어떤 기사는 꽤 보수적이야.

아 참, 여기서 분명히 해둘 게 하나 있어. 흔히 사람들은 기사와 논설, 기사와 사설, 기사와 칼럼, 이런 말을 해. 그런데 이건 바보 같은 말이야. 신문에 실린 글은, 광고를 빼고는 모두 다 기사야. 그 기사 가운데는 기자의 관점을 되도록 억제하고 사실관계만 전하는 보도 기사(흔히 스트레이트 기사라고 불러)와 기자의 관점이 깊이 들어간 의견 기사가 있지. 의견 기사는 보통 논설위원들이나 편집국 간부들, 그리고 외부 필진이 써. 그렇지만 보도 기사인지 의견 기사인지가 모호한 해설 기사라는 것도 있어. 그리고 보도 기사와 의견 기사를 또렷이 나누던 예전과 달리 요즘의 신문 기사들은 그 둘을 포개놓은 경우가 많아. 아무튼 우리가 논설이나 사설이나 칼럼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 기사야. 의견 기사지.

그 신문들은 한국 사회의 누구를 대변할까

어떤 신문의 정치적·이념적 입장은 의견 기사에 많이 좌우돼. 그렇지만, 꼭 그런 건 아니야. 앞서 얘기했듯, 요즘은 보도 기사인지 의견 기사인지 모호한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순수한 보도 기사, 즉 순수한 스트레이트 기사에서도 그 신문의 정치적 입장이 드러나. 예컨대 어떤 사건을 기사로 다룰 것이냐 말 것이냐, 몇 면에 얼마만큼의 크기로 다룰 것이냐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과정이거든. 이건 사진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경향신문〉은 리버럴하다고 할 수 있어. 이 신문을 진보 신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지만, 글쎄, 내 기준으로 한국에 진보적 종이 일간지는 없는 것 같아. 나는 집에서 〈경향신문〉 하나만 받아보고 있어. 일간신문 얘기를 꺼내고 보니, 이 말을 안 할 수가 없네. 나는 양식 있는 공화국 시민이라면 흔히 ‘조·중·동’이라고 부르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안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해.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이 신문들은 명확히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을 대변하고 있는 신문이야. 게다가 〈동아일보〉는 그 기사들의 됨됨이마저 어설퍼서, 더러 식당에서라도 읽게 되면 손발이 오글거려. 〈동아일보〉는 한때 한국의 양식을 대표하는 신문이었는데, 어쩌다가 저리 망가져버렸는지 모르겠어. 〈한국일보〉와 〈경향신문〉 가운데 하나나 둘을 읽는다면 세상 돌아가는 걸 대강은 알게 될 거야.

그다음 주간지. 물론 시사 주간지를 얘기하는 거야. 〈시사IN〉에다 쓰는 글에서 〈시사IN〉을 최고의 주간지로 꼽지 않는다면, 기자들이 섭섭해하겠지. 그렇지만 기자들이 섭섭해할까 봐 걱정스러워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시사IN〉은 글자 그대로 한국 최고의 시사 주간지야. 정치적 성향은 〈경향신문〉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기사가 훨씬 심층적이지. 기사의 심층성은 양질의 시사 주간지가 꼭 갖춰야 할 덕목이야. 시사 주간지는 속보성으로 일간지를 따라갈 수 없잖아. 그리고 그 심층성은 한 기사가 보도 기사의 성격과 의견 기사의 성격이 섞여 있다는 데서 나와. 앞에서 말했듯이 일간지들도 보도 기사와 의견 기사를 포개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일간신문의 잡지화(시사 주간지화)라는 말이 나오는 거야. 보도 기사와 의견 기사를 섞은 기사를 영어로는 흔히 피처(feature)라고 하는데, 시사 주간지 기사는 거의 대부분이 피처지. 그런데 이 피처의 질에서 〈시사IN〉은 다른 주간지들을 압도해.

그다음 시사 월간지. 거대 신문들은 자매지로 시사 월간지를 내는 경우가 많아. 그렇지만 내가 권하는 건 〈월간 인물과 사상〉이라는 잡지야. 〈월간 인물과 사상〉은 거대 신문사에서 내는 시사 월간지에 비하면, 교양 기사의 비중이 큰 편이긴 해. 그렇지만 일간지 한둘과 〈시사IN〉에서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았다면, 좀 더 깊이 들어가 교양인이 될 필요가 있지. 전체적으로 이 월간지는 〈시사IN〉보다는 덜 리버럴한 것 같아. 그것은 이 잡지가 시사보다 교양에 치중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관련 있을 거야.

격월간지로는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권해. 이 잡지가 창간된 1991년에는 생태주의라는 말조차 여느 사람에겐 낯설었지. 그런데 이제는 인류 대부분이 생태주의를 지향하지 않는 한 멸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어. 온 세계 지도자들이 기후변화 문제를 놓고 회의를 했을 정도니까.

마지막으로 계간지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네. 한국에서 계간지는 주로 문학 계간지를 뜻해.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는 시사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니까, 그런 문학 계간지들 얘기는 하지 않을게. 한국에서 나오는 계간지 가운데 가장 읽을 만한 것은, 내 판단에, 〈황해문화〉야. 제호에서 보듯 인천에서 나오는 잡지인데, 순수한 시사 잡지라기보다는 문학까지를 아우르고 있는 종합잡지야. 이 잡지는 일반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은 듯한데, 공을 많이 들여서 내는 잡지라는 게 한눈에 보여. 〈한국일보〉와 〈경향신문〉에서 시작해 〈녹색평론〉과 〈황해문화〉에 이르기까지 내가 거론한 정기간행물들은 공화국의 교양인이 되기 위해 필요 충분한 자양분이야. 이 간행물들의 정기구독자가 돼서 엥겔계수를 조금 낮춰보자고!

기자명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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