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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팔아 먹었을 때도 이상한 엄마들이 나섰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국민 정서를 거스르는 수구 시민단체가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런 단체들이 생긴 건 아니다. 일제시대 친일 단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의 원조 격이라 할 만하다.

주진우 기자 ace@sisain.co.kr 2016년 01월 26일 화요일 제4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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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여성에게 어머니·노동자·창부의 역할을 요구했다.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는 조선 어머니는 전쟁의 큰 장애물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여성들에게 ‘군국의 어머니가 되자’는 선전전을 전개했다. 자식을 나라에 바치는 것이 영광이라는 작품이 쏟아졌다. <원술의 출정>(이광수), <군국의 어머니>(박태원), <일본의 어머니>(김상덕), <여인전기>(채만식) 등.

당대 여성 문인이나 교육자들의 홍보도 활발했다. 모윤숙·노천명 등 여성 문인들이 강연에 나섰고, 언론에 기고했다. 소설가 최정희는 전시 동원을 미화하는 소설 <환상의 병사> <여명> 등을 냈다.

무엇보다 일본 제국주의의 시각을 대변하는 여성 관변 단체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일제 때 관이 못하는 일을 주로 ‘애국’ ‘부인’ 등이 붙은 친일 단체가 대신하게 했다. 일본을 이해하자거나 여성을 정신대에 보내자는 일에 친일 여성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나섰다”라고 말했다.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려 일본 총독에게 바친 ‘애국금차봉납도’(왼쪽). 위는 1940년 경성가정의숙(현 중앙여고) 교직원 사진. 제자를 정신대에 보낸 교장 황신덕(앞줄 오른쪽 두 번째)은 광복 후 이승만 정부의 관선 대변인을 맡았다.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려 일본 총독에게 바친 ‘애국금차봉납도’(왼쪽). 위는 1940년 경성가정의숙(현 중앙여고) 교직원 사진. 제자를 정신대에 보낸 교장 황신덕(앞줄 오른쪽 두 번째)은 광복 후 이승만 정부의 관선 대변인을 맡았다.

1906년 설립된 ‘애국부인회’는 조선의 최대 여성 단체로, 1942년에는 가입 회원만 46만명에 이르렀다. 주로 군인 영접, 위문금 모집, 발모 헌납, 폐품 회수, 저금 장려 등에 앞장섰다. 정신 개조 운동 격인 정신동원운동에 주력하기도 했다. 애국부인회는 만주사변 이후 박차를 가해 소녀들까지도 전쟁에 동원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애국자녀단’이 탄생했다.

1937년에는 일제에 부역한 친일 귀족의 부인들과 중견 여류 인사들이 중심이 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가 발족했다. 금차는 금비녀를 뜻한다. 서울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열린 발족식에서 “우리가 애용하는 금비녀야말로 이 초비상시의 국가를 위해서 바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연설이 나왔다. 즉석에서 금비녀 11개, 금반지 3개, 금귀이개 2개, 은비녀 1개와 현금 889원90전이 모였다. 이 장면을 본 대표적인 친일 화가 김은호가 애국금차봉납도를 그려 일본 총독에게 바쳤다고 한다.

애국금차회는 군인 환·송영, 군인 가정의 위문·조문 격려, 국방비 헌납 등을 목적으로 했다. 일본 제국주의를 대변하고 옹호하는 것이 그들의 몫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가 애국금차회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고, 김활란·송금선(덕성여대 설립자) 등이 중추적으로 활동했다. 이화여대 총장과 이사장을 지낸 김활란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친일 여성이었다. 각종 친일 단체의 간부로서 강연·방송 등에서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선전했다. 특히 여성들에게 전쟁에 적극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여러 친일 단체를 이끌었던 김활란(왼쪽)이 1961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만났다.  
ⓒ연합뉴스
여러 친일 단체를 이끌었던 김활란(왼쪽)이 1961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만났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 <신시대>, 1942) “학도병 출진의 북은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 놓고! 뒷일의 총후(銃後)는 우리 부녀가 질 것이다.”(‘뒷일은 우리가’, <조광>, 1943) “이번 반도 학도들에게 열려진 군문으로 향한 광명의 길은 응당 우리 이화전문학교 생도들도 함께 걸어가야 될 일이지만 오직 여성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참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싸움이란 반드시 제일선에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특별연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 동시에 생도들도 황국 여성으로서 다시없는 특전이라고 감격하고 있습니다.”(<매일신보>, 1943)

1938년 김활란은 이화여전과 이화보육의 학생 400명을 ‘전쟁을 내조한다’는 명분으로 애국자녀단에 가입시켰다. 그뿐 아니라 김활란은 조선부인연구회,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조선언론보국회 등 다양한 친일 단체를 이끌었다. 김활란의 막강한 위세는 광복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친미파로 거듭난 김활란은 정치권력과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광복 후 이화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했고, 1961년까지 재임했다. 1948년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제1공화국 공보처장을 지냈다.

1942년 전쟁에 따른 일본의 인적·물적 손실을 조선에서 보충하자는 부인 단체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가 발족했다.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에는 김활란·모윤숙·박인덕 등이 여성 평의원으로 참가했다. 이 단체에서는 황신덕이 중추적 역할을 했다. 황신덕은 중앙여고 교장 시절 눈물로 호소해 제자를 정신대에 보낸 인물이다. 스승의 눈물에 감동한 제자 김금진은 교장실을 찾아갔고, 곧바로 정신대에 끌려갔다고 한다. 일장기를 머리에 두른 김금진이 황신덕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과 찍은 기념사진이 남아 있다. 황신덕은 여러 친일 단체에서 중책을 맡았고, 시국강연 연사로 활약했다. 광복 후, 황신덕은 이승만 과도 임시정부 입법위원으로 인연을 맺어 정부의 관선 대변인을 맡았다. 1983년 죽을 때까지 추계학원 이사장으로서 교육계와 여성계의 원로로 활동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길바닥저널리스트 박훈규</font></div>1월4일 엄마부대 등이 정대협 사무실 앞에서 ‘12·28 위안부 합의’ 수용을 요구하고 있다.  
ⓒ길바닥저널리스트 박훈규
1월4일 엄마부대 등이 정대협 사무실 앞에서 ‘12·28 위안부 합의’ 수용을 요구하고 있다.

“자리 얻으려고 친일 행위 하는 사람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일제 식민지 시절의 여성 단체들이 조선 여성들에게 가장 악한 일을 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정신대 합의 문제에서 보듯이 친일의 그림자는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드리워져 있다”라고 말했다.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주로 친일 귀족들이 고관대작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친일 단체를 만들어 활동했고, 현재는 자리를 얻으려고 친일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일본과의 위안부 협상이 굴욕적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는 가운데 피해 할머니들과 국민 정서를 거스르는 수구 시민단체가 적극적인 활동에 나서고 있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탈북어버이연합 등은 1월13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해체를 주장하는 집회를 열었다. ‘어버이연합’은 “정대협 지도부는 대한민국을 전복시키고, 북한을 찬양하는 세력이 철저히 장악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엄마부대봉사단은 “일본을 이해하고 용서하자” “내 딸이 위안부였어도 일본을 용서할 것이다” 따위 주장을 폈다. 엄마부대봉사단 주옥순 대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회에서 불러준다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갈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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