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호남을 근거로 한 제1야당 고립 작전


“더 이상 ‘인질’로 살기 싫다”

 

아주 오래된 의문에 대한 답 하나가 빗장을 풀고 나오려 한다. 야권의 대립과 반목은 왜 끝없이 되풀이될까. 민주화의 성지 호남이 어쩌다 반(反)친노 세력의 근거지처럼 되었을까. 제1야당의 비주류는 왜 그토록 문재인 대표를 신뢰하지 못할까.

아직 이 답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짧게는 문재인 대표 취임, 길게는 열린우리당 창당 이래 제1야당을 갉아먹고 있는 ‘지긋지긋한 갈등’의 근원에 대한 실마리는 될 수 있다. 동시에 최근 벌어지는 야권의 지각변동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남 패권주의’라는 말이 정치담론 시장에서 회자되고 있다. ‘친노 패권주의’와 이음동의어인 것 같지만, 함의가 확연히 다르다. 친노 패권주의가 제1야당의 주도권을 쥔 정치집단에 대한 ‘고공 공격’이라면, 영남 패권주의는 ‘밑둥’을 겨냥한다. 진보·보수를 망라한 영남인들이 정치권력을 통해 호남을 배제함으로써 정치·경제적 기득권을 확대·재생산해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호남이 몸 대주고 돈 대주면서 영남 정치세력을 키워줬다는 이야기다. 논란이 클 수밖에 없는 주장이다.

ⓒ연합뉴스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김한길 의원(왼쪽)이 안철수 의원이 주도하는 국민의당에 합류했다. 1월8일 창당준비점검회의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호남이 언제까지 진보·개혁 진영의 ‘인질’ 노릇을 해야 하느냐는 항변이기도 하다. 이제 호남도 ‘성지에서 세속으로’ 내려와서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김욱 서남대 교수(경찰행정법학)가 〈아주 낯선 상식〉이라는 책을 통해 이 이야기를 공론의 장으로 내보냈다. 본래 김욱 교수가 생각한 책의 제목은 ‘착한 호남 콤플렉스’였다(“더 이상 ‘인질’로 살기 싫다” 기사 참조).  

영남 패권주의라는 용어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말은 아니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때부터 이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천정배·신기남·정동영 등 호남 출신 정치인이 영남 세력과 결탁해 호남(새천년민주당)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는 비판이 나왔다. 당시 강준만 교수 등 일부 지식인이 이런 비판에 앞장섰다. 그러나 ‘개혁 바람’에 묻혀 이들의 이야기는 담론 지형에서 힘을 얻지 못했다. 비판자들은 영남 패권주의 세력이 이 논의를 호남 지역주의라는 틀에 가둬버렸다고 주장한다. 일종의 ‘금기어’처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영남 패권주의’가 해결해준 안철수 신당의 모순

이 말이 다시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제1야당의 분열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부터다. 연이은 탈당 사태에 이어 안철수 신당(국민의당)이 깃발을 들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난 1년여 동안 진보·개혁 진영 상당수는 왜 제1야당의 비주류가 문재인 대표를 흔들어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주류는 친노 패권주의를 집요하게 공격해왔지만, 막상 문 대표 취임 이후 어떤 패권주의 행태가 있었느냐는 반박에는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지리한 논박 속에 갈등의 골만 깊어갔다. ‘공천에 대한 불안감’ 정도를 그 원인이라고 봤다.

ⓒ연합뉴스1월3일 안철수 의원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사저를 방문해 이희호 여사(맨 오른쪽)를 만나고 있다.

영남 패권주의 프레임으로 보면 달라진다. 더불어민주당은 호남의 희생을 자양분 삼아 성장한 ‘영남+운동권 정당’이다. 호남과 비주류 정치인은 대선에서 패배한 문재인 의원과 그 세력이 또다시 당을 장악한 것을 인정할 수 없다. 공천권 몇 장으로 ‘협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당내 권력투쟁을 통해 끌어내려야 한다. 안철수 의원이 끝까지 혁신전당대회 개최를 요구하며 ‘리셋’을 요구한 것은 이런 이유다.

신당의 자기모순도 영남 패권주의 프레임이 해결해준다. 탈당 이후 안철수 의원이 호남 기득권 정치인과 손잡자 진보·개혁 진영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낡은 진보 청산’을 외치더니 구태 세력과 합치느냐는 공격이었다.  

그런데 영남 패권주의 논리에 따르면 이는 그리 중요한 흠결이 아니다. 영남 패권의 대항마로서 호남의 다양한 세력이 이합집산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는 항변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남 패권주의 프레임이 안철수 신당에게 그럴듯한 ‘정치적 명분’을 제공한 셈이다. 호남 사정에 밝은 한 정치권 인사는 “이는 사후에 끼워 맞춘 논리일 공산이 크지만, 적어도 호남에서는 명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명분을 손에 쥐면 정치 기획이 나온다. 호남과 중도 세력을 제1야당에서 이탈시킨다는 기획이다. 김한길 의원과 가까운 더불어민주당 관계자의 말이다. “올해 총선에서 3자 구도가 명확해지면서 수도권 의원들도 흔들리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호남에서 무너지는 순간이 임계점이다. 친노 강경파만 남긴 채 비노·중도 의원들이 대거 안철수 신당으로 이동할 것이다. 총선 전에 제1야당의 교체가 가능할 수도 있다. 핵심은 호남이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를 ‘평민당 프로젝트’라고 칭했다. 1988년 총선을 앞두고 DJ(김대중)가 신민당에서 뛰쳐나와 호남을 석권하면서 제1야당으로 발돋움한 것에 비유한 이야기다. 일각에서는 1995년 DJ의 ‘지역등권론’에 빗대기도 한다.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서 평당원 신분이던 김대중은 “40년 동안 영남 정권이 계속됐다. 이제는 호남·충청·강원 등도 동등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라며 정치판을 흔들었다.  

물론 안철수는 DJ가 아니다. 정치적 존재감과 세력에서 비교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안철수 신당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은 호남 지지율 때문이다. 1월8일자 한국갤럽 조사에서도 안철수 신당은 호남에서 41% 지지율을 기록했다. 더불어민주당(19%)을 두 배 넘게 따돌렸다. 전국 지지율에서도 안철수 신당(21%)이 더불어민주당(19%)을 오차범위 내로 앞섰다.  

최근 이희호 여사를 둘러싸고 벌어진 해프닝은 안철수 신당이 얼마나 호남을 민감하게 생각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희호 여사가 안철수 의원과의 비공개 회담에서 신당의 손을 들어줬는지 여부를 두고 더불어민주당과 날선 공방이 오갔다. 이희호 여사 측의 부인으로 사건이 일단락됐지만, 만약 사실이었다면 파장이 엄청났을 ‘사건’이다. 자격 논란으로 없던 일이 되었지만, 1월8일 안철수 신당이 첫 영입 인사라며 공개한 이들이 전원 호남 출신이었다는 점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야권에게 호남은 유일하며 확실한 ‘안방’이었다. 1987년 민주화 이래 호남은 변치 않는 표밭이었다. 호남을 근거지로 충청과 연합해 김대중 대통령을 만들었고, 영남 세력 일부와 민주화운동(시민사회) 세력이 결집해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었다. 호남 없이, 야권은 어떤 정치적 도전도 불가능했다.

‘호남의 변화’가 확실하게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2012년 대선 이후였다. 안철수 신당에 대한 기대감이 치솟았다. 이를테면 〈시사IN〉이 지방선거 1년 전인 2013년 6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안철수 신당’ 깃발을 든 후보들이 호남권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들을 줄줄이 꺾는다는 결과가 나왔다(〈시사IN〉 제300호 ‘철수, 호남을 얻다’ 기사 참조). 당시 이런 여론조사 결과는 충격이었다. 겨우 6개월 전 문재인 후보에게 몰표를 몰아주던 호남 민심이 왜 돌아섰는지 의문이었다. 단순히 안철수 현상의 여파로 해석할 수는 없었다.

ⓒ연합뉴스표창원 범죄과학연구소장(왼쪽)이 지난해 12월27일 더불어민주당 입당 기자회견을 했다.

이는 결국 제1야당에 대한 거부였다. 이후 새누리당 이정현과 무소속 천정배의 당선, 그리고 지난해 4·29 재보선에서 서울 관악을의 패배는 이런 흐름 속에서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이다. 이런 흐름의 한가운데에서 안철수 신당이라는 변수가 나타난 것이다. 친노 세력(영남 패권주의)에 맞선다는 알리바이를 가지고.

더불어민주당 주류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나갈 사람은 다 나가라” “작지만 단단한 당이 되겠다”라는 목소리가 당내에서 힘을 얻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주류가 국민의당을 안이하게 보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호남 민심이 총선 때 결국은 더불어민주당에 ‘전략적 투표’를 할 것이라는 기대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호남 지역의 한 정치인은 “지금 호남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호남은 전략적 투표를 해줄 것이다’라는 말이다. 온라인 입당자가 7만명이 넘었다는데 왜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은 그대로인지 생각해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앞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보듯 안철수 신당에 대한 호남의 지지세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 인사는 또 “지금 호남에서는 (평민당 프로젝트보다는) 영남 패권주의 세력이 호남을 밀어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권노갑 고문이 나갈 때도 당에서 거의 안 말리는 걸 보고 질린 사람들이 꽤 된다”라고 말했다.

호남을 놓고 불가역적인 지각변동에 들어선 야권

더불어민주당이 신당의 앞날을 험난하게 보는 두 번째 이유는 ‘인재 영입’이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 등 ‘옛 사람’들이 속속 돌아오고는 있지만, 당 지지율이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지 않는 한 무게감 있는 인사를 데려오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더불어민주당 측은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김병관 웹젠 의장 등을 영입하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1월 말까지 영입 인재들을 속속 공개하면서 국민의당 지지세를 꺾어버린다는 계획이다.

국민의당 인적 구성이 과거와 조금 달라진 점은 있다. 그동안 더불어민주당 외곽에 속해 있던 인물들이 개인 자격으로 하나둘씩 합류하고 있다. 대개 제1야당의 당직을 지낸 적이 있다. 이들은 과거 안철수 의원의 신당 추진 때는 거리를 뒀던 인물들이다.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안철수가 좋아서 들어간 게 아니다. 제1야당을 무너뜨리려고 갔다. 그래야 총선에서 지더라도 다음 대선에서 기회가 생긴다.”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인 한상진 교수가 했던 말과 똑같다. 한상진 교수는 안철수 의원이 탈당하기 직전인 지난해 12월 초 〈동아일보〉에 “어차피 내년 총선은 틀린 것이고 다음 대선을 위해서라도 현재의 제1야당을 일단 무너뜨려야 한다”라는 칼럼을 기고해 논란을 일으켰다.

야권은 불가역적인 지각변동에 들어갔다. 범친노 대 범반노 세력의 일대 격전이 총선을 앞두고 펼쳐질 전망이다. 여기에 ‘영남 패권주의’라는 지렛대가 등장하면서 양대 세력의 호남 쟁탈전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지각변동의 끝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또다시 호남 민심에 달렸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